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편찬 사업과 국문자의 창제
사서와 지리지
민족적 자아를 발견하고 전통 문화를 비판적으로 계승하려는 왕성한 의욕은 자연히 역사에 대한 관심을 드높였다.
건국 초기에는 왕조 개창을 정당화하고 성리학적 통치 규범을 정착시키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으므로, 성리학적 대의 명분을 존중하는 역사 편찬이 나타났다. 정도전의 고려국사와 권근의 동국사략은 바로 그러한 성격을 지닌 대표적 사서였다.
세종, 세조 때에는 정치, 외교가 안정되고 국력이 성장한 바탕 위에서, 성리학적 대의 명분보다는 민족적 자각을 일깨우고, 왕실과 국가 위신을 높이며, 문화를 세련시키는 방향에서 역사 편찬이 시도되었다. 용비어천가, 동국세년가 등은 그러한 방향에서 편찬된 역사서이다.
세종은 고려사를 자주적 입장에서 재정리하려고 노력하였는데, 성리학적 사관을 가진 유신들과의 갈등으로 오랜 진통을 거쳐 문종 때에 기전체 고려사와 편년체 고려사절요가 완성되었다.
한편, 세조는 자주적인 통사(通史)를 편찬하기 위하여 비상한 노력을 기울였으나,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하고, 성종 때에 삼국사절요와 동국통감이 출간되었다.
또한, 당대의 역사를 후세에 남기기 위한 조선 왕조 실록 편찬에도 비상한 관심을 쏟았다. 실록은 날짜별로 그 날의 중요한 사건을 낱낱이 기록하였으므로, 조선 시대 연구의 기본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조선 시대의 문화 수준을 한눈으로 볼 수 있는 문화 유산이다.
중앙 집권과 국방의 강화를 위해서는 국토의 자연 환경과 인문 지리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요청되었다. 이에, 조선 초기에는 각종 지도와 지리서가 제작, 편찬되었다.
태종 때에는 세계 지도로서 혼일강리도와 전국 지도로서 팔도지도 등을 제작하였는데, 내용이 정확하다. 특히, 혼일강리도는 현재 남아 있는 동양 최고의 세계 지도로서 높은 의의를 가지는데, 우리 나라를 사실보다 크게 과장해서 그린 것은 당시의 진취적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하겠다.
세종, 세조 때에는 과학 기구를 이용하여 더욱 정밀한 지도로서 동국지도를 만들었다. 이 지도는 압록강 이북까지도 상세히 기록한 것이 특색으로, 당시 북방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지리서로는 경상도지리지, 팔도지리지, 이를 보완한 동국여지승람이 각각 편찬되었다. 여기에는 군현의 연혁, 지세, 인물, 풍속, 성씨, 고적, 인구, 토지, 산물, 교통 등을 자세히 수록하여, 당시 국토에 대한 인문 지리적 지식 수준을 크게 높였다.
법전과 의례집
조선 독자의 통치 규범을 성문화하여 법전을 만들려는 노력은 이미 태조 때부터 시도되어 조선경국전, 경제문감 등이 편찬되었고, 뒤에 조 준은 조례를 모아 경제육전을 만들었다. 태종 때에는 이를 개정, 증보하여 속육전을 만들고, 세종 때에는 육전등록을 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서 성종 때에는 마침내 경국대전이 완성되었다. 그 뒤에도 경국대전은 여러 차례 수정, 보완되었지만, 기본적인 골격은 바뀌지 않고 왕조 말기까지 계속되었다.
한편, 조선 초기의 윤리와 의례는 기본적으로 유교적인 기준에서 설정된 것이다. 따라서, 유교적 사회 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하여 세종, 세조 때에 삼강행실도, 효행록, 오륜록 등을 편찬하고, 국가의 각종 행사의 의례를 새로이 제정하여 오례의, 국조오례의 등을 편찬하였다.
병서와 과학 서적
우리 나라의 지형과 무기 등에 알맞은 전술을 개발하고 역대의 전쟁사를 정리하기 위하여 병학에 관한 저서가 편찬되었다. 즉, 태조 때에 진도를 비롯한 여러 병서가 간행되어 독특한 전술과 부대 편성 방법이 창안되더니, 세종 때에는 병장도설, 문종 때에는 동국병감 등을 각각 편찬하여 군사 훈련의 지침을 마련하고, 전쟁사 등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다.
