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고대 사회의 발전1. 고대 사회의 형성

(2) 한국의 고대 사회

고대 사회의 성장

우리 나라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국가 발전과 더불어 고대 사회가 성장하였다.

고대 사회가 성장하면서 지방의 족장 세력은 중앙의 보다 강력한 힘에 의해 통합되어 갔다. 족장 세력은 종래 그가 다스리던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으나, 국왕의 지위가 강화됨에 따라 점차 왕권에 복속되어 갔다. 왕권이 확대됨에 따라 율령을 반포하는 등 체제의 정비 작업이 추진되었다. 이와 동시에, 대외적으로는 끊임없이 정복 활동을 펴 영토를 확장시켜 갔다.

한편, 고대 사회에서는 불교가 수용되어 중앙 집권화의 진전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하였다. 이처럼, 고대 사회는 안으로는 강력한 왕권과 정비된 율령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 국가를 이룩하였고, 밖으로는 활발한 정복 활동을 통해 영역 국가로서의 모습을 띠고 있었다.

우리 나라 고대 사회가 성장, 발전하여 가는 과정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었다. 고구려는 일찍이 2세기경에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으며, 중국의 남조와 북조를 서로 견제시키면서 독자적 외교 노선을 견지하였다.

또, 백제는 고구려보다 늦게 출발하였지만, 주로 남중국과 교류하면서 잘 짜여진 통치 체제를 수립할 수 있었다. 한편, 신라는 가장 늦게 국가 체제를 정비하였고 중국과의 교류도 늦었지만, 토착 귀족 세력이 뿌리 깊게 커 나갈 수 있었다.

초기의 고구려

고구려 사회는 부여에서 내려온 유이민과 압록강 유역의 토착민 집단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이들 부족은 중국 문화와 북방의 유목 문화에 접한 경험이 비슷하기 때문에, 고구려는 결속력을 강화하면서 정복 국가 체제로 전환할 수 있었다.

고구려 성장 과정에서 태조왕 때는 매우 중요한 시기였다. 우선, 주변 지역에 대한 정복과 통합이 보다 활발하게 전개되어 현저한 대외 발전이 이루어졌다. 함경도 지방의 옥저를 정복하고, 만주 지방으로 세력을 확대시켰으며, 낙랑에 대해서도 자주 압력을 가하였다. 이와 같은 대외적 발전에 힘입어, 왕권이 성장하면서 고씨에 의한 왕위의 독점적 세습이 이루어지게 되었다1). 집권적 관료 조직이 갖추어지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의 일이었다. 그리하여 왕권이 보다 강화된 중앙 집권 국가 체제로의 진전이 이루어졌다.

고구려 고분군(중국 길림성 집안시)   

초기의 백제

백제 사회는 북방에서 내려온 유이민과 한강 유역의 토착민 집단이 결합하여 이루어졌다. 유이민 집단은 우수한 철기 문화를 경험하면서 이동해 들어온 반면, 토착민 집단은 북방 문화를 접한 경험이 부족하였다. 이에 백제 사회에서는 유이민이 지배층으로 권력을 행사하였다.

백제는 한강 유역에 위치한 마한의 한 소국으로부터 출발하였다. 고구려 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하하여 하남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백제를 세웠다(B.C. 18). 그 도읍은 오늘의 서울 지역이었다.

몽촌 토성(서울 송파)   

한강 유역의 백제는, 이후 연맹 왕국으로 성장하면서 마한을 대신하는 새로운 정치 세력의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한 군현 세력이 한강 유역으로 뻗어 오자, 백제는 한강 유역의 소국과 연맹하여 이를 막아 내었다. 그리하여 3세기 중엽 고이왕 때에 이르러, 백제는 확대된 영토와 통치 조직을 갖춤으로써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기틀을 잡아갔다.

이 때의 백제는, 한성을 중심으로, 대외적으로는 중국의 한 군현과 항쟁하였고, 대내적으로는 새로운 관제를 마련하고, 관리의 복색을 제정하는 등 지배 체제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개혁 작업은 왕권이 강화되고 중앙 집권 체제가 진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초기의 신라

신라가 성장한 지역은 북쪽과 서쪽이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어 유이민 집단의 이주가 활발하지 못하였다. 이에 따라 토착 세력이 강했기 때문에 유이민들은 토착 세력에게 흡수, 동화되었다. 또, 한반도 동남부에 치우쳐 있어서 신라 사회는 삼국 중에서 발전이 가장 늦었다.

경주 지방의 사로국으로부터 발전한 신라는 박혁거세에 의해 건국되었다(B.C. 57).2) 초기에는 박, 석, 김의 세 부족이 연맹하여 왕에 해당하는 이사금을 선출하였는데, 곧 이어 6부족 연맹체로 발전하였다.

계림(경북 경주)   

주변의 여러 나라를 정복하여 경북 지방 일대의 큰 나라로 성장한 신라는 4세기 후반 내물왕 때에 이르러서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였다. 이 때 신라는 영토를 낙동강 유역까지 확장하였고, 내부적으로 체제의 정비를 단행하였다. 그리하여 박, 석, 김의 3성이 번갈아 왕위에 오르는 대신, 김씨에 의한 왕위 계승권이 확립되었다. 대수장(大首長)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가지는 마립간이 왕호로 사용된 것도 이와 같은 왕권의 신장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라 금관(경주 금령총)   

내물왕 이후 김씨의 왕위 세습은 고구려의 군사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라 해안에 출몰하는 왜구를 격퇴하기 위해 고구려 군대가 신라 영토 내에 진주했던 때도 있었다. 경주의 호우총에서 발굴된 그릇에 광개토 대왕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은 이를 반영하는 것이다.

