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왜란
왜란 전의 대일 관계
세종 때 일본과 계해약조를 맺은 후, 대일 관계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서서 조선의 국방은 점차 약화되어 왜구의 소란이 자주 일어났다. 이에, 이이는 10만 양병설을 주장하면서 국방 강화를 역설하였지만, 태평에 젖은 사림 관료들은 안일 속에서 고식적인 대책에 만족하였다.
이 무렵, 일본에서는 100여 년 간에 걸친 전국 시대의 혼란이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서 수습되고 있었다. 그러나, 토요토미의 세력은 일본 전역에 흩어져 있는 많은 세력가들을 완전히 장악할 만한 정치적 권력으로까지 성장하지는 못하였다.
이에 토요토미는 그의 정권을 안정시키기 위하여, 불평 세력의 관심을 밖으로 쏠리게 하고 아울러 자신의 정복욕을 만족시키고자, 우리 나라와 명에 대한 대대적인 침략을 준비하였다. 그는 먼저 정탐군을 보내어 조선의 산천과 정치 정세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수집하는 한편, 서양의 총포술을 도입하여 개량한 무기로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이에 대하여, 우리 나라는 국제 정세에 어두웠고, 국론의 통일이 이루어지지 못한데다가, 외세의 침략에 대한 유비 무환의 태세마저 갖추지 못하고 있었다.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년 임진) 4월에 약 20만 명의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였다. 불의의 대군을 맞이한 부산의 군민들은 첨사 정발의 지휘 아래 장렬하게 싸웠으나, 성은 끝내 함락당하고 말았다.
부산을 점령한 왜군은 동래성으로 밀려들었다. 이 곳 군민들도 부사 송상현의 지휘하에 치열하게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이렇게 해서 동래성을 점령한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상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신입을 내려 보내어 충주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게 하였으나, 역시 숫적으로 우세한 적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왜군은 부산과 서울을 점령하고, 다시 평안도와 함경도로 북상을 계속하였다.
왜군의 급속한 진군에 당황한 선조는 왕자와 대신들을 데리고 의주로 피난하였다. 그리하여, 왜군은 6월에 평양과 함경도 지방까지 유린하였다.
이리하여 전쟁 초기에는, 왜군의 숫적 우세와 무기 및 훈련의 우월성으로 인하여 육전에서의 전황은 조선에 극히 불리하게 전개되었다.
수군의 승리
왜군의 침략 작전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되, 육군은 세 길로 나뉘어 북상하고,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서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북상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경상도 해안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을 향하여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 때, 전라도 해안 경비의 책임을 맡은 이는, 일찌기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운 바 있는 이순신 장군이었다. 그는 1년 전에 전라 좌수사에 부임한 이래,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갖추며 식량을 저장하여 두었다.
이순신은, 왜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북상을 계속하고 있고 경상도 수군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5월 초에 80여 척의 배를 거느리고 여수를 떠나 경상도 해안을 향하여 나아갔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먼저 옥포에서 왜적선을 맞아 첫 승리를 거두고, 이어서 5월 말부터 6월 초에는 이억기 장군이 이끄는 전라 우수영 및 경상 우수영의 함선과 합세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 두 번 출정에서의 승리로 우리 해군의 사기는 충천하였고, 연안 백성들도 우리 해군의 전투를 여러 면으로 지원하면서 전의를 돋우었다. 따라서, 왜군의 수륙 병진 작전은 좌절되고 말았다.
왜적들은 해전에서의 이와 같은 패배를 만회하기 위하여,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모든 함선들을 다시 모아 총공격을 개시하고, 육지에서도 전라도 지방을 공격하게 하여, 우리 해군의 후방을 교란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이순신이 이끄는 우리의 연합 함대는 적의 이러한 계획을 미리 간파하여, 육지의 백성들과 긴밀한 연락을 가지면서 적함들을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여 적을 크게 무찔렀으니, 이 싸움을 역사상 한산도 대첩이라 하며, 왜란 중 3대 승리의 하나로 꼽는다.
한산도 싸움의 승리로 우리 함대는 남해의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곡창 지대인 전라도 지방을 안전하게 지키게 됨으로써, 적의 육군의 작전을 좌절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순신 함대의 이러한 승리는 다음과 같은 여러 가지 요인이 작용하여 성취된 것이었다.
첫째는, 이순신 장군의 투철한 애국심이 큰 요인이 되었다. 그는 항상,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교훈을 가지고 전투에 나섰다. 지도자의 이와 같은 불퇴전의 자세는 그의 너그러운 인품과 더불어 부하 장병들의 사기에 큰 영향을 주었다.
둘째는, 이순신의 전술, 전략의 공이 컸다. 그는 거짓 후퇴하는 작전으로 적들을 바다로 유인한 다음에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서 반격하는 전법을 썼다. 특히, 한산도 싸움에서는 유명한 학 날개 진〔鶴翼陣〕을 폄으로써 적을 섬멸하였다.
세째는, 사천 전투 때부터 모습을 나타낸 거북선은 종래의 그것을 개량한 장갑선으로서, 적함에 부딪쳐 부수기도 하고, 포를 쏘아 적함을 격침시키기도 하였다.
의병의 항쟁
해전에서의 잇단 승리와 때를 같이하여 육전의 양상도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각계 각층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 방위에 일어선 것이다.
이 자발적인 무장 부대들은 나라를 위한 충의를 내걸고 싸웠기 때문에 의병(義兵)이라고 부른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 관리, 사림 학자, 그리고 승려 들이었다. 이렇게 그들은 서로 이해 관계가 다르고, 신앙과 학문도 같지 않지만, 나라를 지키겠다는 애국적 정열에는 추호의 차이도 없었다. 유사시에 향토 방위를 향민 스스로가 떠맡아 온 전통은 이미 예부터 변함 없이 계승되어 왔기 때문에, 의병 부대의 조직은 매우 수월하였다.
