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근대 사회1. 민족적 각성과 근대 문화의 수용

(7) 애국 계몽 운동과 의병의 항전

민족의 저항

문호 개방에 뒤이어 일본의 경제적, 정치적, 군사적인 침략이 단계적으로 진행되고 있을 때, 이에 대한 한민족의 각종 형태의 항일 운동도 줄기차게 전개되고 있었다. 러⋅일 전쟁을 도발한 일본이 한국 영토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전국의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였을 때, 국민은 보안회(保安會)를 조직하여 반대 운동을 벌여 결국 그 요구를 좌절시키기까지 하였다.

이와 같이, 국민 전체가 대일 항쟁을 벌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식민지화 계획안대로 을사조약을 강압적으로 체결하고,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강행하자, 민족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을사조약 체결의 진상이 폭로되자, 일본 침략의 규탄과 조약 파기 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지식인들은 이 조약의 체결을 곧 망국으로 알고 민족적 항쟁을 전개하였다. 이상설, 안병찬, 조병세, 민영환, 최익현, 이근명 등의 조야 인사들은 연이어 상소를 올려, 조약의 파기와 5적의 처단을 주장하였다.

그 중에는 이상설과 같이, 고종에게 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사직과 더불어 순사하여 민족 정신을 살려 앞날의 독립을 기하도록 하자고 요구하는 강경론자도 있었다. 그리고, 민영환, 조병세와 같이, 국민의 애국심을 진작시키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는 인사도 적지 않았다. 또, 장지연과 같은 이는 격렬한 항일 언론을 펴 일제를 규탄하고 국민의 민족적 항쟁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오기호, 나철 등은 5적 암살단을 조직하여 매국노의 숙청을 기도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앞잡이가 된 일진회 사무실을 습격하고, 5적의 집을 불살랐다. 이와 같은 활동은 전국적인 항일 투쟁을 일으켰고,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통감부가 설치된 뒤에는 경제적인 측면의 항쟁도 벌여 전국에서 국채 보상 운동이 일어났다. 이것은, 일본이 통감부를 설치한 후 그들의 식민지 시설을 갖추기 위하여 한국의 모든 금융을 독점, 이용했을 뿐 아니라, 일본에서 한국 정부의 차관이라는 명목으로 1300만 원의 돈을 들여다 썼던 것이다. 그리하여, 국민은 이것을 국민의 힘으로 갚고 경제적인 독립부터 이룩하기 위한 운동을 일으켜, 전국적으로 금연, 금주 운동을 전개하여 거액의 돈을 모았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현되지 못하였다.

한편, 고종은 러⋅일 전쟁 중에 몰래 헐버어트를 미국에 보내어, 일본의 한국 침략이 부당함을 알리고, 미국의 외교적 독립 지원을 호소하였다. 이것은 나라가 어려울 때 반드시 서로 돕기로 한 조⋅미 수교 조약의 규정에 근거를 둔 것이었으나, 외면당하고 말았다. 또, 러시아와 프랑스에도 호소하여 보았으나, 실효를 얻지 못하였다.

이런 중에, 고종은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회 만국 평화 회의에 보내어, 을사조약의 불법성과 일제의 무력적 침략 행위의 부당성을 호소하고 국제적인 압력으로 이를 파기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호소는 도리어 일본에게 역이용되어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의 구실이 되고 말았다.

고종의 신임장   
1907년, 3밀사는 이 고종의 신임장을 가지고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평화 회의에 참석하여 일제의 침략상을 세계에 폭로하였다.

을사조약 전후로부터 군대 해산에 이르기까지의 이와 같은 민족의 분노와 저항은, 마침내 개화 사상에 바탕을 둔 민족의 근대적 역량을 배양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애국 계몽 운동과, 민족 자주성을 사수하려는 의병의 구국 항전으로 발전하였다.

애국 계몽 단체와 언론 활동

문호 개방 이후 근대 과학 문명의 도입과 함께 구미의 근대 사상과 학문도 선각적 지식 계급에 섭취되어 정치, 언론, 종교, 문학 등 각 분야에서 계몽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러한 초기 계몽 운동의 목표는 밖으로 외세의 침략을 물리쳐 민족의 자주 독립을 확립하고, 안으로 종래의 봉건적인 사상을 타파하여 자유, 평등의 민주적 근대 사회를 이룩하려는 데 있었다. 또한 이 무렵, 태극기가 우리 나라 국기로 제정되어 애국심을 크게 북돋웠다.

