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Ⅰ. 근대 사회의 태동1. 근대 사회로의 지향

(2) 한국 근대 사회의 태동

농민의 각성

근대 사회를 이끈 주체는 시민 계급이었다. 전 근대 사회에서 그들은 피지배층으로 존재하였다. 한국 사회에서도 조선 후기에 이르러 피지배층이 사회 변화를 선도하였다. 당시 피지배층의 대다수는 농민들이었다. 그들은 지금까지 정치적으로는 지배 권력에 예속되었고, 신분적으로는 양반 지배층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조선 왕조의 지배 체제는 17세기에 이르러 모순을 드러내었다. 지배 체제가 동요되면서 관료 기강이 문란해졌고, 자연 재해가 빈발하면서 농촌 사회가 황폐화되어 가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위정자들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통치 질서를 개편하고 수취 체제를 개혁해 보았지만, 그러한 방안은 근본적인 대책이 아니어서 큰 성과를 거두기가 어려웠다.

정부에 대하여 크게 기대할 수 없게 된 피지배층은 스스로 살아갈 길을 찾지 않으면 안 되었다. 지배층의 억압과 횡포로 인하여 대다수의 농민들은 농촌에서 이탈해 갔다. 그들은 임노동자, 유랑민 등이 되기도 하였다. 일부 농민들은 마침내 19세기 중엽에 이르러서는 이른바 민란으로 불리는 농민 봉기를 일으키기도 하였다. 그들은 기존의 사회 질서와 가치관을 거부하기에 이른 것이다.

근대 사회로의 움직임

농민들에 의한 새로운 질서의 모색은 궁극적으로 근대 사회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조선 후기 사회에서 근대 지향적 움직임은 여러 면에서 나타났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농업에서 영농 기술의 개발과 경영의 합리화를 통하여 농업 생산력이 크게 증가하여 사회 변동의 토대가 마련되었고, 상공업에서 영리성이 제고되어 이른바 도고라고 불리는 독점적 도매 상인도 나타나고 있었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부의 축적에 따른 신분의 상승, 그리고 정쟁의 결과와 농민의 분화로 인한 신분의 변동이 심해졌고, 봉건적 신분 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서얼, 노비도 속박에서 점차 벗어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세습적이고 폐쇄적인 신분제는 점차 그 의미를 잃어 갔다.

사상적인 면에서는, 새로운 사회 변동에 직면하여 지배 체제의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진보적인 사상으로서 실학이 연구되어 사회 개혁과 새로운 발전 방향을 제시하였다. 또, 천주교가 전래되어 평등 사회와 개인의 존엄성을 내세우고 전통 사회의 질서와 가치 규범에 도전하였으며, 민족 종교로서 동학이 창시되어 농민층을 중심으로 현실 개혁을 추구하는 사회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정치적인 면에서는, 여러 면에서 나타난 근대 지향적인 움직임을 수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붕당 정치는 세도 정치로 이어져 폐단을 크게 드러내었고, 이에 따른 행정 기강과 수취 체제의 문란으로 농민의 생활은 도탄에 빠져들었다. 마침내, 그 동안 의식이 향상되어 온 농민들은, 이른바 민란의 형태로 불만을 폭발시킴으로써 양반 중심의 지배 체제는 크게 흔들려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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