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민족전선연맹
민족혁명당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을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이를 바탕으로 1935년 7월에 창당되었다. 그러나 민족혁명당은 창당 2개월 뒤인 9월에 조소앙·박창세 등의 한국독립당 출신들이 탈퇴하여 한국독립당 재건을 선언했고, 곧이어 신한독립당계열의 閔丙吉·曺成煥·홍진 등이 탈퇴하여 미완성된 단일 신당의 모습마저 흔들리게 되었다. 이 현상은 중국의 재정지원을 김원봉이 독점함에 의해 나타났다. 1936년부터는 의열단과 조선혁명당 및 신한독립당의 일부 잔류세력만 남게된 상황이었다.
민족혁명당은 이청천세력이 이탈한 1937년 4월 이후 더욱 약화되었다. 김원봉은 민족혁명당의 세력만회를 위해 연합 가능한 단체와의 교섭을 추진했다. 그는 우선 1936년 여름부터 광동지부원들이 중앙본부에 대해 반대의사를 표명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을 결성한 데 대해 이들을 복귀시키고자 노력하였다.542) 그는 이어서 무정부주의 단체인 朝鮮革命者聯盟543) 및 孫斗煥·金炳斗가 중심이 된 남경한족회와의 연합에 노력하였다. 김원봉이 이들과의 제휴를 통하여 김구 세력에 대항할 단일대당을 추구하고 있던 가운데, 중일전쟁 발발 직후인 8월에 우파진영이 광복진선을 성립시켰다.
김원봉도 중일전쟁이 터지자 7월 말에 간담회를 개최하고 민족혁명당·조선민족해방동맹·조선혁명자연맹의 대표 15인으로 구성되는 대표회의를 가졌다. 여기에서 조선민족전선통일촉성회가 조직되었다. 그런데 8월에 김구 쪽에서 먼저 광복진선을 발표함으로써 연합체 결성에 선수를 빼앗긴 꼴이 되었다. 이들은 남경 함락 직전인 11월, 대표회의를 통해 민족전선을 조직하기로 하고 규약·강령·선언 내용을 결정했다. 그러나 곧 남경이 함락되었으므로 12월 초에 漢口로 옮겨 창립을 선언했다.544) 민족전선은 창립선언을 통하여 “조선민족의 유일 활로는 전 민족의 단결력에 의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민족의 독립자주를 완성함에 있다. 고로 조선혁명은 민족혁명이며 그 전선은 ‘계급전선’도 ‘인민전선’도 아니며, 또한 프랑스와 스페인 등의 소위 ‘국민전선’과도 엄격한 구별이 있다”545)라고 하여, 현 단계의 조선혁명은 민족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이지 사회혁명이 아님을 천명했다. 즉 민족전선은 민주주의적 독립국가건설과 민족의 자유·평등 실현을 공동의 정치강령으로 하면서 단체본위의 연합형식으로 결성된 연합전선체였다. 이처럼 민족전선에 공산주의자가 참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민족의 과제를 강령으로 채택한 것은 식민지하에서 계급모순은 민족모순을 통해 관철되며, 한국에서의 총체적인 적은 일본제국주의라는 이해시각 때문이라 하겠다.546)
이처럼 민족전선은 조선의 혁명이 민주주의적 민족해방운동이어야 한다고 하면서도 1940년까지 임시정부에 대한 不關政策을 가지고 있었다. 민족혁명당은 불관정책만이 아니라 심지어 임시정부가 조선의 復國에 유해한 존재이며, 하나의 군중기초도 없는 것이고, 통치권력이 결핍된 형식적인 몇 사람의 망상이라고 혹평하였다.547) 이것은 광복진선이 임시정부의 여당기능을 가진 것에 비해, 민족전선이 임시정부의 존재마저 부정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민족전선의 조직은 선전부·정치부·경제부로 나누어졌다. 물론 민족전선이 동등한 자격을 가진 단체들의 연합체이기는 하지만, 財政權을 장악하고 있는 김원봉이 대표하고 그 아래에 세 개의 부서를 두었다. 선전부는 조선혁명자연맹 소속의 유자명을 대표로 약 50명, 정치부는 조선민족해방동맹 소속의 韓斌(일명 王志延)을 대표로 약 40명, 경제부는 민족혁명당의 李春岩을 대표로 약 10명의 인원으로 각각 구성되었다.548) 민족전선은 투쟁강령으로 소수 민족반역자를 제외한 전 민족이 연합할 것과 무장투쟁을 전개하여 일본에 대해 직접 항전을 전개할 것, 중국 및 전세계 피압박민족과 연합하여 반파시스트운동을 전개함으로써 한국혁명의 세계적 연대성을 가질 것, 그리고 국내외 혁명역량을 연계할 것 등을 채택했다. 이러한 투쟁강령에 따라 민족전선은 중국군과 함께 일본군에 항전할 군사조직으로 朝鮮義勇隊를 결성하였다.
