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호란
광해군의 혁신 정치
광해군이 즉위하면서, 정계는 대북파가 실권을 쥐게 되었다. 광해군과 대북파는 성리학적인 사림 정치가 부국 강병에 무력하다는 것을 통감하고, 명과 지나치게 밀착되는 것은 새로운 국제 정세의 변동에 적응하는 데 불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색적인 학문 경향을 가졌던 서경덕과 조식을 높이 추앙하면서, 정통 성리학자들을 비판하여 사상적 혁신을 꾀하려 하였다.
전후의 피폐된 산업과 국가 수입을 재건, 확대하기 위하여 양전 사업과 호적 사업을 실시하고, 성지와 무기를 수리하고 군사 훈련을 강화하였다. 그리고, 전란 중에 질병이 만연하여 인명의 손상이 많았던 경험에 비추어, 허준, 정작으로 하여금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하였다.
한편, 대외 정책에 있어서도, 명이 쇠약해지고 북방 여진족이 세운 후금이 강성해지는 추세를 재빨리 간파하여 신중한 중립적 외교 정책으로 대처하였다.
여진족은 우리 나라와 명의 강성한 힘에 눌려서 국가적 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더니, 임진왜란으로 조⋅명 양국이 대일 전쟁에 눈을 돌린 틈을 타서 건주위 여진의 추장 누루하치가 나타나 싱징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키워서 후금을 세웠다.
후금은 중원을 차지할 야심을 품고 명에 대하여 선전 포고를 하였으므로, 명은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우리 나라와의 공동 출병을 제의해 왔다.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어렵지만, 신흥하는 후금과 적대 관계를 가지는 것도 현명하지 못하다는 것을 깨닫고, 강홍립으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출병하게 한 다음에 후금과 휴전을 하게 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명과 후금의 싸움에 깊이 말려들지 않고 내치에 전념하게 되었다.
인조 반정과 여진족의 침입
광해군의 혁신적이고 탄력성 있는 정치는 전후 복구 사업에 적지 않은 성과를 가져왔으나, 명분을 중요시하는 사림들에게는 큰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후금에 대한 정책은 명에 대한 배신으로 인식되었고, 성리학자에 대한 비판은 선현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더우기, 광해군은 적자(嫡子)가 아닐 뿐 아니라 인목 대비를 폐위시켰기 때문에, 유교 윤리에 저촉되는 약점을 지녔다.
광해군은 드디어 사림의 지지를 받는 서인에 의하여 몰려나고 인조가 대신 즉위하였다.
서인 정권은 사림 정치를 부활시켜 명망 있는 사림을 다시 등용하고, 무엇보다도 외교 정책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즉, 친명 배금(親明排金) 정책을 노골화하여, 멸망해 가는 명에 친선을 표하고, 후금과의 관계를 끊어 버렸다. 더우기, 후금을 자극하는 두 가지 사건이 일어났다. 즉, 명나라 장군 모문룡이 후금이 차지한 요동 지방을 빼앗기 위하여 평안도 철산의 가도에 주둔함으로써 후금을 긴장시키더니, 인조 반정 후에 논공 행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과 내통한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후금은 3만여 명의 군대를 동원하여 압록강을 넘어 쳐들어왔다. 왜란이 끝난 지 30년 만에 또다시 커다란 위기가 닥쳐 온 것이었다. 후금의 군대는 평안도 의주, 정주, 선천, 곽산 등지를 거쳐 황해도 평산에까지 이르렀다. 그 사이 정봉수와 이입 등은 의병을 조직하여 용골 산성과 의주 지방에서 각각 적을 맞아 싸웠고, 그 밖의 지역에서도 많은 의병 항쟁이 일어났다.