우리 나라 자연 풍토에 맞는 농사 기술과 품종을 개발하기 위하여 세종 때에 농사직설을 편찬하였고, 성종 때에 강희맹은 금양잡록을 저술하였다. 농사직설은 농부들의 실제 경험을 토대로 하여 농사 기술을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의약 분야에서도, 우리 나라의 풍토에 맞는 약재와 치료 방법을 개발, 정리하여 세종 때에 향약집성방이라는 약학서를 펴내고, 의방유취라는 의학 백과 사전을 편찬하여 민족 의학의 기반을 확고하게 다져 놓았다. 그리고, 이 두 의서를 더욱 발전시켜서 17세기 초 광해군 때에 허준은 동의보감을 펴냈는데, 이 책은 뒤에 중국과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동양 의학 발달에도 획기적인 기여를 하였다.
역법도 우리 나라 실정에 맞게 재구성하여 세종 때에 칠정산(七政算)이라는 새로운 달력을 펴냈다. 이것은 중국과 아라비아 달력을 참고한 것으로, 1년을365.2425일로, 1개월을 29.530593일로 계산한 것으로, 오늘날 쓰고 있는 달력 계산법과 거의 비슷하다.
훈민정음의 창제
조선 초기의 왕성한 민족적 자각과 사회 통합을 위한 의지는 전통 문화를 높은 수준으로 재정리하는 작업과 아울러, 드디어 국문자를 창제하는 위대한 문화적 결실을 낳았다. 누구나 배우기 쉽고 쓰기 쉬운 대중적인 글자를 가져야겠다는 범국민적 욕구가 뭉쳐서 훈민정음을 만들어 내게 된 것이다.
일찍부터 한자를 빌어 써 오면서, 말과 글자의 다름에서 오는 불편을 덜기 위하여 이두 문자를 발전시켜 왔으나, 이것으로써는 우리말을 자유스럽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세종은 집현전 학사들과 더불어 오랫동안 음운과 문자에 관한 연구를 거듭한 결과, 마침내 훈민정음 창제에 성공하고, 세종 28년(1446)에 이를 반포, 사용하기에 이르렀다.
훈민정음은 배우기 쉽고 조직적이며, 어떠한 발음이든지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글자 제작의 원리나 그 형태가 매우 과학적이다. 훈민정음은 세계 문자 가운데서 비교적 늦게 만들어지기는 했으나, 가장 발전된 우수한 문자라는 점에서 세계 문자사상 획기적인 의미를 가진다.
세종은 훈민정음의 완성과 동시에 그 보급에 힘써서,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등 많은 서적을 번역, 출간하였고, 또한 서리들로 하여금 훈민정음을 배워 행정 실무에 이용하게 하고, 이들의 채용 시험에도 훈민정음을 치르게 하였다.
이로써, 한문을 알지 못하는 하층민과 부녀자들도 문자 생활을 누릴 수 있는 길이 트이고, 고유한 언어에 고유한 문자까지 가지게 됨으로써 민족 문화의 기반이 더 넓고 더 확고해졌다.
과학 기술
조선 초기에는 부국 강병과 민생 안정을 위하여 과학 기술학을 장려하였고, 철학 사조도 격물치지(格物致知)를 존중하는 경험적 학풍이 지배하였다. 유명한 유학자들은 대개 기술학을 겸하여 학습하였고, 특히 군주들이 기술학 발전에 적극적이었다.
이러한 정책에 힘입어 전통적인 기술 문화를 계승하고, 여기에 서양 및 중국의 과학 기술을 적극 수용하여 세계 기술 문화사상 빛나는 업적들이 나타났다.
교육의 진흥과 편찬 사업에 대한 노력은 먼저 활자 인쇄 문화의 발달을 촉진시켰다. 고려 시대의 활자 인쇄술은 조선 시대에 들어와서도 계속 개선되어 계미자, 갑인자 등 정교한 활자를 만들어 냄으로써 각종 서적을 대량으로 찍어 내게 하였다. 그리하여, 구할 수 없는 책이 없고 출판되지 않은 책이 없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많은 서적이 간행되어, 교육 진흥을 촉진시키고 문화 수준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제지술의 발달 또한 출판 문화의 발달에 커다란 밑받침이 되었다. 종이 만드는 원료만도 20여 종이 개발되고, 그 생산량도 세종 때 자치통감을 찍어 내는 데 30만 권, 세조 때 대장경을 인쇄하는 데 46만여 권의 종이를 소비할 정도로 방대하였다.
