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근대 사회1. 민족적 각성과 근대 문화의 수용

(1) 대원군의 개혁 정치와 쇄국 정책

대원군의 내정 개혁

안으로는 세도 정치로 사회적 모순이 격화되었고, 밖으로는 열강의 도전이 위기 의식을 자아낼 즈음에, 철종이 돌아가고 몰락 왕족인 이하응의 아들이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고종이다.

그러나, 왕의 나이가 어렸으므로 그의 생부 흥선 대원군이 정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흥선 대원군은 서민과 다름없이 몰락하여 노론 양반의 위세에 눌려 지내던 불우한 처지였으며, 사상적으로는 중농적 실학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흥선 대원군   

그는 집권하자, 안으로는 유교적 위민 정치(爲民政治)의 부흥과 부국 강병을 실현하고자 왕권 강화 정책을 추진하였고, 밖으로는 열강의 도전과 침략을 단호히 배격하는 쇄국 정책을 강행하였다. 그리하여, 모든 사회 병폐의 근원인 세도 정치를 뿌리뽑기 위하여 안동 김씨 일파를 몰아 내고, 당파와 지방색을 가리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였다.

또한, 당쟁의 온상이며 양반 지주의 아성으로서 국가 재정을 좀먹던 서원을 대폭 정리하여, 전국에 47개소만 남기고 600여 개소를 철폐하였다.

서원 철폐는 완강한 지방 유생의 반발을 일으켰으나, “백성을 해치는 자는 공자가 다시 살아난다 하여도 내가 용서하지 않는다.”는 완강한 태도로써 결행하였다.

그는 또한, 권위가 추락된 왕권을 회복하고 국가의 위신을 높이기 위하여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그리고, 여기에 필요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하여 원납전을 강제로 징수하고, 당백전을 발행하였으며, 많은 백성을 토목 공사에 징발하였다. 이 때문에 대원군은 백성의 원성을 샀으며, 이로 인하여 물가가 오르기도 하였다.

대원군은 관제를 개혁하고자 비변사를 철폐하고, 의정부의 기능을 정상화하는 동시에, 3군부를 설치하여 군국 기무를 장악하게 하였고, 정치 질서를 정비하기 위하여 대전회통, 육전조례 등을 편찬하였다.

또한, 백성의 부담을 덜고 국가 수입을 늘리기 위하여 토지 조사 사업을 벌여, 대장에 누락된 농지를 적발하고, 양반에게도 군포를 징수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환곡을 정비하고 사창(社倉) 제도를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토호와 탐관 오리의 중간 착취를 금하였다.

쇄국 정책과 양요

세도 정치로 인하여 조선 왕조의 정치가 문란하고 민중이 절망 속에 빠져 있던 19세기 전반기에, 서양 여러 나라들은 산업 혁명을 거쳐서 근대 자본주의 국가로 성장하였다. 그들 나라들은, 상품 시장과 원료 공급지를 구하려고 아시아에 눈을 돌리고 있었다.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열강은 종교와 상품, 대포와 군함을 앞세우고 다투어 아시아 각국에 침입하기 시작하였다.

먼저 영국이 중국을 굴복시켜 강제로 문호를 열게 하였고, 이어서 영⋅프 연합군이 뻬이징을 점령하여 중국으로 하여금 굴욕적인 조약을 맺게 하였다. 한편, 미국도 일본을 위협하여 그 문호를 여는 데 성공하였다.

조선도 중국이나 일본보다 시기는 늦었으나 예외가 되지는 않았다. 서양 함선이 이미 18세기부터 조선 연해에 출몰하였는데, 이를 이양선(異樣船)이라 불렀다. 그들은 초기에는 탐험과 측량을 목적으로 하였으나, 19세기 이후로는 조선에 직접 통상을 요구해 왔다. 최초로 통상을 요구해 온 나라는 영국으로서, 상선 암허스트(Amherst) 호를 보냈고, 선교사를 통하여 통상을 희망하였으나, 거절당하였다. 그 후, 프랑스의 세실이 함대를 이끌고 와, 앞서 기해사옥 때 프랑스인 신부 학살에 대한 책임을 따지며 통상을 요구하였으나, 역시 거절당하고 말았다.

그 후, 서양 선박의 출몰이 부쩍 늘고, 뻬이징이 영⋅프 연합군에게 점령된 사실이 전해지면서, 나라 안에서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의식은 하층 민중 사회에 있어서는 민족주의적인 동학을 낳게 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보수적인 상층 양반 사회에 있어서는 위정 척사 사상을 굳히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 때에는 조선에도 이미 선교사가 들어와 천주교도가 나날이 늘고 양화가 범람하고 있었다.

대원군의 단호한 쇄국 정책은 이러한 시대 분위기에서 성립된 것이었다. 그는 먼저, 국내에서 양화 교역을 엄금하는 동시에, 천주교에 큰 탄압을 가하였다(1866). 병인사옥이라고 불리는 이 탄압으로 9명의 프랑스 신부와 수많은 교인이 죽음을 당하였으며, 그 뒤에도 탄압은 계속되어 6년간에 걸쳐서 8천 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이에, 프랑스는 프랑스인 선교사의 사형을 구실로 조선의 문호를 개방시키고자, 로즈(Rose) 제독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하여 강화도를 점령하고 일부는 서울을 향하여 진격하여 왔다. 그러나, 대원군의 결연한 항전 결심과 한성근, 양헌수 부대의 분전으로 프랑스 군은 문수 산성과 정족 산성에서 패하여 한 달 만에 후퇴하고 말았는데, 이것을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한다.

한편, 러시아도 통상을 요구하여 선박을 동해안에 보내 왔고, 또 영국 상선과 독일 상인 옵페르트가 충청도 연안에 와서 각기 통상을 요구하였다. 옵페르트는 그 뒤 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의 무덤을 도굴하여 부장품을 훔쳐 가려는 만행을 저질렀다.

또한, 미국 상선 제너럴 셔어먼 호가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통상을 요구하고 재물을 약탈하다가, 평양의 군민과 충돌을 일으켜서 선원과 더불어 배가 침몰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미국은 셔어먼 호 사건의 책임을 묻는 동시에 통상을 강요하기 위하여, 5척의 군함을 보내어 강화도를 공격하는 신미양요(辛未洋擾)를 일으켰다(1871).

그러나, 광성진과 갑곶 등지에서 어재연 부대와 강화 수비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쳐 물러났다. 두 차례의 양요를 물리친 대원군은 서양 열강에 대한 경계심이 더욱 굳어져서,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워 국민의 경각심과 궐기를 촉구하는 한편,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을 한층 강화하였다.

척화비   
1871년, 대원군이 ‘양이’를 배척하기 위해 전국 요충지에 세웠다.

이러한 쇄국 정책은 서양 문화를 오랑캐의 문화로 간주하는 동시에, 조선의 유교 문화의 전통을 존중하는 문화적 자부심을 강화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완강한 독단 정치와 내정 개혁은 많은 반발을 일으켜 민비와 유림 세력이 마침내 대원군을 몰아 내니, 외교 정책의 변화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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