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30년대 후반·4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1930년대 후반, 1940년대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은 강제연행에 대한 저항과 청년학생의 단체 조직을 통한 반일투쟁으로 대분할 수 있다.
강제연행에 의해 끌려간 조선인은 일본제국주의의 지배에 무기력하게 당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1944년 10월 16일부터 10월 25일까지 불과 10일만에 조선 전토에서 “징용령을 내렸으나 출두하지 않는 자”가 2만 3,166명에 달했다. 탄압과 저항에 대해 태업·파업·폭동 등과 노동기피를 통해 저항했다. 탄광을 비롯한 일본의 산업현장에 동원된 조선인 노동자들이 저항행위를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일본인 감독자 및 노동자의 민족적 차별과 인격적 모욕이었다. 실제로 조선인 노동자들의 저항은 조직적이고 계획적인 저항이 많았다.892)
그런가 하면 1930∼1940년대 유학생의 운동을 보면, 1936년 메이지大學의 조선유학생연구회사건, 나고야의 민족부흥회사건, 교토의 평안그룹사건들이 있었다. 아울러 1940년대의 경우도 부단히 소그룹별 운동은 지속되는데, 사고조선청년막스주의연구회, 와세다대학(早稻田大)유학생그룹, 1940년 나고야의 민족주의그룹사건, 1943년의 토쿄의 우리독립운동그룹사건, 이밖에도 오사카와 고베 등지에서 계림동지회·조선인민족주의사건·전진회사건·민족주의집단충성회사건·조선학생민족주의집단사건·조선인직공민족주의집단사건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조직의 활동을 보면 다음과 같다.
892) | 강만길,<침략전쟁기 일본에 강제동원된 조선노동자의 저항>(≪한국사학보≫2, 1997), 262∼263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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