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고대 사회의 발전3. 고대의 사회와 경제

(1) 고대의 사회 체제

고구려 사회

고구려는 왕족인 고씨와 5부 출신의 귀족들이 지배 계층으로서 연합하여 정치를 주도하였다. 귀족 계층인 족장이나 성주들은 모두 자기들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으나, 이것을 국가에서 동원할 때에는 대모달, 말객 등의 군관으로 하여금 지휘하게 하였다.

일반 백성은 대체로 농민들로서 자영 농민이 많았으나, 토지를 잃고 몰락한 농민들도 있었다. 그리하여 가난한 농민을 구제하기 위한 시책으로서 춘궁기에 곡식을 빌려 주었다가 추수한 뒤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한편, 통치 질서와 사회 기강을 확립하기 위해 율령을 제정하였는데, 반역자는 화형이나 참형에 처하고, 살인자나 전쟁에 패한 자도 사형에 처하였으며,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12배로 물게 하고, 소와 말을 죽인 자는 노비로 삼았다.

백제 사회

백제의 지배층은 왕족인 부여씨와 8성의 귀족으로 이루어졌다. 백제의 경우도 일반 백성은 대부분이 농민이었으며, 그 밖에 천민이나 노비도 다수 존재하였다.

또, 귀족들은 엄한 율령을 제정하여 사회 체제를 유지하였는데, 살인자, 반역자, 전쟁에서 패한 자는 모두 사형에 처하였고, 간음한 자는 노비로 삼았으며,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유형에 처하는 한편, 훔친 물건의 2배를 물게 하였다.

신라 사회

신라는 중앙 집권 국가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김씨 왕족이 왕위를 세습하였다. 김씨 왕족은 왕권을 강화하변서 폐쇄적 신분 제도인 골품 제도를 마련하여 통치 기반을 구축하였다.

골품 제도는 각 족장 세력을 통합, 편제한 것이었는데, 그 세력의 크기에 따라 4, 5, 6두품의 신분을 주었으며, 진골, 성골은 왕족이었다. 무열왕 이후로는 성골 출신의 왕이 없어지고, 진골에서 왕이 나오게 되었다.

이와 같은 골품은, 개인 신분뿐만 아니라 그 친족의 등급도 표시하는 것이 되어, 골품에 따라 거주하는 가옥은 물론 복색이나 수레까지 제한되어 있었다. 따라서, 신라인들의 사회 활동과 정치 활동의 범위는 골품에 따라 결정되었다. 특히, 신라의 관등 조직은 골품 제도와 관련을 맺으면서 편성되었다.

골품과 관등표   

신라 사회는 씨족 사회의 전통을 계승, 발전시켰다. 화백과 화랑도가 그 구체적인 예이다.

화백이란, 한 집단 안에서 회의할 때에 한 사람의 반대자도 없이 모든 사람이 찬성을 해야 결정하는 만장 일치의 제도였다. 이 제도는 각 집단의 부정을 막고, 그 집단의 단결을 강화하는 구실을 하였을 뿐 아니라, 귀족 세력과 왕권 사이에 권력을 조절하는 기능도 가졌다.

한편, 화랑도의 기원은 옛 씨족 사회의 청소년 집단에서 비롯되었다. 이 조직은 사회의 중견 인물을 양성하는 교육적인 기능을 가졌지만, 또 계급 간의 대립과 갈등을 조절, 완화하는 기능도 가지고 있었다. 이들에게는 일상 생활의 규범을 비롯하여 옛 전통에 관한 지식을 가르쳤으며, 각종 제전 및 의식에 관한 훈련을 쌓게 하고, 수렵이나 전쟁에 대한 것도 익히게 하였다. 이러한 교육을 통해서 화랑도는 협동과 단결의 정신을 기르고, 강인한 체력을 연마하였다.

화랑도는 신라가 한창 팽창하던 진흥왕 때에 국가적 조직으로 확대되어 그 훈련이 더욱 강화되었으며, 그러한 훈련을 받은 청소년들은 스스로 나라의 일꾼으로 자처하였다. 이러한 청소년들에게 원광은 세속 5계(世俗五戒)를 가르쳐 높은 의기를 권장하였다.

통일 신라 사회

신라는 삼국을 통일함으로써 새로운 사회의 발전을 가져왔다. 그리하여 우리 민족은 하나의 통일된 정부를 세워서 뭉치게 되었고, 단일한 민족 문화와 사회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이, 통일 이후에 단일한 사회와 문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삼국 사회가 혈연적 동질성과 문화적 공통성을 많이 지녔기 때문이다. 통일 신라는 확장된 영토와 늘어난 인구를 다스리게 됨으로써 국가의 경제력도 그만큼 증가하게 되었다.

신라 중대에는 왕권이 전제화되었으며, 왕위는 원래 성골이 차지하였으나, 진덕 여왕을 끝으로 진골에게로 넘어갔다. 진골 귀족은 지배층의 핵심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같은 진골 안에서도 김씨가 정치 권력을 거의 독점하였다.

한편, 6두품 귀족의 세력도 상대적으로 부각되었다. 그들은 진골 귀족에 대항하여 왕권과 결탁하기도 하였다. 그리하여 6두품 귀족은 신분적인 제약에도 불구하고 학문적 또는 종교적 식견에 의하여 국왕의 정치적 조언자가 되었고, 실제로 집사부 시랑 등의 관직을 맡으면서 정치적 진출을 활발히 하였다.

그러나 신라 하대에 이르러 6두품 귀족은 중앙 권력에서 점차 배제되어 호족과 연결되었다. 그들은 합리적인 유교 이념을 내세우면서 국가 체제 내에서 개혁을 시도하였지만, 그것이 거부되자 점차 반신라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었다.

한편, 호족은 교종의 권위에 도전한 선종의 등장에 주된 역할을 하였는가 하면, 풍수 지리설의 수용에도 적극적이었다. 또, 호족은 광대한 토지와 백성을 지배하였는데, 지방의 징세권과 군사권을 장악함으로써 지방 분권적인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호족은 새로운 관료제를 만들어 백성들을 통치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아울러 지방에 학교를 설치하여 학문을 지방에 확산시켰으며, 신라 말의 혼란한 사회를 극복하고 고려 왕조의 건설에 주동적인 역할을 하였다.

발해 사회

발해는 고구려의 유민들이 건설한 국가였으므로, 그 지배층은 왕족인 대씨를 비롯하여 귀족인 고씨 등의 고구려계 사람들로 구성되었으며, 피지배층은 대체로 말갈인이었다. 물론, 말갈인들 중의 일부는 지배층에 편입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촌락에 거주하는 농민들이었다. 한편, 이들 중의 일부는 노비로 전락하여 귀족에게 예속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발해는 상층 사회를 중심으로 당의 제도를 받아들여 지배 체제를 이루어 놓았지만, 한편으로는 전통적인 말갈 사회의 내부 조직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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