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Ⅳ. 종교6. 천주교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1. 일제의 교육정책
          • 1) 식민지 교육정책의 기본성격
          • 2) 제1차<조선교육령>과 식민지 교육제도
          • 3) 민족교육기관에 대한 탄압
        • 2. 민족교육의 정비
          • 1) 문화정치와 교육실태
          • 2) 민족운동의 전환과 실력양성론
          • 3) 제2차<조선교육령>과 민족교육
        • 3. 민족교육운동의 전개
          • 1) 사립학교 교육
          • 2) 민립대학설립운동
          • 3) 민중계몽 교육운동
            • (1) 민중교육기관 설립의 배경
            • (2) 민중교육기관의 성격
            • (3) 민중교육운동의 주체
        • 4. 민족교육의 수난
          • 1) 침략전쟁과 황국신민화정책
          • 2) 황민화교육과 민족교육의 수난
      • Ⅱ. 언론
        • 1. 일제의 언론정책
          • 1) 법적 규제
          • 2) 사전탄압과 사후탄압
        • 2. 무단통치기의 언론
          • 1) 총독부 기관지 독점기
          • 2) 도쿠토미의≪국민신문≫과≪매일신보≫
          • 3) 잡지의 발달
        • 3. 문화정치기의 언론
          • 1) 3·1운동 직후의 여러 독립신문
          • 2) 상해의≪독립신문≫
          • 3) 3대 민간신문의 창간
            • (1)≪조선일보≫
            • (2)≪동아일보≫
            • (3)≪시사신문≫
          • 4)≪시대일보≫와≪중외일보≫
            • (1)≪시대일보≫
            • (2)≪중외일보≫
          • 5) 일제의 언론탄압
            • (1) 행정처분
            • (2) 사법처분
        • 4. 1930년대의 언론
          • 1) 논조의 위축과 사세의 신장
          • 2) 잡지 발행 경쟁과 일본제품 광고
          • 3) 문자보급-농촌계몽운동
          • 4) 3대 민간지의 폐간
      • Ⅲ. 국학 연구
        • 1. 국어학
          • 1) 국어연구 단체의 조직과 국어연구
            • (1) 국어연구 단체
            • (2) 국어연구
          • 2) 국어운동의 전개
          • 3) 조선어학회사건
        • 2. 국문학
          • 1) 국학파의 연구
          • 2) 실증주의적 국문학 연구와 그 분화
        • 3. 국사학
          • 1) 민족주의사학
          • 2) 사회경제사학
          • 3) 실증사학
      • Ⅳ. 종교
        • 1. 일제의 종교정책
          • 1) 일제 종교정책의 기조
          • 2) 무단통치기의 종교 억압·통제정책
          • 3) 문화정치기의 종교 회유·분열정책
          • 4) 침략전쟁기의 종교 이용·탄압정책(1931∼1945)
        • 2. 천도교·대종교
          • 1) 천도교
            • (1) 천도교의 창시
            • (2) 교규의 정비와 교리의 정립
            • (3) 3·1운동의 주도와 임시정부 수립 활동
            • (4) 문화운동론의 수용과 문화운동의 전개
            • (5) 사회변혁론의 모색과 천도교의 분열
          • 2) 대종교
            • (1) 대종교의 중광과 그 배경
            • (2) 대종교의 확산과 조직의 정비
            • (3) 대종교의 독립운동
            • (4) 대종교의 수난
        • 3. 불교
          • 1) 식민지 불교의 성립
            • (1)<사찰령>체제
            • (2) 원종 및 임제종의 퇴진
            • (3) 30본산 연합제규와 불교의 중흥
          • 2) 3·1운동과 불교계의 각성
            • (1) 3·1운동 참여
            • (2) 독립운동에 동참
            • (3) 불교의 자주화와 통일기관
            • (4) 불교전통의 회복
          • 3) 불교자주화의 시련
            • (1) 불교운동의 기반 구축
            • (2) 승려대회와 종헌
          • 4) 조계종의 성립과 식민지체제에 좌절
            • (1) 총본산건설운동과 조계종
            • (2) 군국주의 체제에 좌절
        • 4. 유교
          • 1) 일제강점기의 유교문제
          • 2) 유림의 항일운동과 일제의 탄압
            • (1) 순절과 망명의 항거
            • (2) 유림의 독립청원활동
          • 3) 계몽운동과 유교개혁운동
            • (1) 계몽운동과 민족의식 고취
            • (2) 유교개혁운동의 양상
          • 4) 일제의 유림 회유정책과 분열정책
            • (1) 일제의 유림 회유정책
            • (2) 일제의 유림 분열정책
