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해방 이전 소련의 대한정책
해방 이전 시기 소련의 동북아시아정책에서 한반도지역은 결코 부차적인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소련은 대일전 참전에 앞서 이 지역에 소련과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겠다는 구체적 원칙을 세워놓고 있었다. 소련의 대일전 참전이 준비 단계에 들어선 시점에서 소련정부의 대한정책 담당자들은 친소적인 한국독립정부의 수립을 우선 순위로 하고 소련의 주도적인 역할이 보장되는 조건에서 신탁통치 실시를 차선의 방책으로 하는 대한정책구상을 하고 있었다.008)
소련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에서 동아시아의 방어망 구축을 위해 동아시아로 시선을 돌렸다. 소련은 1941년 4월 13일 일본과 중립조약을 통해 외교적인 방어망을 구축한 후 대독일전에 전력투구하였다. 2차대전에서 독일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군은 결정적인 요소였으며 이는 일본과의 중립조약이 없었다면 매우 어려웠을 것이다.009) 하지만 러일전쟁 이래로 일본은 소련을 재침입할 수 있는 적대국가였으며, 소련에게 대독일전쟁의 승리 이후 접경지역인 만주와 한반도로부터 일본을 몰아내는 것은 동아시아지역 방어망 구축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되었다. 한반도 해방문제, 혹은 한반도로의 세력확장 문제는 소련의 부차적인 목표였고, 우선 소련의 최대 접경지인 만주지역에서 일본세력의 퇴출, 이후 침략의 발판이 될 수 있는 한반도로부터 일본세력 퇴출, 그리고 한 단계 더 나아가서는 일본 본토에 대한 세력확장이 소련 동아시아정책의 최대 목표였다.
해방 이전 소련이 한반도에 대해 구체적인 정책을 지니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자료는 1945년 6월 29일 소련 외무성 제2극동국장 주코프와 부국장 자브로딘에 의해 작성된 보고서이다. 이 보고서는 대일참전 이전의 한국에 대한 소련의 관심과 구상을 알 수 있는 최초의 자료이다.
1. 한국을 통해 아시아 대륙으로 팽창하려는 일본에 대한 러시아의 투쟁은 역사적으로 정당한 행위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극동에서 일본의 한국 침략을 저지할 만큼 충분한 힘을 보유하지 못했으며, 일본이 영국 및 일정 정도로 미국과 독일의 지지를 받고 있었던 데 반해 러시아는 본질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
2. 일본은 한국에서 영원히 구축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한국이 일본의 지배하에 놓이게 되면, 소련의 극동이 항상적으로 위협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 한국이 장차 일본만이 아니라 극동으로부터 소련에 압박을 가하려는 임의의 다른 강대국에 의해 소련을 공격하는 전초기지로 전환되는 것을 저지할 수 있을 만큼 한국의 독립은 효과적이지 않으면 안된다. 소련과 한국의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확립하는 것이야말로 한국의 독립과 소련 극동지역의 안전을 보증하는 보다 현실적이고 올바른 방안이 될 것이다. 장차 한국 정부가 수립될 때 이것은 반드시 실현되어야 한다.
4. 한국에 대한 중국과 미국의 이해를 고려할 때 한국문제 해결은 의심할 여지없이 일련의 곤란에 부딪히게 될 것이다. 그 외에도 일본에게서 대만과 澎湖諸島를 빼앗으면 일본으로서는 남쪽 방향으로 진출할 길이 차단될 것이다. 그러나 이를 보충하기 위해 일본은 경제적 이해관계를 승인하는 형태일지라도 한국에서 배출구를 찾으려 시도할 가능성이 있다. 소련의 이해관계에서 일본의 한국에 대한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은 배제되어야 한다.
(전현수,<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대북한정책>,≪한국독립운동사연구≫9, 1995, 352쪽에서 재인용).
