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조선 사회2. 민족 문화의 발달

(3) 예술의 발달

건축과 공예

조선 초기에는 건축에 있어서도 새로운 특성들이 나타났다. 고려 시대에는 사원 건축이 중심인 데 대해, 조선 초기에는 도시의 궁궐과 성곽, 성문, 그리고 학교 건축이 중심을 이루었다.

조선 초기 건축의 특색은, 건물의 규모가 법적으로 규제되어 마음대로 크고 작게 지을 수 없는 점이었다. 건물의 크기는 그 안에 거주하거나 그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 일정한 차등을 두었다. 이것은 신분 질서를 지키려는 뜻도 있었지만, 불필요한 사치를 막자는 데도 이유가 있었다.

그리하여, 조선 초기의 건축은 대체로 규모가 작고 검소하면서도 위엄을 갖추었고, 어느 건물이나 건물 자체의 균형뿐만 아니라, 주위의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현존하는 서울의 남대문(숭례문), 개성의 남대문, 해인사의 경판고, 창경궁의 홍화문, 창덕궁의 돈화문 등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건물에 부속된 정원도 인공을 되도록 가하지 않고 자연 그대로를 살린 것이 조선 시대 정원의 특색이었다. 그러한 특색을 살린 대표적 정원으로는 창덕궁 후원(비원)과 창경궁 후원(창경원)을 들 수 있다.

조선 초기의 공예는 불교나 귀족들의 사치품과 관련하지 않고, 사대부의 의식주의 필수품이나 문방구 등과 관련하여 특색 있는 발달을 보았다. 따라서, 공예품의 재료도 금, 은, 구슬과 같은 보석류를 쓰지 않고, 나무, 대, 흙, 왕골 등과 같은 값싼 재료를 많이 이용하였다.

생활 필수품으로 만들어진 식기와 문방구 등은 견고할 뿐 아니라, 그 형태나 빛깔도 서민적인 정취를 살려서 소박하면서도 기품이 있고 세련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초기의 자기는 고려자기의 기법을 이어받아 회청색의 분청 사기를 만들어 냈으나, 뒤에는 세련된 백자가 널리 유행하였다. 백자는 태토(胎土)가 훨씬 견고할 뿐 아니라, 청자보다 깨끗하고 담박하며 검소한 아름다움을 풍겨서, 사대부나 서민들의 취향에 가장 걸맞은 멋을 풍겼다.

백자 대호   
순백색의 자기 항아리로, 조선조의 독특한 정취가 담겨 있다.

조선 초기에는 전국에 자기소(磁器所)와 도기소(陶器所)가 있어서 도자기 생산이 매우 활발하였다.

또한, 목공예 분야도 자기 공예와 더불어 특수하게 발달하였다. 장롱, 궤, 문갑에서 연상(벼루 상자), 탁자, 그 밖에 사소한 기물들을 대개 나무로 만들어서 사용하였는데, 실용성과 예술성을 잘 조화시켜, 자연미를 최대로 살리면서 고상하고 기품 있는 공예품을 만들어 냈다.

이 밖에, 화장품 그릇, 실패 등에 그림을 그리고, 그 위에 쇠뿔을 얇게 쪼개 붙이는 화각 공예와, 대그릇, 칠그릇, 자개 그릇 공예가 발달하였다.

나전 칠기   
예물용 함의 일종으로, 무늬에 짙은 여운을 간직하고 있다.

그림과 글씨

그림은 도화서에 소속된 전문 화가인 화원(畫員)과 관료 문인들의 그림으로 나누어지는데, 양쪽에서 모두 뛰어난 작품들을 창작하였다.

이 시대의 그림들은 진취적이고 발랄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여, 인물과 산수를 퍽 씩씩하고 낭만적으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화원 출신의 화가로는 안견, 최경, 이상좌가 가장 유명한데, 그 중에서도 안견은 중국과 우리 나라의 역대 화풍을 깊이 연구하여 독자적인 경지를 개척하였다.

안견의 대표작 몽유도원도는 신선이 산다는 이상 세계를 낭만적으로 그려 낸 것으로, 구도가 웅장하고 필치가 씩씩하며 풍경이 신비하여 보는 이를 압도한다. 그리고, 이상좌의 송하보월도는, 세차게 부는 바람 속에서 의연하게 노니는 인간의 강인한 기백을 생동적으로 그려 낸 작품이다.

관료 문인 화가로는 이암, 강희안, 강희맹 등이 유명하고, 신숙주는 화론(畫論)을 써서 미술 이론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강희안의 대표작 고사관수도는 간결하고 호방한 필치로 자연 속에 파묻혀 깊은 사색에 빠진 인간의 내면 세계를 그려 낸 걸작품이다.

고사관수도   
강희안의 그림. 그는 시, 서, 화에 모두 능하였으며, 그 시대의 대표적인 문인 화가이다.

조선 초기의 그림들은 일본 무로마치 시대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시기의 일본은 조선 문화의 수용에 열성적이었으므로, 많은 화가가 일본으로 건너가 그 곳 화단에 큰 영향을 주었다. 수문, 문청은 그 대표자들이다. 또한, 조선의 사신들도 일본을 여행하는 중에 그림과 글씨를 많이 남기고 돌아와 간접적인 영향도 적지 않게 주었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 왜인들이 조선의 문화재를 많이 가져갔으므로, 몽유도원도를 비롯한 선초의 걸작들이 일본에 다수 보관되어 있다.

글씨는 그림과 달라서, 학자라면 누구나 터득해야 할 교양으로서, 뛰어나고 독특한 서체를 개발한 이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도 안평 대군의 글씨는 조 맹부의 글씨를 개성 있게 발전시켰고, 양사언과 한호는 각각 초서와 해서에 능하여 명필로 이름이 높았다.

한호의 글씨   
조선 초기 4대 서가 중 한 사람인 그는, 송설체를 바탕으로 한 독특한 서풍의 글씨를 썼다.

음악

음악에 있어서도 커다란 성과가 나타났다. 세종 때, 박연을 비롯한 음악가들은 수십 종의 악기를 새로 만들어 내거나 개량하고, 악곡과 악보를 새로 정리하여 궁중 음악의 기초를 확립하였다. 성종 때에는 성현 등이 국악을 비롯한 동양 음악을 이론적으로 정리하여 악학궤범을 편찬하였다.

악학궤범   
성종의 명으로 성현 등이 악기, 악보, 음률을 정리한 음악서이다.

궁중 음악과 별도로 속악도 자라났다. 그리고, 민간에서는 농악무, 무당춤, 승무 등의 민속 무용을 즐겼다.

한편, 산대놀이라는 가면극과 꼭둑각시놀음인 인형극이 민간 사회에 유행되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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