          • 5) 일제의 동화정책과 유교전통의 파괴
            • (1) 일제의 제도적 동화정책
            • (2) 일제의 문화적·풍속적 동화정책
          • 6) 일제하의 유교의 특성
        • 5. 개신교
          • 1) 식민지시기 개신교의 상황
          • 2) 개신교의 토착화를 위한 노력
          • 3)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을 위한 활동
            • (1) 언론·출판
            • (2) 한글 연구와 보급
            • (3) 역사와 지리 연구
            • (4) 문학·음악·미술·건축
            • (5) 물산장려운동
        • 6. 천주교
          • 1) 교육활동
          • 2) 출판·언론활동
          • 3) 문학·건축·예술활동
      • Ⅴ. 과학과 예술
        • 1. 과학
          • 1) 국내 과학기술교육의 여건
          • 2) 민간 주도의 해외유학
          • 3) 과학기술자들의 활동
        • 2. 음악
          • 1) 제1기-무단통치기의 음악
            • (1) 한국음악사회의 통제
            • (2) 한국전통음악의 약체화
            • (3) 일본 음악교육의 강제화
            • (4) 민족음악의 전개
          • 2) 제2기-문화통치기의 음악
            • (1) 한국음악사회의 통제
            • (2) 일본음악교육의 강제화
            • (3) 민족음악의 전개
          • 3) 제3기-전시체제하의 음악
            • (1) 한국음악사회 통제와 친일파 육성
            • (2) 전시체제하 노래 및 음악교육
            • (3) 전문음악가들의 창작활동
            • (4) 민족음악의 전개
        • 3. 미술
          • 1) 전통 화단과 서양화의 이입
          • 2) 서화협회와 조선미술전람회
          • 3) 서양화의 정착과 새로운 모색
          • 4) 근대적 성격의 조각
          • 5) 전시체제하에서의 미술
        • 4. 체육·무용
          • 1) 일제하 근대체육의 성장과 시련
            • (1) 일제의 식민지 체육정책과 민족체육의 대응
            • (2) 3·1운동 이후 문화통치와 민족체육의 성장
            • (3) 전시파쇼체제와 민족체육의 저항
          • 2) 일제하 근대무용의 시련과 성장
            • (1) 일제하 전통무용의 계승과 시련
            • (2) 일제하 신무용의 출현과 성장
        • 5. 연극·영화
          • 1) 1910년대-전통극과 신파극
          • 2) 3·1운동이후∼1920년대-소인극운동
          • 3) 1930년대-대중극·신극과 영화의 발전
          • 4) 1940년대-연극·영화의 암흑기
      • Ⅵ. 민속과 의식주
        • 1. 민속
          • 1) 식민지시기 민속의 변화
          • 2) 생산관련 민속
          • 3) 가족과 친족
          • 4) 촌락과 향촌사회
          • 5) 신앙과 의례
          • 6) 세시풍속, 예능 및 설화
        • 2. 의생활
          • 1) 의생활 변화의 흐름과 양상
          • 2) 흐름의 대세
            • (1) 의복개량
            • (2) 백의금지와 색의권장
            • (3) 몸뻬출현
            • (4) 국민복
          • 3) 변화의 양상
            • (1) 두식(모발과 관모)
            • (2) 의복
            • (3) 기타
        • 3. 식생활
          • 1) 식생활 환경의 변화
            • (1) 소작농과 화전민 급증
            • (2) 토막민·실업자·걸인의 급증
            • (3) 일본의 곡물 수탈
            • (4) 식품 제조업의 발달
            • (5) 서구식 영양 이론의 도입
            • (6) 일본과 외국 음식의 전파
            • (7) 식료품 배급제도
            • (8) 전통 식생활의 전승과 신여성 교육
          • 2) 식품의 종류와 유통
            • (1) 식사 횟수와 섭취량
            • (2) 주식의 곡물 식품
            • (3) 곡류 식품의 생산과 유통
            • (4) 육류 찬물과 축산 식품
            • (5) 어패류 찬물과 수산 식품
            • (6) 소채 찬물과 소채 식품
            • (7) 과실류
            • (8) 조미식품
            • (9) 기호식품
        • 4. 주생활
          • 1) 주생활 개선을 통한 주택개량운동
          • 2) 근대건축가들의 등장과 문화주택
          • 3) 도시형 한옥의 등장
          • 4) 조선주택영단의 설립과 영단주택의 건설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1) 교육활동