국가의 농업 진흥에 대한 깊은 관심은, 농학의 발달과 동시에, 농업에 관련된 천문, 기상, 역법, 측량, 수학의 발달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천체, 시간, 기상, 토지의 정확한 측정을 위한 각종 기구가 발명, 제작되었다.
천체 관측 기구로서 혼의, 간의 등이 발명되고, 시간 측정 기구로서 해시계(앙부일귀), 물시계(자격루, 행루) 등이 제작되었는데, 그 성능은 매우 우수하였다. 특히, 세계 최초로 측우기를 제작하여 전국 각지의 우량을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하였다.
세조 때에는 토지 측량 기구인 규형과 인지의를 제작함으로써, 양전 사업과 지도 제작에 이용하여 큰 효과를 거두었다. 천문 역법에 대한 깊은 관심과 토지 조사, 조세 수입의 계산 등의 필요에 따라 수학이 또한 발달하였다. 당시 수학 교재로는 상명산법, 산학계몽 등이 있었는데, 아라비아 수학의 영향을 받아 그 수준이 높았다.
국방 강화 정책과 관련하여 무기 제조 기술도 크게 혁신되었다. 고려 말기부터 발전하기 시작한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은 더욱 개량되어, 사정 거리가 1300보나 되는 대포(화포)가 만들어지고, 문종 때에는 로케트 포와 비슷한 화차가 제조되기도 하였다. 또한, 병선 제조 기술이 개량되는 가운데, 태종 때에는 뛰어난 전투선인 거북선이 제작되고, 작고 날쌘 비거도선(鼻居刀船)이 대량으로 만들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무기의 발달은 여진 및 왜구의 격퇴에 큰 효력을 나타냈다.
그러나, 15세기의 이러한 눈부신 과학 기술의 발달은, 16세기 이후 기술을 천시하고 도덕을 숭상하는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침체에 빠지고 말았다.
문학의 발전
조선 초기의 문학은 관료 문인을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고려 후기 신진 사대부들 사이에서 유행했던 패관 문학이 그대로 계승되었다. 특히, 필원잡기, 동인시화, 용재총화, 청파극담, 추강냉화, 패관잡기 등을 꼽을 수 있다.
이들 작품은 대개 서민 사회에서 입으로 전해 오는 역사와 전설, 풍습, 신앙 등이 담겨 있어서 민족 문학으로서의 높은 가치를 지닌다. 이것은 그들의 문화 의식이 역사 편찬이나 각종 문헌 편찬에 반영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적 자아 발견과 서민 문화의 포용과 이해에 관심을 가졌던 것과 관련이 있다
재야인의 입장에서 설화 문학을 발전시킨 이는 김시습이다. 그의 금오신화는 민간 설화를 소설 형식으로 이끌어올린 것인데, 여기에 실린 다섯 편의 소설은 평양, 개성, 경주 등 옛 도읍지를 배경으로 하여 우리 나라의 고유한 신앙과 연결된 생활 감정과 역사 의식을 묘사한 전기 소설이다.
고려 시대에 싹을 보인 시조 문학도 이 때에 발달하기 시작하여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창작되었다. 그런데, 이 시기의 시들은 크게 두 가지 경향으로 나뉜다.
하나는 중앙의 고급 관료들의 시로서, 여기에는 주로 새 왕조의 건설을 찬양하거나 새 사회 건설의 희망과 정열을 토로하고, 외적을 물리치면서 강토를 개척하는 진취적인 기상과, 농경 생활의 즐거움이나 괴로움을 묘사한 것들이 많다. 패기와 자신이 넘치는 호방한 시로서는 김종서와 남이의 작품이 뛰어났다. 다른 하나는 재야 학자들의 시로서, 유교적 충절에서 우러난 시를 지었으니, 길재, 원천석 등의 시가 유명하다.
남이의 시
白頭山石磨刀盡 豆滿江水飮馬無
男兒二十未平國 後世誰稱大丈夫
김종서의 시
삭풍은 나무 끝에 불고 명월은 눈 속에 찬데,
만리 변성에 일장검 짚고 서서,
긴 파람 큰 한소리에 거칠 것이 없어라.
한편, 한문학에서 자기 개성을 가지려는 노력은 동문선의 편찬을 가져왔다. 이 책은 우리 나라 역대 시문 가운데에서 뛰어난 것을 뽑아 모은 것인데, 그 서문에 “우리 나라의 글은 송나라나 원나라의 글이 아니요, 한나라나 당나라의 글도 아니며, 곧 우리 나라의 글이다.”라고 밝히고 있다. 조선 초의 한문학은 이러한 정신적 바탕 위에서 발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