본래 후금은 우리 나라보다는 중원을 장악하는 데 일차적인 목표를 두었기 때문에, 양국 간에 쉽게 화약이 맺어졌고 후금의 군대는 철수하였다. 이로써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고 매년 금, 은, 모시, 무명 등을 무역할 것과, 명과 후금의 싸움에 중립을 지킬 것을 약속하였다. 후금에 대하여 무모하게 강경 정책을 취하던 정부는 후금의 무력 앞에 힘없이 굴복하고 말았으니, 이것이 정묘호란이다(1627).
후금은 그 후 세력이 더욱 커져서, 태종 때에 이르러서는 국호를 청(淸)이라 고치고, 황제를 칭하면서 우리 나라에 대하여 군신 관계를 맺도록 요구하여 왔다. 이 무례한 요구에 조야의 국민들은 하나같이 분노를 품게 되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대책을 둘러싸고 조정의 논의는 둘로 갈라졌다. 하나는, 즉시 무력으로 청을 응징하자는 척화파들의 논의로서, 중화 국가인 명과 이적 국가인 청을 동등하게 종주국으로 대우하여 사대 관계를 맺을 수 없다는 대의 명분 때문이었다. 따라서, 주전파에는 명분을 존중하는 성리학자들이 가담하였다.
다른 하나는, 명분보다도 국제 정세의 현실과 국가의 실질적인 이득을 중요시하는 주화파의 논의로서, 성리학에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던 양명학자들이 이에 동조하였다. 그들은 외교 담판으로써 청의 침략을 저지한 다음에, 내정 개혁을 통해서 국력을 키우자는 현실적인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대세는 주전론으로 기울고, 준비도 없는 가운데 선전(宣戰)의 교서가 내려졌다. 이에, 청 태종은 스스로 10만 대군을 이끌고 질풍같이 쳐내려와 서울을 점령해 버렸다. 조선의 군주와 신하들은 남한 산성에 피신하여 45일간 농성하다가, 사태가 기울어진 것을 깨닫고 청과 강화를 맺었다.
이로써 조선은 청과 군신 관계를 맺고, 명과의 관계를 끊었으며, 두 왕자와 주전파의 주동 인물들을 인질로 데려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소현 세자와 봉림 대군의 두 왕자가 인질로 가고, 척화파의 강경론자인 홍익한, 윤집, 오달제의 3학사가 잡혀 가 죽음을 당하였으니, 이것이 병자호란이다(1636).
북벌론의 대두
청은 조선과 화약을 맺은 후, 이어서 명마저 정복하여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엄청난 국제 정세의 변동과 조선이 당한 굴욕 속에서 조야의 민심은 울분에 가득 차 드디어 북벌론(北伐論)이 일어났다. 그러나, 북벌론에는 발상이 다른 두 개의 흐름이 합류되고 있었다.
하나는 존주대의론(尊周大義論)으로서, 문화가 높은 중국과 우리 나라가,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를 씻고, 나아가서는 우리 나라의 오랜 우방 국가로서 사대 관계를 맺어 왔고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 준 명에 대하여 은의를 보답하자는 주장이었다. 대다수의 성리학자들은 이런 생각을 가지고, 이미 멸망한 명과 가상적인 사대 관계를 유지하여 명의 연호를 계속 사용하고, 만동묘(萬東朝)를 세워서 명나라 황제의 신위를 제사하였으며, 명의 은의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대보단(大報壇)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송시열, 송준길, 이완, 임경업 등은 북벌 운동을 주도한 대표적 인물들로서, 여러 가지 계획을 세웠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했다.
다른 하나는 실리적 북벌론으로서, 명이 망하고 청이 흥기한 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고, 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동을 이용하여, 잃어버린 만주의 옛 땅을 다시 찾아 약소 국가를 면해 보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발상은 재야의 지식층과 서민들 사이에서는 팽배하였으나, 성리학자들에게는 용납되지 않았다.
북벌론은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봉림 대군) 때에 가장 왕성하였으며, 그 뒤로는 시간이 흐를수록 쇠퇴하였다. 그 후에는 청의 문물이 발달함에 따라 도리어 그 문화를 받아들이자는 북학 운동까지 나타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