 일반적으로 일제치하에서 전개된 교육활동은 민족교육 내지는 민족운동과의 상관성 아래서 그 의의가 부각되었으며, 그 결과 천주교회의 교육활동은 개신교측에 비해 미흡했던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 실제로 1910년 2월의 통계를 보더라도 통감부로부터 인가를 받은 장로교 계통의 학교가 501개교, 감리교 계통의 학교가 158개교였던 데 비해 천주교 계통의 학교는 46개교에 불과하였다.398) 물론 이러한 결과는 고등교육에 회의적이었던 교회당국에서 적극적으로 교육정책을 추진하지 않았고, 재정적으로도 빈약한 데 일차적인 원인이 있었다.399)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국계몽운동과 국권회복운동이 전개되어 가면서 교회측에서도 여기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고, 특히 1907년 이후에는 각처의 本堂신부나 지도층 신자를 중심으로 학교설립이 가속화되기 시작하였다.400) 실제로 교회안에서는 비록 당국의 인가를 받지는 못하였지만 수많은 비인가 학교들을 운영함으로써 당시의 교육활동에 일조를 하였다.401)

 실제로 교회측에서는 1910년 이전까지 학교설립과 교육이념을, 첫째 참개화와 부국건설, 둘째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정신과 민족의식의 고취, 셋째 천주교교리의 가르침에 따른 敬天愛人과 愛主愛人에 두고 있었다.402) 그러나 일제치하로 들어와서는 그 의미가 계속 축소되어 갔다. 민족운동에 부합하는 교육활동을 강조하는 대신, 첫째 시대상황에 합당한 지식전달과 민족의 발전, 둘째 교회의 발전과 선교의 목적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403) 게다가 확고하고 적극적인 정책을 펴지 못하면서 교회의 교육활동은 일제의 통치정책에 좌우될 수밖에 없었다.

 일제강점기의 교육활동은 크게 신학교육과 일반교육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교회당국에서는 이중에서도 신학교육에 가장 관심을 기울였다. 한국천주교회는<韓佛條約>의 체결로 신앙의 자유를 얻은 다음해 여주 부엉골(현 경기도 여주군 강천면 부평리)에 있던 소신학교(라틴어반)인 예수성심신학교를 용산으로 이전하여 대·소신학교로 운영함으로써 그 발전을 꾀하였다. 이후 한국의 신학교는 1914년 10월 3일 大邱敎區의 성유스티노신학교가 개교하면서 2개교로 증가하였고,404) 1921년 11월 1일에는 포교성베네딕도회(the Congregation of St. Ottillien O.S.B., 芬道會)에서 서울 柏洞(현 혜화동)에 소신학교를 설립하면서 3개교로 증가하였다. 이 백동의 소신학교는 1920년에 元山敎區가 설정되고, 1927년에 베네딕도회가 원산 인근의 德源으로 이주함과 동시에 그곳으로 이전되었으며, 1929년 9월부터 대신학교(철학반과 신학반)를 시작하였다.405) 이어 용산 예수성심신학교는 1928년 말에 대·소신학교의 분리를 단행함과 동시에 南大門商業學校를 갑조(일반 상업학교)와 을조로 편성하여 을조를 소신학교로 운영하고, 대신학교는 그대로 용산에 두었다.406)

