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고대 사회의 발전3. 고대의 사회와 경제

(2) 고대의 경제 생활

삼국의 경제 생활

고대 사회에서 경제 생활의 중심은 농업이었기 때문에 토지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삼국 시대에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 집권적인 귀족 정치가 성립됨에 따라, 모든 국토는 왕토라는 사상이 나오게 되었다. 그렇다고 백성 개인에게 속한 토지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이를테면, 평민인 자영 농민들은 자기의 토지를 가지고 있었다.

한편, 전쟁에 공이 있는 장군이나 귀족들에게는 녹읍의 명목으로 많은 토지를 주었고, 그 결과 귀족들이 사적으로 지배하는 토지와 노비가 증가하였다. 그러나 경제 생활이 귀족 중심으로 편제되면서 농민들은 국가나 귀족으로부터 수취의 대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의 농민들은 집집마다 조로 곡식을 바치고, 개인은 인두세로 베나 곡식을 바쳤으며, 또한 백제의 농민들도 조로 쌀을 바치고, 세로 쌀, 명주, 베 등을 바쳤다. 그 밖에도 일정 기간 동안 군역의 의무를 지거나 제방을 쌓는 등의 부역에 동원되었다.

또, 삼국 사회에서는 고리대업도 성하였는데, 고리로 꾸어 쓰고 만약 이를 갚지 못하면 노비가 되었다.

철제 화덕(평북 운산 용호동 1호 고분)   

남북국의 경제 생활

경제 생활은 통일을 전후하여 보다 더 귀족 중심으로 이루어져 갔다. 통일 후 신라의 귀족들은 녹읍을 소유하고, 그 곳에 사는 백성들에게서 조세와 공물을 징수하며, 노동력을 마음대로 징발하였다. 그리고 섬이나 산간에 목장을 가지고 가축을 사육하는 한편, 고리대업을 하였다.

국가는 이러한 귀족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관리에게 관료전이라는 토지를 주는 한편, 귀속들의 녹읍을 폐지하였다. 그리고 일반 백성에게도 정전을 주어 경작하게 하고, 국가에 조를 바치게 하였다.

그러나 귀족들의 반발로 녹읍제가 부활되었고, 사원의 면세 토지가 날로 증가하여 국가 경제가 위태롭게 되었다. 그리고 왕족과 귀족들은 경주에 호화 주택과 별장을 짓고 향락 생활을 즐겼는데, 포석정, 안압지 등은 귀족들의 사치했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그리하여 점차 전날의 굳건한 기상은 사라지고 사회가 동요되어 갔다.

안압지(경북 경주)   

한편, 농업이나 목축업뿐만 아니라 수공업도 성하여, 견직물, 마직물의 방직 기술과 금⋅은 세공, 나전 칠기 등의 공예품 제조 기술이 발달하였다. 또, 상업도 발달하여 경주에는 통일 이전에 설치된 동시 외에 서시, 남시가 설치되어 크게 번성하였다.

지방의 농민들은 대략 10호 가량의 혈연 집단이 거주하는 자연 촌락인 촌에 편입되어 있었다. 촌은 말단 행정 구역이었으며, 농민들은 몇 개의 촌을 관할하는 촌주를 통하여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통일 후에는 노동력과 생산 자원이 보다 철저하게 편제되어 관리되었다. 통일 신라의 한 민정 문서를 보면, 남녀별, 연령별의 정확한 인구와 소, 말, 뽕나무, 호두나무, 잣나무 등의 수를 3년마다 한 번씩 통계를 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통일 신라의 민정 문서   

평민 이외에 향⋅부곡민 및 노비의 노동력도 철저하게 동원되었다. 특히, 귀족의 근거지인 경주에는 많은 노비가 있었다.

한편, 북쪽의 발해 사회는 9세기에 이르러 농업, 어업, 수공업 등 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생산 활동에서 기본이 된 것은 역시 농업이었는데, 기후가 찬 관계로 논농사보다는 밭농사를 주로 하여 콩, 조 같은 곡물이 더 많이 재배되었다. 그러나 철제 농기구가 널리 사용되고 수리 시설이 확충되면서 점차로 재배하는 곡물의 수가 많아졌고 벼농사도 이루어졌다.

발해에서는 수공업도 발전하였다. 그 중에서도 제철업이 발달하여 금속 가공업이 성행하였고, 방직업이나 목재, 피혁의 가공업도 발전하였다.