조선의용대의 당초 목적은 조선혁명군을 조직하여 중국항전에 직접 참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인원이 크게 모자라서 우선 정치선전공작의 대오로 조직되었고, 적의 중국 공격과 한·중 양 민족에 대한 이간책을 분쇄하는 것, 조선동포와 일본군민을 쟁취하는 것, 중국항전에 참가하여 조선민족의 해방공작을 삼는 것 등을 활동방침으로 정했다.549) 조선의용대의 공작내용은 대적선전공작·대적전투·정보수집과 포로교육·대원확충·중국군민과의 합작 등이었다.550) 그런데 그들이 만주의 동북항일연군의 한인군대를 모델로 삼고 있었음이 주목된다.551)
조선의용대의 조직내용은 중일전쟁 1주년 기념일인 1938년 7월 7일에 중국정부에 보내졌다. 조선의용대는 중국정부의 지지를 받아 같은 해 10월 10일에 함락 직전에 놓인 漢口에서 조직되었다. 조선의용대는 동포와 파시스트 압제하의 민중을 연합하여 일제를 타도하고 세계의 영원한 평화를 완성하는 데 그 임무와 목표를 두었다.552) 조선의용대는 성립 초기에 약 120명의 대원으로 이루어졌고, 인원이 가장 많았을 때는 약 340명에 이르렀다. 최초의 편제는 두 개의 區隊로 이루어졌고, 제1구대는 朴孝三의 지휘하에 호남·강서일대에서 활동하고, 제2구대는 李益鳳의 지휘하에 安徽·洛陽 일대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본부는 김원봉이 지휘하여 한구에 있다가 桂林을 거쳐 重慶으로 옮겨졌다.553) 조선의용대의 성격은 투쟁강령에 따라 조직된 전투조직이었고, 중국 국민당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특수성 때문에 중국 군사위원회 정치부의 戰地工作隊에 예속되어 활동하는 국제지원군의 성격도 가지고 있었다.554)
민족전선은 기관지로≪朝鮮民族戰線≫을 발간했다. 창간호는 1938년 4월 1일에 발간되었는데, 매월 10일과 25일에 발간키로 했다. 그리고 편집인은 김규광·유자명·韓一來(본명 千炳林) 등이었고, 발간처는 朝鮮民族戰線社였다. 이 기관지는 창간사에서 “금일 만약 중국의 항전이 실패하면 조선민족의 해방은 영원히 無望하며 따라서 조선민족의 노력은 중화민족의 최후승리에 영향을 끼쳐야 한다”라고 하여 항일전쟁에 있어 한중 양국의 결속을 촉구했다.555)
민족전선은 1938년 중반에 들면서 분열현상을 보였다. 그것은 1938년 5월에 호북성 江陵에서 열린 제3차 전당대표회의에서 최창익이 김원봉의 지도권에 도전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崔昌益은 민족혁명당을 통해 조선공산당의 재건을 꿈꾸면서 민족통일전선에 대해서는 연맹조직론을 고수했으며 중국과의 연합은 중국공산당을 대상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비해 김원봉은 민주공화국의 건설을 목표로 하고 민족통일전선은 단일당의 형태여야 하며 중국국민당과 연합할 것을 주장했다. 이러한 두 세력의 갈등 때문에 최창익은 같은 해 7월에 金學武와 함께 조선의용대를 편성하기 위해 중국 각지에서 모인 중앙군관학교 星子分校 특별훈련반 졸업생 50명으로 朝鮮靑年戰時服務團을 결성하고 민족혁명당을 이탈했다가, 자금난으로 곧 민족혁명당으로 복귀한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최창익·허정숙 등은 그 해 10월에 전위동맹을 탈퇴하고 延安으로 떠났다.556) 그리하여 한빈이 전위동맹의 주축이 되어 공산주의 청년들을 지도하였다.