계몽성을 띤 정치 단체로는 독립 협회가 대표적이었으나, 그 밖에도 독립 협회의 영향으로 사회 단체, 여성 단체가 설립되어 활동하였다. 그 후, 이와 같은 정치 계몽 단체는 정부의 탄압과 외세의 간섭으로 해산되기도 하였으나, 을사조약 이후 항일 구국을 목적으로 하여 수많은 단체가 다시 결성되어 애국 계몽 운동을 주도하였다.

러⋅일 개전 직후 황무지 개척권 요구를 계기로 생겼던 보안회는 협동회(協同會)로 고쳐서 강력한 구국 항쟁을 펴고자 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그러나, 애국 계몽 운동자들은 곧 공진회(共進會), 헌정 연구회(憲政硏究會) 등의 정치 사회 단체를 조직하였고, 대한 자강회(大韓自强會), 대한 협회(大韓協會) 등으로 발전시켜 가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각 방면에서 전국적 규모의 구국 항쟁을 폈다.

통감부는 이러한 단체를 탄압하고자 보안법, 신문지법, 출판법 등의 숱한 악법을 만들어 탄압하는 한편, 그들의 주구 단체로 일진회(一進會)를 만들어 애국 계몽 운동을 교란시키려고 하였다. 그러나, 애국 계몽 단체들은 이에 굴하지 않고 활동하였으며, 나아가 비밀 단체로 신민회(新民會)를 조직하여 보다 과감히 구국 항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애국 계몽 운동에 큰 자취를 남긴 이 신민회는, 소위 105인 사건으로 인하여 간부들이 많이 검거되어, 그 직접적인 활동이 중지되고 말았다.

우리 나라 최초의 신문은 박문국에서 간행한 한성 순보(漢城旬報)인데, 이것은 관보에 시사를 곁들인 순간지에 불과하였다. 그 후, 독립 협회가 독립 신문을 간행하면서부터 본격적인 언론 활동이 전개되었다. 순 한글과 영문으로 간행된 이 신문은 독립 협회의 기관지로서, 국민의 대변자 구실을 했을 뿐 아니라, 서구의 근대 사상과 학문을 전파하는 데 공헌하였다. 다음으로, 남궁억 등에 의하여 황성 신문(皇城新聞)이 간행되었고, 이종면 등에 의하여 제국 신문(帝國新聞)이 간행되었다. 황성 신문은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는데, 장지연, 박은식, 주시경, 신채호 등 애국 계몽 사상가들의 논설이 특히 유명하였다. 제국 신문은 부녀자층을 대상으로 국민 계몽, 자강 사상을 고취하였다.

황성 신문   
1898년에 남궁억이 창간한 국한문 일간 신문이다. 애국적 논필로 인하여 1910년에 폐간되었다.

을사조약 이후는 일제 통감부의 탄압으로 언론의 자유가 위축되었으나, 이런 속에서도 신민회의 애국 계몽 운동가들은 영국인 베델과 더불어 국⋅영문으로 대한 매일 신보(大韓每日申報)를 간행하여 항일 운동의 선봉에 섰고, 또한 손병희, 오세창 등은 만세보(萬歲報)를, 대한 협회는 대한 민보(大韓民報)를 간행하여, 일진회에서 만든 국민 신보(國民新報) 등과 대결하였다. 이 밖에도, 미국인 헐버어트에 의하여 월간지 코리어 리뷰우(Korea Review)가 발간되어 한국을 외국에 소개하고 일본의 침략을 규탄하였다.

민족주의 교육의 발달

근대 교육은 개화 운동의 일환으로 1880년대부터 시작되었다. 덕원 주민들은 개화파 인물들의 권유에 의하여 원산 학사(元山學舍)를 세워 근대 학술과 무술을 가르쳤다(1883). 같은 해에 외아문 내에 동문학(同文學)이라는 영어 교습 기관도 세웠다.

