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고려 후기 문화의 새 경향
고려 후기의 문화 변동
무신의 난 이후 고려의 지식 계급들은, 사회 모순의 개혁이나 문화의 창조가 없는 보수적인 지배 체제가 얼마나 무력한 것인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성이 전반적인 문화 운동으로 전개되지는 못하고, 다만 지배 세력이 문신에서 무신으로 교체되는 데 그쳤다. 정치가 비교적 안정된 최씨 정권 시대에도 실질적인 개혁은 없었으며, 사회의 불안도 그대로 계속되었다.
이런 때에 몽고의 침략과 그 지배를 받게 되었으므로, 이제까지 쌓아 온 고려 문화는 그 기반에서부터 해체될 위기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사회적 진통과 문화적 갈등을 겪고 난 뒤인 고려 말에 와서는, 지방에서 성장한 신진 지식층과 중소 지주층이 중심이 되어, 친원파로 성장한 권문 세가에 대항하는 사회 의식과 민족 의식이 일어나면서 전면적인 사회 개혁과 문화 혁신을 주장하게 되었다.
고려 후기의 불교
왕실과 귀족의 보호를 받으면서 성장하던 불교 사원은, 무신의 난 후에는 문신들의 피난처가 되는 한편, 무신 정권과는 여러 차례 충돌을 일으켰다. 그러나 이 무렵, 불교 교단 내에서는 변동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무신의 난 이후 조계종이 교리상 발전을 보게 되자, 최씨 무신 정권은 하나의 정책으로서 조계종을 후원하였다.
명종 때 조계종의 지눌(보조국사)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선종 사상에 중점을 두면서 선종과 교종의 교리상의 상호 보충과 통합을 도모한 것이었다. 한편, 고종 때 화엄종의 대가였던 각훈이 우리 나라 불교의 역사를 살피는 입장에서 해동고승전을 저술하였는데, 오늘날은 그 일부만 전해 온다.
그리고, 몽고의 침입으로, 불교 발전의 토대요 상징이었던 대장경과 속장경의 판목이 불타 버리자, 불력(佛力)에 의하여 외적을 물리친다는 종교적 염원에서 다시 대장경의 조판을 시작하여 16년 만에 완성을 보았다(1251). 이 고려 대장경 판목은 오늘날까지 해인사에 보관되어 오는데, 그 경문 교정이 정확하여 학술적 가치가 대단히 높다.
몽고의 간섭을 받으면서부터 미신적인 면이 강한 라마 불교가 들어와서 폐해가 많았다. 또한, 공민왕 때에는 인도 승려 지공이 인도의 선종을 전하고, 보우가 중국에서 선종의 일파인 임제종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당시 사원은 많은 토지를 차지하고 고리대업과 상업에까지 손을 대었을 뿐 아니라, 군역의 의무를 피하는 무리들의 소굴로까지 변하는 등 부패가 심하였다.
문학의 새 경향
무신의 난 이후, 고려 전기보다 오히려 세련된 한문학이 나오게 된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인로는 매우 세련된 시를 지어 명성을 떨쳤으나, 아직 무신의 난 이전의 시대를 회고하는 입장에 머물렀다. 그러나, 동명왕편을 지어 고구려의 전통을 노래한 이규보는, 종래의 한문학 형식에 구애되지 않고 자기 나름대로의 자유로운 문장체를 이룩함으로써 우리 나라 전통과 연결된 새로운 문학 체질을 발전시켰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발전은 모두 고려 문화의 저력에서 나올 수 있었던 것으로, 이규보와 같은 때의 시인인 진화는, “송은 이미 쇠퇴하고 북방 오랑캐(여진족)는 아직 미개하니, 앉아서 기다려라. 문명의 아침은 동쪽(고려)의 하늘을 빛내고자 한다.”는 뜻의 문화적 자신감에 넘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임춘의 국순전, 이규보의 국선생전, 이곡의 죽부인전1) 등, 물건을 의인화한 설화 문학이 등장하였고, 한편으로는 이인로의 파한집, 최자의 보한집, 이제현의 역옹패설 등 수필 문학이 나왔다. 이들 문학을 패관 문학이라고도 한다. 몽고가 간섭하기 시작한 이후에 활약한 이제현과 이색의 문학은 조선 시대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한편, 균여대사가 향가 11수를 남겼고, 현종과 그 신하들이 현화사 낙성식에서 향가를 지은 일이 있다. 또, 예종은 도이장가2)라는 노래를 지었다. 이와 같이, 신라 시대의 향가의 전통이 없어지지는 않았으나, 시대 정신이 달라지고 우세해진 한문학의 영향으로 국문학의 형식은 많이 달라졌다.