민족전선은 중일전쟁 직후에 성립하여 김구가 이끄는 광복진선과 더불어 양대체계를 이루었다. 민족전선이 가진 역사적 의미는 민족전선이 좌파세력을 통일하고 나아가 우파의 광복진선과 광범한 연합전선론을 제기함으로써 이후 전국연합전선협회 구성으로 나아가는 기틀을 마련했다는 데 있다. 그 반면에 내부통제에 실패하여 조직이탈을 막지 못함으로써 대동단결로 나아가는 방향에 암운이 드리워졌다. 여기에서 우파 광복진선과의 타협과 통합을 모색하는 계기를 맞게 된다.
542) | 조선민족해방동맹은 민족혁명당에 참여하지 않은 좌파인물에 의해 결성되었다. 김성숙·박건웅·김산 등이 주역이었고, 중국공산당이나 코민테른에 참가하지 않음으로써 ‘민족주의적’ 좌파 성향을 보였다(內務省 警報局,≪社會運動の狀況≫8, 1936, 東京:三一書房, 1972, 157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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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3) | 1930년에 상해에서 柳子明(본명 柳興湜)·柳基石 등이 ‘南華韓人靑年聯盟’이라는 무정부주의 단체를 조직했다. 이 단체가 1937년에 남경에서 ‘조선혁명자연맹’으로 재조직되었다. |
544)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06∼607쪽. |
545)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17쪽. |
546) | 이러한 경향은 金奎光(金星淑)의 주장에도 나타난다. “전체 민족이 똑같이 해방을 요구하고 있으며 반일의 임무를 갖기 때문에, 현 조선혁명의 주체는 어느 한 계급 혹은 어느 한 정당이 될 수 없다. 동시에 광대한 중소자산계급·민족상공업자·지주 등도 반일의 혁명성을 상당히 갖고 있고 전민족 해방투쟁에서 상당히 주요한 세력을 구성하고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金奎光,<朝鮮民族反日革命 總力量問題>,≪朝鮮民族戰線≫5·6, 1938). |
547) | 胡春惠,≪中國안의 韓國獨立運動≫(단국대출판부, 1978), 115쪽. |
548)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15쪽. |
549) | 金若山,<第二年的開始>(≪朝鮮義勇隊通訊≫7기;국가보훈처,≪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8), 276쪽. |
550) | 金喜坤,<조선의용대의 독립운동전략>(≪韓國近現代史硏究≫11, 1999), 15∼27쪽. |
551) | 韋 明,<英勇戰鬪中的東北朝鮮革命軍>(≪朝鮮義勇隊≫39기;국가보훈처,≪海外의 韓國獨立運動史料≫8), 485∼486쪽. |
552) | 胡春惠, 앞의 책, 138쪽. |
553) | 胡春惠, 위의 책, 138∼139쪽. |
554) | 胡春惠, 위의 책, 141∼142쪽. 이러한 성격은 1940년 9월 17일 중경에서 성립한 한국광복군의 경우와 같다. |
555)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 620쪽. |
556) | 이정식·한홍구 엮음,≪항전별곡≫(거름, 1986), 67∼7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