그 후, 정부는 미국인 교사를 초빙하여 육영 공원(育英公院)을 세우고, 상류층의 자제들을 뽑아 영어를 비롯한 수학, 지리학, 정치, 경제 등 각종 근대 학문을 가르쳐 근대 교육을 본격화하였다.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교육 입국 조서가 만들어지고 교육 제도가 정비되어 소학교, 중학교, 사범 학교, 외국어 학교, 의학교, 전무 학당, 농상공 학교 등 각종 교육 기관이 설립되었다.

교육 입국 조서(일부)

교육은 그 길이 있는 것이니, 헛된 이름과 실용을 먼저 분별하여야 할지로다. 독서나 습자로 고인의 찌꺼기나 줍기에 몰두하여 시세 대국에 어두운 자는 비록 그 문장이 고금을 능가할지라도 쓸모없는 서생에 지나지 못하니라. 이제 짐은 정부에 명하여 널리 학교를 세우고 인재를 양성하여 너희들 신민의 학식으로써 국가 중흥의 큰 공을 세우고자 하노니, 너희들 신민은 충군하고 위국하는 마음으로 너희의 덕과 몸과 지를 기를지어다. 왕실의 안전이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고, 또 국가의 부강도 너희들 신민의 교육에 있도다.

한편, 미국인 선교사 아펜젤러는 정부의 지원하에 배재 학당을, 언더우드는 경신 학교를 세웠고, 이어서 여자 선교사 스크랜턴에 의하여 이화 학당이 세워져 여성 교육도 시작되었으며, 그 후 평양에 숭실 학교가 세워졌다. 이와 같이 세워진, 전국의 많은 크리스트 교 계통의 사립 학교는 서양의 근대 학문을 가르치는 한편, 일본의 침략에 대응하는 민족 의식을 깨우쳐 주는 구실도 하였다.

한편, 을사조약 이후 애국 계몽 운동을 추진한 민족 운동자들은, 민족주의에 입각한 근대 교육이 민족 운동의 기반이며 또한 본질이라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많은 학교가 전국 곳곳에 세워졌는데, 이상설에 의하여 북간도에 세워진 서전 서숙(瑞甸書塾)을 비롯하여, 김약연에 의하여 북간도에 명동 학교(明東學校), 이시영에 의하여 서간도에 신흥 학교(新興學校), 이승훈에 의하여 정주에 오산 학교, 안창호에 의하여 평양에 대성 학교, 이용익과 엄주익에 의하여 서울에 보성 학교, 양정 학교 등이 설립되었으니, 그와 같은 성격의 민족주의 교육 기관이 전국에 3000을 헤아리게 되었다.

이 무렵, 학술 연구를 동한 애국 계몽 운동도 활발히 전개되어, 각종 학회와 교육 단체가 발전되었다. 그러한 것으로는 서북 학회, 기호 흥학회, 용남 학회, 호남 학회, 관동 학회와 같은 지방별 학회가 있었고, 흥사단, 대동 학회, 여자 교육회 등도 있었다.

국학의 연구와 문학의 새 경향

근대 의식이 자라면서 교육열이 높아지고 민족 의식이 싹틈에 따라, 국어에 대한 관심이 새로와지고 근대적인 역사 의식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더우기, 일제 침략이 노골화되면서부터 이러한 경향이 보다 두드러지고, 그것은 민족 의식을 고조시키는 핵심이 되었다.

갑오경장 뒤에 정부에서는 편집국과 인쇄국을 두어 국한문 혼용의 교과서를 만들어 냈고, 그 뒤 국문 연구소를 세워서 주시경, 최광옥 등으로 국어를 정리하도록 하였다. 그 당시, 서구의 신문물을 소개하는 유길준의 서유견문은 새로운 국한문체를 발전시키는 데 공헌하였고, 이봉운의 국문 정리를 비롯하여 지석영의 신정 국문, 주시경의 국어 문법, 유길준의 대한 문전이 나오면서 국문 정리와 국어의 새로운 이해 체계가 성립하기 시작하였다.

대한 문전   
1909년에 유길준이 저술한 최초의 근대적 문법책이다.