의병들은 향토 지리에 익숙하고, 또 향토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왜군과의 전투에서 작은 희생으로써도 큰 전과를 거둘 수 있었다.
한편, 의병들은 작은 병력으로 큰 병력을 가진 적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되도록 정면 충돌을 피하고, 뛰어난 기동력과 매복, 기습 작전으로 적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이러한 뛰어난 유격 전술은, 큰 병력을 가진 강대국과의 오랜 전투 경험에서 터득된 전투 기술이었다.
곽재우, 조헌 등 크고 작은 의병 부대의 활약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의병들의 빛나는 전과들은 수군의 승리와 더불어 국민들 가슴 속에 자신과 희망을 불어넣어 주는 계기가 되었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왜군에 대한 반격 작전은 한층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즉,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 부대 등을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킴으로써 관군의 전투 능력이 크게 강화되고, 작전이 보다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 우리의 육군과 해군은 긴밀한 연락을 가지면서 모든 전선에서 반격 작전을 개시하였다.
왜군의 패퇴
육⋅해의 모든 전선에서 아군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왜군에 대한 반격을 강화해 가던 중, 이여송이 거느린 5만 명의 명나라 지원군이 도착하여 아군과 합세하였다. 일본은 전쟁 초기부터 정명 가도(征明假道)를 내세워 명을 침략할 것을 공언했기 때문에, 명은 깊은 관심을 가지고 전쟁을 주시하다가 원병을 파견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조⋅명 연합군은 왜적에게 점령당했던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쪽으로 패주하는 왜군을 추격하면서, 서울 탈환을 목표로 남하하였다.
이에, 왜군은 아군의 공격을 완화시키고, 자신들의 전열을 재정비하기 위하여 휴전을 제의하였다. 또한, 명도 평화적으로 왜군을 철수시키기 위해서 휴전 제의를 받아들여 담판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명과 일본은 제각기 승리자로 자처하여, 3년간에 걸친 회담은 결렬되고 말았다.
정유재란과 전쟁의 종결
일본은 3년간의 휴전 기간 동안 전열을 다시 가다듬어 15만여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입하였다.
그 사이 우리 나라도 군비를 새로이 갖추었다.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 방법을 바꾸었다. 즉,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의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군대를 삼수(三手), 즉 창검을 가진 살수와 활을 쏘는 사수, 그리고 총과 대포를 가진 포수로 나누어 훈련시킴으로써 군대의 기능을 전문적으로 강화하였다.
한편, 해군에 있어서도 이순신으로 하여금 3도 수군의 지휘를 맡게 하여 통솔 체계를 강화하고, 군함, 무기, 식량 등을 증강시켰다. 그러나, 이순신은 모함을 받아 곧 파면되고, 원균이 3도 수군 통제사에 임명되어 수군에 대한 총 지휘권을 장악하였다.
왜군은 먼저, 우리 해군을 공격하여 제해권을 빼앗으려 하였다. 이 때, 원균은 200여 척의 연합 함대를 이끌고 무모하게 부산 쪽으로 진격하다가 칠천도와 고성 앞바다에서 크게 패하여 전함을 거의 잃고 말았다. 그리하여, 적은 득의 양양하여 육지를 마구 침범하여, 9월에는 충청도 지방에까지 다시 북상하였다.
그러나, 왜군의 일시적 승리는 오래 가지 못하였다. 정부군이 명나라 원군과 협동하여 직산에서 적의 북진을 차단하고 남쪽으로 내몰았던 것이다. 그리고,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다시 3도 수군 통제사에 복귀되어 해군력이 증강되었다. 12척의 전선만을 물려받은 이순신은 300여 척의 큰 함대를 끌고 덤벼드는 왜군을 명량으로 유도하여, 교묘한 위장 전술로 적을 속이고, 썰물을 이용하여 일대 반격을 가함으로써 큰 승리를 거두었다.
육지와 바다에서 또다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점차 전의를 잃고 패주하기 시작하였다. 1598년 11월에 이순신 함대는, 수백 척의 전선에 나누어 타고 도망치던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였다. 이순신 장군은 이 마지막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으나, 이로써 7년간에 걸친 전란은 끝나게 되었다.
왜란의 영향
일본과의 전쟁에서 우리가 승리를 거두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우리 민족이 지닌 잠재적 역량이 우월했기 때문이었다. 즉, 정부군 차원에서의 국방 능력은 우리가 일본에 뒤졌으나, 전 국민적 차원에서의 국방 능력은 우리가 일본을 능가하였다. 국민들은 신분의 귀천이나 남녀 노소를 막론하고 한결같이 문화적인 우월감에 가득 차 있어서, 자발적인 전투 의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국민 전체가 가진 이러한 정신력은 국방 능력으로 가장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무기와 전술에 있어서도 우리가 우수한 위치에 있었다. 우리는 대포와 창검에서부터 활과 돌멩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무기를 이용하였고, 각 지방의 자연 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융통성 있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익혔으며, 함선 제조 기술도 단연 일본을 능가하였다.
왜란에서의 승리는 몽고와의 항쟁 이후 가장 커다란 국난의 극복으로서, 민족의 생존을 유지하고 민족 문화를 보존하게 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진다.
한편, 임진왜란을 계기로 동 아시아의 국제 정세는 크게 바뀌었다.
첫째, 명나라와 조선이 전쟁에 지친 틈을 이용하여 북방 여진족이 급속히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둘째, 동 아시아의 문화적 후진국이던 일본이 우리 나라에서 활자, 서적, 도자기, 그림 등의 문화재와 인재를 약탈해 갔는데, 이는 일본 문화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