성리학의 수용
원 제국 건설 이후, 중국의 문화는 서역 계통의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의학, 건축, 서화 등이 새 모습을 나타내게 되었다. 이 무렵, 충선왕은 연경에 만권당을 짓고 중국의 염복, 원명선, 조맹부와 고려의 이제현 등 양국의 문인들을 교류시켰다. 그 뒤, 고려 문인들은 원에 자주 왕래하여, 원대의 중국 문화와 밀접한 교류를 가졌다.
그리하여, 이 시기에 들어온 성리학은 뒷날 커다란 문화 변동을 가져온 원동력이 되었다. 성리학은 불교의 선종 사상을 유교적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이를 재구성하여 성립시킨 유교 철학이었다. 먼저 충렬왕 때 안향이 성리학을 소개하기 시작하였고, 그 뒤 백이정, 박충좌 등이 원에서 직접 수입하였다. 고려 말의 정도전, 조준 등은 성리학에 입각하여, 불교의 폐단뿐만 아니라 고려 문화 전반에 대한 비판을 하면서 그 개혁을 주장하기 시작하여 사상적인 파동이 매우 컸다. 또한, 신진 세력은 일상 생활 전반에 영향을 주고 있는 불교 의식을 추방하기 위하여 주문공가례를 수입하고, 가묘를 세워 유교 의식의 보급에 전력을 기울였다.
역사학의 새 경향
충렬왕 때 승려 일연은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전날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유교 사관에 맞추어 기록한 것인 데 비하여, 삼국유사는 불교 입장에 서서 고대 문화와 관계되는 주요한 사실들을 수록한 것으로, 한국 고대사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되는 것이다. 이승휴는 한시로 중국 역사와 우리 나라 역사를 적은 제왕운기를 남겼다.
한편, 몽고 간섭 이후 유교 사관에 입각한 사학 경향이 다시 일어나 많은 저서가 나왔다. 특히, 이제현은 공민왕 때에 고려 국사를 편찬하다가 중단하였는데, 그의 사학은 뒷날 조선 시대 사학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무신의 난과 몽고 침입의 시련을 겪은 고려의 지식 계급은 불교의 폐단, 권문 세가의 횡포 등 사회 모순에 대한 비판 정신이 일어나고, 여기에 정통과 대의 명분을 중시하는 성리학적 사관을 받아들여, 새로운 사학 경향이 성립하게 되었다.
기술학과 인쇄술
고려 사회는 대체로 기술학을 천시하여 과학 기술의 발달이 일반적으로 뒤졌으나, 천문, 지리, 측후, 시간 관측을 맡은 서운관, 의약을 맡은 태의감이 설치되었고, 또 이 방면의 중국 서적도 수입되어 상당한 발달을 보았다. 특히, 관측 천문학이 발달하고, 수시력이라는 달력에 관한 이론과 수학적 계산 방법도 발달하였다.
한편, 외국어의 연구와 통역을 맡은 통문관과 사역원이 있어서 중국어, 몽고어, 일본어, 거란어, 여진어 등을 교육하였다.
고려 문화 중 특히 손꼽히는 것은 출판 문화의 발달로서, 일찌기 방대한 대장경의 목판 인쇄를 완성하였다. 그리고, 고종 21년(1234)에는 금속 활자로써 상정고금예문을 인쇄하였는데, 이것은 서양의 금속 활자 발명보다 200여 년이나 앞선 것이었다. 그러나, 현재에는 전해지지 않고, 다만 1377년에 간행된 직지심경이 세계적 공인을 받아 민족의 귀중한 문화 유산으로 빛나고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농업 기술
고려 말에 이암이 원의 농상집요를 소개, 보급한 것으로 보아, 농업 기술 연구가 이미 이루어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우경에 의한 심경법이 일반적으로 행해지고, 2년 3작의 윤작법도 확립되었지만, 농업 기술 전반에 영향을 줄 만한 발전은 없었고, 재배 품종도 전시대와 별다름 없는 5곡과 채소류 등이었다. 다만, 공민왕 때 문익점에 의해서 목화씨가 전래되어 베, 모시, 명주뿐이었던 우리 나라 의복 생활에 일대 변동을 가져온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