(2) 한국국민당
1930년에 성립된 한국독립당은 임시정부의 여당이라기 보다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고 앞에서 서술한 바 있다. 그런데 대일전선통일동맹과 민족혁명당이 결성되는 1930년대 전반에 있어 한국독립당은 세 갈래로 나뉘어졌다. 첫 갈래는 이봉창·윤봉길 의거 직후에 쇄도한 중국인들의 의연금을 둘러싸고 일어난 시비 때문에 김구와 김철 사이에 대립이 생겼고, 이에 김구 세력이 임시정부 군무장직을 사임하고 떠남에 따라 만들어졌다.522) 김구는 그 뒤 한인애국단과 군사활동에 주력하면서 한때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에 관여하지 않고 고립적인 상태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펼치고 있었다.523) 둘째 갈래는 민족혁명당 결성에 가담했던 홍진·조소앙 등의 세력이었다. 앞에서도 본 바와 같이 이들은 민족혁명당 창당 직후에 탈퇴하여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하였다. 셋째 갈래는 임시정부를 사수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한 이른바 ‘임시정부사수파’였다.
김구는 1935년에 이동녕·엄항섭 등과 제휴하고, 특히 임시정부 폐지론이 등장하게 되자 임시정부를 강력하게 뒷받침할 조직의 결성과 임시정부로의 복귀를 시도하였다. 김구는 우선 그와 타협이 가능한 세력인 한국독립당 재건파·임시정부 고수파와 제휴하고자 했다. 즉 세 갈래로 나뉘어졌던 한국독립당의 세력들이 다시 결집을 도모하게 된 것이다. “민족혁명당이 점차 독립운동의 주도적 위치를 확보하게 됨에 따라 그들은 ‘임정존치론’의 명분 아래 민족혁명당에 대항해야 할 공동의 입장에 놓이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임시정부를 둘러싸고 서로 간의 연합을 모색하였다.”524) 그러나 세 갈래 세력의 연합 모색 과정에서 김구 세력과 임시정부 고수파만이 의견을 합치시켰으니, 이로써 韓國國民黨이 결성된 것이다.
한국국민당은 민족혁명당 성립 후 4개월이 지난 11월 하순에 결성되었다. 이 당의 구성은 김구의 한인애국단을 비롯하여 임시정부 사수파 및 구 한국독립당 광동지부원 등으로 이루어졌다. 구성 간부진을 보면 이사장에 김구, 이사에 이동녕·송병조·조완구·차이석·김붕준·안공근·엄항섭, 감사에 이시영·조성관·양묵(양명진) 등이었다.525) 한국국민당의 이념은 민족주의를 강조하고 무산계급혁명론을 배격하는 내용이었다. 이 당은 창당선언에서 일제의 박멸과 임시정부의 옹호 및 완전한 민주공화국의 수립 등을 주장했다.526) 이 당의 당강은 국가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혁명적 의식을 국민에게 고취하며 민족적 혁명역량을 총집중시킬 것을 주장하고 아울러 독립운동에 대한 사이비 불순적 이론과 행동을 배격할 것임을 천명하였다.527) 그리고 광복 후 추구할 정책으로 민족혁명당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삼균주의를 채택하였다.
한국국민당은 항일투쟁방략으로 무장투쟁론을 당강에 제시했다. 그 내용은 ‘민족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적극 추구하는 것이었다. 이 방략은 한국노병회의 독립전쟁준비방략과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방략에 이어 대두된 것으로, 특히 만주사변 이후 중일전쟁의 현실화가 예견되는 시기에 적절한 것이었다. 한국국민당의 활동은 기관지를 통한 선전활동, 부문 단체를 통한 조직력 강화, 의열투쟁(특무공작) 및 중국국민당과의 협조체제 유지 등이었다. 1936년 3월에 창간된≪韓民≫은 국제정세의 분석과 민족적 항쟁을 고양시키는데 이용되었다. 한국국민당은 산하에 행동력을 가진 청년단체로 한국국민당청년단을 두었다. 이 단은 1936년 7월에 김구의 청년전위단체였던 한국특무대독립군에 이어 만들어진 것으로,528) 당의 선전부장 嚴恒燮의 지도 아래 남경중앙군관학교 졸업생 17명과 응모청년 20명으로 조직되었다. 그리고 이단의 중심인물은 김구의 장남인 金仁과 安恭根의 장남인 安禹生이었다. 또 이들은≪韓靑≫이라는 기관지를 1936년 8월에 창간했다.529)
이 청년단의 구성원은 18세 이상 35세 이하의 남녀로 구성되었다. 이 단은 강령을 통해 “스스로 훈련하고 자체의 역량을 제고·강화하여 본당의 핵심이 되는 전위적 임무를 충실히 하는 외에, 국내외에 산재해 있는 각층 청년과 제휴하여 한국광복운동에 노력한다”530)고 밝혔다. 즉 이들은 김구의 지도노선에 따라 활동하는 한국국민당의 전위활동조직이었다. 또한 한국국민당은 그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1936년 10월에 안우생 등 수명을 민족혁명당의 지부활동이 전개되고 있던 광동으로 파견하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청년들을 규합하여 한국청년전위단을 결성했다.
구 한국독립당의 조소앙·홍진 등과 이청천 세력과의 통합 모색은 1937년 초에 가서야 가시권에 들게 되었다. 1937년 2월에 이청천 세력이 민족혁명당을 탈퇴하고 4월에 조선혁명당을 다시 조직하게 되자 한국국민당의 송병조가 주축이 되어 제휴를 시도했다. 그 해 7월에 남경에서 제휴를 시도하는 과정에서 재미 독립운동단체도 함께 포함시키는 문제를 협의하는 동안 중일전쟁이 발발하여 마무리 매듭을 맺지 못하고 뒤로 미루었다.531)
522)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490∼50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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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3) | 노경채,<한국독립당의 결성과 그 변천:1930∼1945>(≪역사와 현실≫1, 한울, 1989), 217쪽. |
524) | 노경채,≪한국독립당연구≫(신서원, 1996), 63쪽. |
525) | 社會問題硏究會 編,≪思想情勢視察報告集:中華民國在留不逞鮮人の動靜≫2(京都:東洋文化社, 1976), 42쪽. |
526)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45∼547쪽. |
52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 755쪽. |
528) | 한국특무대독립군은 1934년 12월에 김구가 자신의 휘하에 있던 중국중앙육군군관학교 입교생을 중심으로 조직한 것으로 ‘김구구락부’라고도 불렸다. 이 조직은 1936년 1월에 金東宇(본명 盧鐘均)·吳冕稙·韓道源 등의 이탈로 해산되었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을 탈퇴한 金勝恩과 아나키즘계열의 金昌根 등을 규합하여 猛血團을 조직하고 한국독립당재건파와 제휴를 시도하다가 김동우를 제외한 대다수가 일제에 체포되어 해산되었다(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60쪽). 한국특무대독립군에 대해서는 한상도, 앞의 책, 333∼338쪽. |
529)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562∼563쪽. |
530) | 朝鮮總督府 高等法院檢事局 思想部,≪思想彙報≫20(1939), 267∼268쪽. |
531)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4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