민족 의식과 전통 문화에의 자부심은 국사 연구와 고전 간행에 업적을 쌓아 근대 계몽 사학을 성립시켰다. 특히,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등은 한국사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신채호는 독사신론을 써, 근대 역사학의 탈을 쓰고 왜곡되어 가고 있던 한국사를 옳게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최남선은 박은식 등과 광문회(光文會)를 만들어 민족의 고전을 정리, 간행하기 시작하였다. 또, 이 당시에 일제 침략에 대하여 민족 독립 정신을 일깨우는 것으로, 을지문덕전, 이순신전 등의 구국 위인의 전기와, 월남 망국사, 미국 독립사, 이탈리아 건국 삼걸전 같은 외국 흥망사, 금수 회의록, 오수불망 같은 항일 저작물이 간행되었다.

문학면에서는 구소설에서 신문학으로 옮아가는 새로운 풍조가 일어나 순 한글로 쓴 신소설이 등장하였다. 신소설의 주제들은 아직 구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하였으나, 봉건적인 윤리 도덕의 배격, 미신 타파, 자주 독립 의식 등을 주장하여 계몽 문학의 구실을 하였다.

신소설의 개척은 금수 회의록을 쓴 안국선을 비롯하여 이인직이 혈의 누, 귀의 성을, 이해조가 자유종, 모란병을, 최찬식이 안의 성, 추월색 등의 작품을 써서 터전을 닦았다.

또한, 최남선은 신체시를 발표하여 근대시의 형식을 처음 개척하였고, 이와 전후하여 천희당 시화가 대한 매일 신보에 게재되어 민족시의 터전을 마련하기 시작하였다.

한편, 이 무렵에 애국가, 독립가, 한양가 등 창가도 나왔고, 서양 음악이 도입되어 군악대가 조직되고 국가도 제정되었다. 그 중에도,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닮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는 국민 사이에 국가처럼 애창되어 독립 의식을 높이는 데 이바지하였는데, 오늘날에는 우리 나라의 국가가 되었다.

신문학의 발달과 더불어 외국 문학의 번역물도 나타났다. 성경, 천로역정과 같은 크리스트 교 계통과, 이이솝 이야기, 로빈슨 표류기, 걸리버 여행기 등의 아동 문학도 유행되었다.

또, 신극 운동도 일어나 우리 나라 최초의 극장인 원각사가 세워졌고, 은세계, 설중매, 치악산 등 이인직의 작품이 상연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새로운 경향들은 일부 외국 문화에 대한 분별 없는 수입 소개를 곁들여 식민지 문화의 터전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도 있었다. 그러한 것 중에서 심한 것은 일본이 정책적으로 추진한 일본 문예의 소개와 보급이었다.

새로운 종교 활동

종교면에 있어서도 새로운 국면이 열려, 오랫동안 박해를 받아 오던 천주교도 자유로운 선교를 하게 되었고, 또 신교도 전래되어 발전을 보았다. 그들은 전도 사업의 방편으로서 학교를 세우고 의료 기관을 만들어, 교육 사업과 사회 봉사에도 기여하였다.

한편, 외래 종교뿐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싹튼 동학도 동학 혁명 운동 때 큰 탄압을 받았으나, 손병희 등의 노력에 의하여 재건되어 농민 사이에 교세를 확장해 갔다.

그러나, 러⋅일 전쟁을 전후해서 이용구 등이 일제와 손을 잡고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친일적 성격을 띠자, 이와 결별하고 천도교(天道敎)로 개명하여, 동학의 정통을 계승하고 민족 의식을 강조하는 종교로 발전하였다.

또, 나철, 오기호 등은 우리 민족의 단군 신앙을 발전시켜 대종교(大宗敎)를 창립하였다(1909). 대종교는 보수적인 성격이 없지 않았으나, 민족적 입장을 강조하는 종교 활동을 벌여 항일 민족 운동과 깊은 관련을 지으면서 성장하였다.

의병의 항전

개항 이후 무력을 앞세운 일본 침략에 대한 민족 저항으로 가장 중요한 줄기를 이룬 것은 의병의 항전이었다. 이러한 의병 항전의 발단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한 을미의병으로부터였으나, 본격적 항일 항전은 러⋅일 전쟁과 을사 5조약의 체결을 전후하여 전개된 것이었다.