호우명 그릇(경주 호우총)   

이후, 신라는 제도의 개혁을 추진하고 고구려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발전하였다. 수리 사업과 우경에 의하여 농업 생산력을 증가시켰는가 하면, 우역과 시장을 개설함으로써 물자 교류가 활발하게 되었다. 이와 아울러 고구려에 의존하던 대외 관계에서 벗어나면서 백제와 동맹을 맺기도 하였다.

가야 연맹

삼국이 국가 조직을 정비하여 발전해 가던 시기에, 낙동강 하류 유역의 변한 지역에서는 별도의 독립적 세력이 성장하고 있었다. 가야 사회에서는 유이민 세력이 주로 해변으로 들어왔으나, 신라 사회처럼 토착 세력이 강하였다.

2, 3세기경, 김해의 금관 가야를 주축으로 하여 경남 해안 지대에 소국 연맹체가 형성되었다. 연맹체의 맹주인 금관 가야는 김수로에 의해 건국되었다(42). 금관 가야는 이웃 소국을 병합하면서 영토를 확장하고, 통치 조직을 정비하여 갔다.

가야 연맹의 위치   

그러나 한반도 내에서 고구려와 백제 사이의 세력 다툼이 치열해지자, 고구려 군대가 낙동강 유역까지 진출하게 되었다. 그러한 와중에서 가야 연맹 왕국 내에 포함되어 있던 소국들이 이탈하여 갔다. 이로 인하여 금관 가야는 큰 타격을 받고 그 세력이 약화되었다.

5세기 이후 가야는 전쟁의 피해를 받지 않은 고령 지방의 대가야로 그 중심이 이동되면서, 연맹의 세력권이 재편되었다. 이는 가야 지역의 유적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즉, 이후 경남 해안 지대에서는 고분 유적의 수나 규모가 위축된 반면에, 경상도 내륙 산간 지역에서는 점차 많은 고분이 축조되었고, 그 규모도 매우 커졌기 때문이다.

고령 지산동 고분군(경남)   

한편, 신라의 팽창에 자극을 받아 빠른 성장을 이룬 대가야 연맹 왕국은 합천, 함양, 하동 등의 지역을 포괄하는 세력권을 형성하였고, 중국 남조에 사신을 보내기도 하였으며, 신라나 백제와 동맹하여 고구려에 대항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끝내 삼국과 같은 중앙 집권 국가로서의 정치적 발전을 이룩하지는 못하였다. 이는 지역적으로 백제와 신라의 중간에 위치하여 양국의 각축장이 되었으며, 이들 나라의 압력을 받으면서 불안한 정치 상황이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6세기 전반에 대가야 연맹 왕국은 백제, 신라 등의 침략을 받아 그 남부 지역부터 축소되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중 가야의 남부 소국들이 대가야를 불신하여 다시 금관 가야를 중심으로 연맹 왕국을 형성하게 되자, 신라는 백제와 왜의 세력이 이 지역에 영향을 끼칠까 염려하여 서둘러 군대를 일으켜 병합하였다(532).

한편, 대가야 연맹 왕국은 신라와 결혼 동맹을 맺어 세력을 겨우 유지하였지만, 얼마 후 자체 내에서 분열이 일어나 그 세력이 약화되어 마침내 신라에 병합되었다(562).

가야 소국들은 일찍이 벼농사를 짓는 등 농경 문화를 바탕으로 하면서, 철의 생산과 중계 무역을 통하여 발전을 이룩하였다. 특히, 고령, 합천 등의 지역에 있던 대가야 연맹 왕국은 농업의 입지 조건을 잘 갖추고 있었는데, 그런 바탕 위에 경남 해안 지방으로부터 토기의 제작 기술이 보급되고, 수공업이 일어나 크게 번성하였다.

정치적 발전이 미숙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가야 연맹 왕국은 주변의 여러 나라 외에 한 군현이나 동해안의 예, 그리고 남으로는 왜와도 교역함으로써, 해상의 중계 무역을 장악하여 경제적으로 크게 번영하였다.

가야 문화를 보여 주는 유적으로는 고령 지산동 고분, 부산 복천동 고분 등이 유명하며, 이들 고분에서 금동관, 철제 무기와 갑옷, 토기 등이 발굴되어 가야 문화의 높은 수준을 보여 주고 있다. 특히, 가야 토기는 일본 지역에 전해져 스에키 토기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였다.

수레 토기   
가야의 철제 갑옷(경남 고령)   
가야의 금동관(경남 고령)   
1) 이것은 고구려의 왕실이 연노부에서 계루부로 바뀐 사실과 연관되는 것으로 이해된다.
2)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는 신라, 고구려, 백제의 순서로 건국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군장 국가로서의 건국한 순서를 기록한 것이고, 실제로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중앙 집권 체제가 정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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