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일제의 민족성 말살 정책과 민족 문화의 수호
민족성 말살 정책
제1차 세계 대전 전후에 자본주의 국가로 크게 성장한 일본은, 1920년대 중반기를 넘기면서 세계 공황에 휩쓸리어 발전의 길이 막히자, 그 자본 투자 시장의 확보가 절실한 문제로 제기되었다. 그리하여, 일본은 한국의 값싼 노동력과 풍부한 자원을 착취하고자, 종래에 억제하던 공업 부문의 투자를 시작하였다. 따라서, 조선 수력 전기 회사가 설립되어 부전강의 수력이 개발되었고, 흥남에 질소 비료 공장이 건설되었다.
이러한 그들의 자본 투자는 1930년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촉진되었다. 일본의 대재벌들은 다투어서 한국에 공장을 세웠고, 이에 따라서 전 산업에서 공업이 차지하는 비중도 급속도로 커 갔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공업화를 위한 것이 아니고 대륙 침략을 위한 준비 작업이었다.
마침내,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점령하고, 그 다음 해에는 그들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위성국인 만주국을 세웠다. 이어, 중⋅일 전쟁을 도발하여 전 동 아시아에 걸친 침략 전쟁을 개시하였다. 이로부터 일본은, 우리 나라를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만드는 데 전력하였다. 금속⋅기계⋅화학 공업 등을 주축으로 하는 군수 공업과 광업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한국인의 노동력과 자원의 착취를 보다 강화하였다. 이에 앞장 선 것이 일본 군벌과 결탁한 미쓰이(三井), 미쓰비시(三菱) 등의 재벌이었다.
한편, 일본은 이에 그치지 않고 미국과 영국에 도전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켜 제2차 세계 대전의 주요 도발자로 등장하였다. 이 무모한 전쟁을 위하여 일본은 국가 총동원령을 시행하고, 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에 인적, 물적 수탈과 탄압을 가중시켰다.
또한, 이에 상응하여 한민족의 문화를 완전히 말살시켜 한국인을 일본족에 편입시키고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다하였다. 이른바 내선 일체(內鮮一體)니, 황국 신민화(皇國臣民化)니 하는 구호 아래 감행된 이 정책은 우리 민족을 질식 상태에 놓이게 하였다. 학교에서 우리말 사용과 우리 역사의 교육을 금하였으며, 아침마다 이른바 황국 신민의 서사를 제창하도록 강요하였다. 또, 궁성 요배, 정오 묵도 등의 미신적인 행사까지 강요하였는데, 이를 거부하는 자는 투옥, 살상까지 서슴지 않았으며, 그러한 정책에 방해되는 종교계의 학교를 폐쇄하였다. 그리고, 성명마저도 일본식으로 고치도록 강요하였다.
더우기, 물적 수탈은 단말마적 현상을 보였다. 전쟁 물자의 보급을 위하여 모든 금속제 용품을 수거하고, 농구와 식기, 제기까지 수탈하였다. 특히, 쌀을 비롯한 모든 곡식은 생산되는 대로 공출이란 명목으로 다 거두어 가고, 생명을 유지하는 데도 미치지 못할 양의 식량만 배급하여 우리 민족은 기아선상에 머무르게 되었다.
한편, 중⋅일 전쟁 후에 이른바 지원병 제도를 만들더니, 태평양 전쟁 후부터는 징병, 징용 제도를 만들어 장정을 모아, 전쟁터와 동남아 일대에서 멀리 사할린까지 뻗친 그들의 군수 공장과 광산 등지에 쓸어넣었다. 그리고, 학도 지원병 제도를 시행하여 민족 의식을 가진 대학생을 전쟁터에 몰아넣었고, 어린 학생을 군수 노동력으로 동원하였다.
민족 문화의 수호
일본의 식민지 정책은 한국 문화의 각 방면에 나쁜 영향을 끼쳐 자유로운 발달을 저해하였다. 한국의 문인과 학자들은 이와 같은 식민지 정책에서 오는 독소의 극복을 민족 운동의 한 과제로 인식하여, 국어와 역사를 비롯한 한국 문화의 수호, 계승과 근대 문학의 개척에 노력하였다.
일본은 한국 침략과 병행하여 한국 문화 연구에도 착수하였다. 그들은 많은 학자들을 동원하여 각종 문화재를 발굴, 조사하고, 법률과 사회 제도까지 연구하였다. 또, 조선사 편수회를 만들어 사료를 수집하고 한국의 역사를 편찬하기까지 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활동은 그들의 식민지 통치를 위한 자료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한국 문화의 밝은 면과 자주적인 면은 되도록 왜곡하였고, 반면에 어두운 면이나 파쟁적인 면을 부각시킴으로써 한민족의 열등 의식과 식민지 근성을 배양시키는 데 부심하여 이른바 일제 식민 사관을 만들어 냈다.