그 밖에, 목축이나 수렵 등도 발해인의 경제 생활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특히, 솔빈부에서는 명마가 많이 생산되었으며, 돼지나 소도 사육되었다. 아울러 모피, 녹용, 사향 등이 생산되었으며, 옷감으로는 짐승의 털가죽이나 베, 비단이 사용되었다.

또, 어업이 발달하였는데, 고기잡이 도구가 개량되어 그물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먼 바다에 나가서 고래를 잡기도 하였다.

대외 무역의 발달

삼국 시대에는 농업, 목축업, 어업, 수공업이 발달하여 전시대보다 생활이 향상되었다. 상업도 발달하여 수도에는 시장이 서 촌락 공동체 중심의 자급 자족 경제에서 벗어나 지방 특산물이 매매되었고, 이것이 외국에까지 수출되었다.

삼국의 국제 무역은 4세기 이후 크게 발달하였다. 고구려는 주로 남⋅북 중국 및 유목민인 북방 민족들과 무역을 하였고, 백제는 남중국 및 일본과 무역을 활발히 하면서 경제가 크게 발달하였다. 신라는 한강 하류 지역을 확보하면서부터 중국과 자유로이 무역을 할 수 있었다.

당시, 삼국의 수출품으로는 마직물, 금⋅은 세공품과 주옥, 인삼, 모피류 등이 있었고, 수입품으로는 주로 귀족 생활과 관련이 있는 비단과 장식품, 책, 약재 등이 있었다. 한편, 일본과의 무역도 크게 성하여, 삼국의 앞선 문물이 일본에 전해졌다.

통일 후, 무역 활동은 보다 활발히 전개되었다. 특히, 당과의 관계가 긴밀해지면서 무역이 번성하였다. 당시 대당 수출품은 베, 해표피, 인삼, 금⋅은 세공품 등이었고, 수입품은 비단과 책 및 귀족들이 필요로 하는 사치품들이었다.

당으로 가는 해로는 지금의 전남 영암에서 상하이 방면으로 가는 길과 경기도 남양만에서 산둥 반도로 가는 길이 있었다. 한편, 경주에서 가까운 국제 무역항인 울산에는 이슬람 상인까지 내왕하게 되었으며, 이 때 당의 산물뿐만 아니라 서역의 상품들도 수입되었다.

그리고 신라인이 자주 당에 드나들면서 산둥 반도와 양쯔 강 하류 일대에 신라인들의 거주지인 신라방이 생기게 되었고, 신라소, 신라관, 신라원이 세워졌다. 반면, 신라의 삼국 통일로 말미암아 일본은 신라를 경계하게 되었고, 신라도 일본에 있는 고구려, 백제계 사람들의 동향을 우려하여 경계를 엄히 하게 됨에 따라, 일본과의 경제적 교류는 그전처럼 자유롭지 못하게 되었다. 그러나 8세기에 이르러 정치가 안정되면서 두 나라의 교류는 다시 활발해졌다.

특히, 장보고는 지금의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들을 소탕한 후, 남해와 황해의 해상 교통을 지배하여 당, 일본과의 무역을 독점하였을 뿐 아니라, 커다란 정치 세력으로까지 성장하였다. 그 밖의 지역에서도 해상 세력이 커 가고 있었다.

발해에서는 상업이 크게 흥하였던 것은 아니었으나, 시장이 곳곳에 개설되었다.

한편, 발해도 당과의 평화 관계가 성립되면서 무역이 활발하였다. 특히, 외교 사절의 왕래와 무역이 빈번해지면서 당의 덩저우에는 발해관이 설치되었으며, 거기에 발해의 교관선이 자주 왕래하였다. 또, 왕실이나 귀족 위주의 공무역이 행해졌으나, 민간 무역도 이루어졌다.

발해의 수출품은 주로 모피, 인삼, 말, 금, 은 등의 토산물이었지만, 그 밖에 불상, 유리잔 등의 공예품도 있었다. 발해는 당으로부터 주로 비단, 책 등을 수입하였는데, 이것들은 대개 귀족의 수요에 충당되었다.

또, 발해는 일본과도 무역 관계를 맺어 동해의 해로를 개척하였는데, 당시 발해와 일본의 무역 규모는 매우 컸으며, 한 번에 수백 명이 넘는 발해인이 일본으로 가서 교역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통일 신라와 발해의 무역 활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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