러⋅일 전쟁 이후 지방의 구관리와 유생들이 다시 의병을 일으키자, 농민들까지 여기에 호응하여 일본과 피의 항쟁을 벌였다. 그 중에서도, 강원도의 원주를 근거로 원용팔 등이 편성한 의병 부대가 가장 먼저 항전에 돌입하였고, 충남의 홍주성을 점유하여 격전을 벌였던 민종식 부대, 경북에서 기세를 떨친 평민 의병장 신돌석 부대, 강원⋅충청 일대를 휩쓴 유인석 부대, 추풍령 일대를 근거지로 한 노응규 부대 등의 항전이 규모가 크고 치열하였다. 이 밖에도, 전북 태인에서 일어나 순창에서 패한 최익현, 임병찬 등의 의병은 국내외의 많은 이목을 끌었다.

이러한 의병은 고종의 강제 퇴위와 군대 해산을 계기로 전국을 항일 전투장으로 확대시켜 의병 전쟁으로 발전시켰다. 그들은 우월한 최신 무기와 근대 훈련을 받은 일본군과 대적하여 처절한 항쟁을 계속하였다.

서울 시위대는, 군대 해산 당일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 항거를 도화선으로 2개 대대가 무기를 들고 일본군과 치열한 시가전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해산된 군대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계기가 되어, 원주와 강화도의 진위대와 각 지방의 해산된 병사들이 의병 부대와 합류하여 일본군과 항전을 벌였다.

그리하여, 각처에서 항전하던 의병 부대에 이들 군대가 합류됨으로써 유생과 군인, 농민, 어민, 포수, 광부, 상인 등 국민 각 계층이 포함되었고, 종래 가졌던 구식 총인 화승총보다 우월한 신식 장총도 일부 보유하게 되었다. 또한, 편제를 보다 전투적인 체제로 정비하였고, 역전의 경험과 훈련된 군인들에 의하여 작전도 향상되었다.

항일전을 전개한 의병   
무기와 복장이 통일되지 않았으나, 유생, 군인, 농민, 상인 등 각계 각층이 참여하여 구국 항전을 폈다.

이와 같은 의병 부대는 경기도, 충청도, 강원도, 황해도의 중부 지방뿐만 아니라, 남쪽으로 경상⋅전라도, 북쪽으로 함경⋅평안도에 확대되어 전국 곳곳에서 의병의 활동이 전개되고, 두만강 건너 북간도와 연해주 지역에까지 미쳤다.

일본군의 의병 진압 작전은 무기를 든 의병 부대에 대한 정벌에만 그치지 않고, 한반도 각처에서 마을을 불사르고 양민을 학살하며, 곡식을 모두 탈취하는 초토화 작전으로 나왔다. 이러한 실례로 제천에서 약 80호의 마을이 일본군에 의하여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였으며, 여주, 지평, 양근, 원주 등에서만도 민간인 3천 명 이상이 학살되었다.

각지에서 활동하던 의병 부대 중에는, 한때 전국적인 연합 전선을 기도하여 전국의 중요 의병 부대가 양주에 집결, 13도 창의군을 편성하고 서울 진공 작전을 시도하였다. 즉, 이인영을 총대장, 허위를 군사장으로 하고 1만 명 이상의 각 도 무장 의병을 24개 진으로 나누어 서울 진공 작전을 벌였다. 그러나, 우월한 화력을 갖춘 일본군에게 저지된데다가, 사상적인 제약으로 전 국민적 항쟁을 불러일으키지 못하여 실패하고 말았다.

그 후, 일본군과의 대규모 작전이 불리함을 안 의병들은 산간벽지를 근거로 하는 게릴라 전의 양상을 띠면서 항쟁하였고, 합방을 계기로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후부터는 의병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대일 항쟁의 무대를 옮겨 갔다.

한편, 의병의 항전이 전국에서 계속되는 동안, 안중근은 만주 하얼삔 역두에서, 한국 침략의 원흉이요 대륙 침략을 기도하던 이토오를 총살하였고, 장인환과 전명운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한국의 외교 고문으로 있으면서 일본의 침략 정책을 추진, 선전하던 스티븐스를 총살하였으며, 이재명은 매국노 이완용을 칼로 찔러 중상을 입혔다.

이 같은 의병과 의사들의 구국 항쟁은, 위기에 당면한 조국을 수호하고자 하는 민족의 자주성과, 우리의 역사적인 전통 속에 담겨져 있는 민족의 저력이 발휘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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