 이처럼 교회당국에서 신학교육에 깊은 관심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선교사들이 운영하던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는 첫째 재정상의 어려움, 둘째 校舍의 부족, 셋째 교수인원과 자질의 부족, 넷째 교육과정상의 문제점, 다섯째 교육방법상의 문제점 등을 안고 있었다.407) 다만, 독일선교사들이 운영하던 덕원의 베네딕도회 신학교는 이들에 비해 교수자질과 교육과정 등에서 좀더 나은 편이었다.408) 뿐만 아니라 덕원신학교에서는 1935년 2월 10일에 13년의 교육과정(중학교 5년, 고등학교 2년, 철학과 2년, 신학과 4년)으로 인가를 받았으나,409)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에서는 총독부의 인가를 등한시하였다. 이로 인해 서울과 대구의 신학교는 일제 말기인 1942년 2월 16일과 1945년 3월에 각각 폐교되었고, 신학생들은 궁여지책으로 덕원신학교로 가서 교육을 받아야만 하였다.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천주교회측에서 운영하는 일반학교들은 1910년에 모두 124개교였고, 그 중 46개교가 통감부의 인가를 받았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초등교육기관이거나 야학·강습소·교리학교 수준에 지나지 않았으며, 중등 이상의 교육기관은 신학교와 베네딕도회에서 운영하던 崇工學校와 崇信學校뿐이었다. 숭공학교는 1910년 백동에서 4년제로 개교한 실업학교였다. 이 학교의 교과과정은 일제당국에 의해 제한될 정도로 고급기술이나 전문적인 과학지식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조선인들에게는 새로운 과학기술교육으로 비추어져 호응도가 매우 높았고, 따라서 개교한 지 얼마 안되어 좋은 반응을 얻음으로써 1914년 7월에는 학생수가 70명에 이르게 되었다.410) 그러나 1914년 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교육을 담당하던 독일수사들이 참전하게 되었고, 전쟁 후에는 독일에서의 원조가 줄어들면서 타격을 받기도 하였다. 이후 숭공학교는 1921년까지 계속 유지되다가 베네딕도회가 덕원으로 이전하면서 1923년의 졸업생을 끝으로 폐교되었다.

 숭신학교는 제8대 서울교구장인 주교 뮈텔(Mutel, 閔德孝)이 간절히 원하던 사범학교로, 1911년 9월 16일에 2년제로 개교하였다. 사실 뮈텔이 베네딕도회를 초청한 이유도 사범학교의 운영과 천주교신자 교사의 육성 때문이었다.411) 대학설립의 필요성을 인정하지 않던 그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고등교육의 필요성을 깨달은 것이다. 숭신학교는 종교를 비롯하여 윤리·교육학·한글·한문은 물론 일본어·세계사·지리·수학·박물학·음악·미술·체조 등 고등교육기관으로서의 교과과정을 편성하였는데, 숭공학교처럼 인기는 없었다. 처음 23명이던 학생수가 1912년에는 26명, 1913년에는 17명으로 줄었으며, 게다가 일제당국에서 한국인 교사양성을 원치 않았고 애국계몽적인 교과과정을 이유로 탄압해 오면서 1913년 제1회 졸업생만을 배출한 뒤 폐교되고 말았다.412)

 한편 서울교구에서는 1922년 2월에 을종상업학교인 昭義商業學校(3년제)를 인수하였다. 그런 다음 4월 1일자로 5년제 갑종상업학교로 인가를 받고, 교명도 南大門商業學校로 개칭하였다.413) 당시 서울교구에서 이를 인수한 목적은, 우선 인재양성을 통한 교회의 성장을 도모하려는 데 있었고, 다음으로 신자학생들의 올바른 교육과 선교목적을 위해서 였다.414) 이후 이 학교는 1928년 말에 을종인 소신학교를 운영하기 시작하였고, 1931년에는 東星商業學校로 개칭하면서 천주교회의 유일한 중등교육기관으로 성장하였다.

 천주교회의 교육활동은 일제 당국이 1911년부터 정교분리라는 기본틀에 입각하여 종교와 교육의 분리정책을 시도해 나가면서 갖가지 제약을 받아야만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먼저 1911년 8월 23일의<조선교육령>(칙령 제229호)과 10월 20일의<사립학교규칙>(총독부령 제114호)을 통해, 민족주의적이고 정치적인 교육통제는 물론 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에서의 종교교육과 종교의식의 금지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일제는 종교사립학교를 억제하고 궁극적으로는 교회학교가 독립운동에 미치는 영향을 억제하고자 하였다.415) 여기에는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는 학교도 포함되었으니, 숭신학교의 폐교는 그 좋은 예였다.

 이어 일제는 1915년 3월 24일에<개정사립학교규칙>(총독부령 제24호)을 공포하여 학교교육에서의 성서과목을 제외시키도록 하였으며, 고등보통학교로의 교명개칭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선교나 종교교육과 무관하게 된 학교운영의 필요성에 대해 점차 회의를 갖게 되었고, 보통학교의 인가에 필요한 교사·시설자격을 갖추는 데 있어서 재정상의 어려움을 토로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 아래서 교회학교 대부분은 총독부에서 유예기간으로 정한 10년 동안만 교회학교 안에서 종교교육을 유지시키려고 했을 뿐 어떠한 대책도 수립하지 않았다.416) 뿐만 아니라 제1차 세계대전으로 서양선교사들이 참전하게 되면서 서울과 대구교구 모두 선교사가 부족하게 된 것도 학교수가 감소하는 원인이 되었다.417) 그 결과 천주교학교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계속하여 감소하게 되었으며, 1916년에는 80개교에 2,451명의 학생수만을 기록하였다.