위의 자료를 놓고 볼 때 소련의 대한정책은 대동아시아정책의 일부분이었고, 소련의 만주 및 한반도 진공은 소련에 우호적인 국가들로 방어망을 구축하기 위한 작업의 일환으로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해방 이전 소련 대한정책의 핵심은 일본세력의 완전한 축출에 있었다. 해방 직후까지만 해도 동아시아에서의 소련 최대의 적은 미국이 아닌 일본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의 막대한 희생 앞에서 일본이 만주나 한반도를 통해 재침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전후 소련의 1차적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해방 직전과 직후에 소련의 관심이 일본에 집중되었음을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는 한반도의 38도선 분할안이 포함된<일반명령 제1호>에 대한 답신 및 이후 소련의 태도이다.
<일반명령 제1호>는 일본군의 항복 접수에 관하여 중국·대만 및 북위 16도 이북의 인도차이나에서는 일본군이 중국의 장개석에게 투항하며, 만주·북위 38도 이북의 한국과 사할린에서는 소련군 사령관이 항복을 받도록 하고, 일본·필리핀 및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국에서는 맥아더 장군이 항복을 받도록 각국의 접수 영역을 분할하였다. 1945년 8월 15일의<일반명령 제1호>에 대해 스딸린은 바로 다음 날 미국 대통령 트루만에게 회신을 보내어 아래와 같이 수정 제안을 하였다.
1. 3대국 크리미아회담의 결정에 의거, 소련이 영유하기로 된 쿠릴열도를 일본군의 대소련군 항복지구에 포함시킬 것.
2. 사할린과 홋카이도 사이의 소야해협 북방에 접하고 있는 홋카이도 북부를 일본군의 대소련군 항복지구에 포함시킬 것.
(H. S. 트루만 지음·박관숙 역,≪트루만≫, 1984, 201∼202쪽).
미국은 이에 대해 8월 18일 위의 1항, 즉 쿠릴열도를 소련군 항복지구에 포함시키자는 제의에 동의한 반면, 일본 본토의 일부에 소련군이 진주할 것을 요구하는 제2항은 명백히 거부하였다.010)
이와 같이 소련이 미국의 제의에 신속하게 동의한 것은 일본이라는 반대급부를 요구하기 위해 한반도의 38선 분할점령을 수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주와 한반도에 관한 이해관계도 일본의 재침략 방지라는 의식이 그 핵심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러한 까닭에 소련은 한반도에 대한 분할점령을 쉽게 수락할 수 있었고, 일본 점령에의 참여라는 새로운 제안을 다음날로 미국에 발송하였다.
전반적으로 소련의 대한정책은 일본의 ‘비군사화·민주화’라는 동아시아정책의 일반적 목표와 관련을 가지면서, 한반도가 다시는 소련을 향한 침략기지가 되지 않도록 이 지역에 소련에 우호적인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1946년 3월 서울에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 첫 회의에서 소련 대표 쉬티코프가 발언하였듯이 소련은 해방 이후에도 이러한 자신의 목표를 기회 있을 때마다 천명하였다.
<鄭容郁>
008) | 이하 해방 이전 소련의 대한정책에 대해서는 김성보,<소련의 대한정책과 북한에서의 분단질서 형성-1945년∼1946년>(역사문제연구소 편,≪분단 50년과 통일시대의 과제≫, 역사비평사, 1995);전현수,<소련군의 북한 진주와 대북한정책>(≪한국독립운동사연구≫9,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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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9) | 1943년 미·영군이 시실리에 상륙하는 데 독일군 2개 사단의 저항을 받았지만 소련군은 전 전선에서 독일군 200개 사단의 공격에 당면하고 있었다. 따라서 미·영군이 대륙에서 제2전선을 형성하더라도 이것은 독·소 전선에 비해 문자 그대로 부차적인 전선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이었다(구대열, 앞의 책, 182쪽). |
010) | 김성보, 앞의 글, 6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