이러한 일본인들의 학문 연구에 대하여, 한국의 민족 문화를 끝까지 수호하고 연구, 개발하려는 운동이, 어떤 탄압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3⋅1 운동 이후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박승빈 등의 국어학자들은 한말의 국어 연구를 계승하여 조선어 연구회 및 그를 이은 조선어 학회 등을 조직하여 활동하였고, 한글날, 맞춤법 통일안을 제정하고, 우리말 큰사전을 편찬하여 이 방면에 큰 기여를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민족성 말살 운동 추진으로 조선어 학회 회원들은 투옥되고 고문을 당하여 목숨을 잃은 이까지 있었다.
국사 연구에 있어서는 신채호, 박은식, 정인보, 문일평, 최남선 등이 민족주의 사관을 정립하려고 노력하였다. 신채호와 박은식은 해외에서 독립 운동을 하면서 국사 연구에 열중하여 조선 상고사, 조선사 연구초, 한국 통사, 한국 독립 운동지 혈사 등을 저술하여 식민지 사관에 대항하였다. 그리고, 정인보, 문일평, 최남선, 안재홍 등도 국내외에서 국사 연구와 한국 고전 개발에 공헌하여 민족 문화 수호에 자취를 남겼다.
또한, 일본인 학자들의 한국 연구에 자극을 받아, 이병도, 조윤제, 손진태 등을 중심으로 진단 학회가 조직되어 진단 학보를 발행하면서 국학 연구에 열을 올렸다. 그러나, 조선어 학회 탄압에 뒤이어 이 진단 학회의 활동도 중지당하였다.
한편, 일본인이 거두어 가는 문화재를 수호하기 위하여 미술품을 수집한 전형필 등의 공은 큰 것이었다.
한국의 근대 문학에 있어서는, 처음 서구 문학이 일본을 통하여 들어왔기 때문에 일본의 영향을 받은 면이 컸고, 더구나 식민지 체제 아래 싹텄기 때문에 자유로운 발전이 극히 어려웠다. 그러나, 한용운, 신채호, 김소월, 염상섭 등은 전통적인 문화 체질을 민족 문화의 바탕 위에서 근대 문화로 발전시키는 데 노력하여, 임의 침묵, 꿈의 하늘, 진달래꽃, 삼대 등의 명작을 남겼다. 또한, 김동인, 박종화, 현진건, 채만식, 심훈, 이상, 이상화, 김유정, 이육사, 윤동주 등도 민족의 애환을 담은 작품을 남겼다.
최초의 근대 소설을 쓴 이광수와 첫 신체시를 발표한 최남선은 근대 문학의 선구자로서 민족 의식을 높이며 새로운 윤리관이나 신교육을 강조하는 계몽적인 업적을 남겼으나, 결국에는 일제 식민지 정책에 꺾이고 말았다.
문학 활동의 경향은 3⋅1 운동 전후에 부쩍 활기를 띠어, 창조, 폐허, 백조 등의 동인지와 개벽, 조선 문단 등의 잡지가 간행되었다. 당시의 문학 활동은 우리말을 다듬고 식민지적 현실을 극복하기에 노력하였으며, 그 결과 우리 현대 문학의 새로운 기반이 만들어졌다. 이와 같은 노력 중에, 1920년대 중반에는 좌익적 성격을 띤 신경향파 문학(新傾向派文學)이 대두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르러서는 시, 소설, 희곡, 평론 등 각 분야에 걸쳐 다양하고 보다 세련된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한편, 미술과 음악 분야에 있어서도, 우리의 정서를 살리면서 근대적으로 발전시키려는 노력이 경주되었다. 음악에서는 봉선화를 작곡한 홍난파와,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가 배출되었고, 미술에서는 종래의 동양화를 전승, 발전시키려는 경향을 가지는 한편, 서양화도 새로 성장하여 뒷날 해방 후에 활동한 이중섭과 같은 뛰어난 화가가 나올 수 있었다.
또, 연극 분야에서도 신극 활동이 활발하였는데, 그 중에도 토월회의 활동은 민중 계몽을 겸하여 큰 자취를 남겼다.
이 밖에도 방정환 등의 아동 문학 활동도 높이 평가된다.
그러나, 1940년대에 들어서는 민족성 말살 정책 때문에 이러한 활동마저 중단되어, 문화의 암흑기로 접어들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