연도 1911 1912 1913 1914 1915 1916 1920 1921 1922 1924 1929 1930
학교수 118 102 99 110 97 80 94 99 118 177 200 185
학생수 2,930 2,599 2,773 3,055 2,583 2,451 2,953 4,474 6,732 9,566 10,156 10,400

<표 1>천주교학교 및 학생현황

M.E.P., Compte-Rendu(Seoul:Taikou, 1911∼1930).
≪경향잡지≫(1916년∼1930년).

 당시<개정사립학교규칙>에 따라 천주교회에서 인가를 받은 6년제의 고등보통학교는 서울의 啓星學校와 加明學校, 제물포의 博文學校, 장연의 敬愛學校, 대구의 海星學校와 曉星女學校, 원산의 海星學校 등 7개교뿐이었다. 천주교회의 교육활동에 변화가 있게 된 것은 일제가 1920년 3월 1일에 문화정책을 표방하면서 공포한<사립학교규칙개정령>(총독부령 제21호)을 통해 교회학교 안에서 성서과목의 교수를 허용하고 종교의식과 행사를 허용하면서였다. 이에 따라 1921년에는 전년에 비해 학교수가 5개교 증가하였을 뿐인데도 학생수는 약 50%가 증가하였으며, 이후로는 학교수가 꾸준히 증가되어 갔다.418)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천주교회측에서도 학교인가에 노력하여 1935년에는 인가된 보통학교수가 25개교로 증가하게 되었고,419) 이밖에도 인가를 받지 않은 학원·강습소·야학이나 서당·교리학교가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었다. 천주교회에서는 이들 학교를 통해 민중교육운동이나 빈민아동교육은 물론 여성운동에서도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420)

 이처럼 일제 강점기에 있어서 천주교회의 교육활동은 초등교육과 야학을 통해 꾸준히 지속되었다. 그러나 양적인 면에서는 미흡하였고, 고등교육활동도 1922년에 인수한 남대문상업학교와 베네딕도회에서 설립한 숭공학교·숭신학교에 한정되었다. 또 교회당국에서 가장 관심을 갖고 있던 신학교의 경우에는, 앞서 설립된 서울·대구의 신학교가 교육과정과 교수 자질면에서 베네딕도회에서 운영하는 덕원신학교에 비해 뒤떨어지고 있었다. 게다가 서울·대구의 신학교는 총독부의 인가를 받지 않은 탓에 일제 말기에 이르러 폐교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들은 비록 일제치하의 교회교육활동이 민족교육운동에 일정한 기여를 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는 있을지라도, 제도교회 차원에서의 교육정책이 미흡하였다는 점을 단적으로 설명해 주고 있다.

398)俵孫一,≪韓國敎育の現狀≫(학부, 1910), 53∼54쪽.
399)盧榮澤,<日帝下 韓國天主敎會의 敎育事業硏究(1)>(≪崔奭祐神父華甲紀念 韓國敎會史論叢≫, 한국교회사연구소, 1982), 423∼425쪽. 당시 한국천주교회의 수장인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Mutel, 閔德孝)은 1900년경 安重根(토마스)이 대학설립을 건의하자 종교활동에 장애가 된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거절한 적이 있었다(安重根,<安應七歷史>, 尹炳奭 역편,≪安重根傳記全集≫, 국가보훈처, 1999, 141쪽;車基眞,<안중근의 천주교신앙과 사상>,≪2000년 대희년과 안중근 토마스≫,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16쪽).
400)金成喜,<한국천주교회의 교육 활동-1882∼1910년을 중심으로->(≪한국천주교회사의 성찰≫, 한국교회사연구소, 2000), 712쪽.
401)1910년에만 해도 천주교회에서 운영하던 학교는 모두 124개교, 학생수는 모두 3,048명이었다(M.E.P., Compte-Rendu, 1910, Seoul). 따라서 통감부에서 인가를 받은 46개교는 전체 숫자의 37%에 불과하였다.
402)金成喜, 앞의 글, 703∼706쪽.
403)盧榮澤, 앞의 글, 413∼422쪽. 다만, 間島지역의 천주교회만은 일제치하에 들어와서도 활발한 교육활동을 전개해 나갔고, 이것이 독립운동의 역량이 되었다고 한다(尹善子,≪朝鮮總督府의 宗敎政策과 天主敎會의 對應≫, 국민대 박사학위논문, 1997, 118∼125쪽).
404)<Nouvelles de la Mission>, 1913년 9월 4일∼1914년 10월 4일.

