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천주교
한국천주교회사는 일반적으로 창설기와 박해기,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공간의 교회사와 현대 등 크게 세 시기 혹은 여섯 시기로 구분된다. 여기에서 개화기와 일제강점기를 하나의 시기로 묶는 경우는, 制度敎會로서 교회당국의 선교정책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점 때문이다. 이 시기에 전개된 교회의 문화정책이나 실제의 문화활동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이 두 시기는 교세의 변모, 敎區의 분할과 본당의 확대, 새 선교단체의 진출과 활동이라는 교회 내적인 측면과 국가권력의 변화와 종교정책, 사회변화에 따른 영향 등 외적인 측면에서 서로 구분될 수 있다.
교회당국에서는 1886년의<韓佛條約>체결로 傳敎의 자유를 얻게 된 이후 일제강점기 내내 聖俗二元論에 입각한 政敎分離政策을 강조하였다. 이는 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선교권을 보장받기 위한 방책이었으나, 일제치하에서는 총독부가 내세운 표면상의 정교분리정책 내지는 그 체제를 옹호한 결과를 낳고 말았다. 아울러 교회보호론을 앞세운 선교방침은 일제의 종교정책에 의해 자주 흔들리거나 위축될 수밖에 없었고, 교회당국에서 지향하던 민족의 복음화 즉 교세확대의 노력도 예상과는 달리 저조한 결과로 나타나게 되었다. 게다가 일반신자들은 일제의 경제적 수탈과 빈곤으로 인해 자주 제도교회의 聖事중심주의와 선교우선주의에서 이탈되어 가곤 하였다.
교회의 문화활동도 이러한 상황 아래에서 자주 제약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당국에서는 선교방침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종교 활동에 필요한 문화활동만을 견지해 나가고자 하였으며, 이로 인해 일반신자들의 욕구와는 달리 극히 제한된 문화활동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내적인 필요에 의해 중시된 신학교육과 교리교육, 애국계몽의 필요성과 문명개화의 열망에 부응하기 위해 추진된 일반교육과 출판·언론활동, 미사 전례 등 교회활동에 필요한 건축활동, 교회문학이나 예술활동 등이 꾸준히 추진되었다. 또 그 한편에서는 교육과 언론을 바탕으로 애국계몽운동 내지는 독립정신을 고취시켜 보려는 시도도 있었으나, 일제의 탄압에 의해 끝내 좌절을 겪지 않으면 안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