대구대교구사편찬위원회 편,≪大邱本堂百年史≫(대건출판사, 1986), 235∼236쪽.
405)한국교회사연구소 편,≪함경도천주교회사≫(함경도천주교회사간행사업회, 1995), 212∼213쪽·302∼303쪽.
406)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1929년도 보고서>(≪서울敎區年報≫II, 천주교 명동교회, 1987), 242∼243쪽.
407)최석우,<한국교회와 한국인성직자 양성>(≪논문집≫11, 가톨릭대학, 1985), 189∼190쪽.
408)덕원신학교에서는 초기부터 박사학위를 가진 우수한 교수선교사를 확보하고 다양한 교과목을 개설하는 데 노력하였다. 그 결과 1929년 대신학교 과정이 시작될 무렵에는 라틴어와 철학·신학은 물론, 물리학과 수학, 교리와 음악, 교회사·독일어 등의 교과목이 개설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인 교사를 채용하여 한문이나 조선과 동양의 역사지리를 가르치도록 하였으며, 일본인 교사로 하여금 수학과 실과, 일본어를 가르치도록 하였다. 또 1933년에 신학반이 시작된 이후에는 교리신학과 성서, 윤리신학, 교회법과 사목신학, 교리교수법과 설교학, 전례학과 교부학 등 다양한 교과목이 추가로 개설되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앞의 책, 1995, 306∼310쪽).
409)한국교회사연구소 편, 위의 책(1995), 311쪽.
410)崔奭祐,<韓國芬道會의 初期修道生活과 敎育事業>(≪韓國敎會史의 探究≫II, 한국교회사연구소, 1991), 402∼403쪽. 숭공학교의 연도별 학생수 현황은 다음과 같다. 다음 표에서 괄호안의 숫자는 助手를 말하는데, 조수란 4년의 정규과정을 마친 학생들 가운데서 원하는 사람을 2년간 유급으로 학교에 남아있도록 한 제도였다.

연도 1910 1911 1912 1913 1914 1915 1916 1917 1918 1919 1920 1921 1922 1923
학생수 50 40 41 40 70 47 30 20(11) 16(10) 13(10) 27(6) 35 18 18

411)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앞의 글(1987), 54쪽.
412)崔奭祐, 앞의 글(1991), 407쪽.
413)東星中高等學校,≪東星八十年史≫(크리스챤출판사, 1987), 139∼142쪽.
414)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 앞의 글(1987), 191∼192쪽.
415)文炯滿,<日帝의 植民敎育과 宗敎敎育의 葛藤>(≪近代民族敎育의 展開와 葛藤≫,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82), 155쪽.
416)尹善子, 앞의 책, 42·150쪽.
417)당시 용산 예수성심신학교에서도 교수의 부족으로 1911년 이래 3년을 기다려 온 입학생을 받을 수 없었으며, 1914년 8월부터 1916년 6월까지 교장인 신부 기낭(Guinand, 陳普安) 혼자서 신학교를 담당해야만 하였다. 그러다가 1916년 6월에 신부 金聖學(알렉시오), 1917년 가을에 신부 프와요(Poyaud, 表光東)가 신학교 교수를 맡게 되었다(한국교회사연구소 역편,<1916년도 보고서>, 앞의 책, 1987, 138쪽;<1918년도 보고서>, 149쪽).
418)尹善子, 앞의 책, 151쪽.
419)≪가톨릭硏究≫(1935년 9·10월 합병호).

≪가톨릭靑年≫(1936년 10월호). 당시 각 교구별로 인가된 보통학교수를 살펴보면, 서울교구 4개교, 대구교구 4개교, 원산교구 6개교, 평양교구 3개교, 연길교구 10개교였다.
420)盧榮澤,<日帝下 韓國天主敎會의 敎育事業硏究(2)>(韓國天主敎會創設二百周年紀念≪韓國敎會史論文集≫1, 한국교회사연구소, 1984), 256∼263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