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Ⅲ. 민족의 독립 운동3. 독립 운동의 전개

(4) 항일 독립 전쟁

독립 운동 기지의 건설

19세기 후반 간도와 연해주에는 한국인 이주민의 수가 급증하여 집단촌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자치 기관과 각종 단체를 결성하여 한민족의 권익을 지키는 한편, 수많은 민족 학교를 설립하여 민족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침략이 극심해지자 이주민들은 애국 단체를 결성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하였으며, 의병을 일으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일제의 국권 강탈을 전후하여 수많은 애국 지사들이 간도와 연해주 지방으로 망명하였고, 일제의 경제 수탈로 삶의 터전을 상실한 농민들이 이 곳으로 이주해 옴으로써 항일 운동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국외의 애국 지사들은 국내 독립 운동과 연결하면서 각지에 독립 운동 기지를 건설하고, 그 곳에 이주해 살고 있던 우리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국외 독립 운동의 선구적 임무를 담당한 단체는 신민회였다. 신민회의 활동은 당시 의병 전쟁과 함께 항일 운동의 큰 줄기를 이루었는데, 신민회는 국내에서의 활동이 제약을 받게 되자, 국외의 독립 운동 기지 건설에 앞장 섰다.

독립 운동 기지의 건설은 간도와 연해주 등지에 한민족의 집단적 거주 지역을 개척, 확장하여 항일 독립 운동의 거점을 마련하고, 결정적인 시기에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기반을 이루는 데에 그 뜻이 있었다. 그리고 이 지역을 중심으로 산업을 일으켜 경제적 토대를 이룩하고, 청소년을 모아 근대적 민족 교육과 군사 훈련을 강화하여 무장 독립 전쟁을 수행하려는 것이었다. 이 가운데 유명한 곳은 이회영, 이상룡 등이 설치한 남만주의 삼원보와 이상설, 이승희 등이 세운 밀산부의 한흥동,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이었다.

이들 기지를 거점으로 서전 서숙, 명동 학교 등 민족 교육 기관과 신흥 학교와 같은 독립군 지휘관 양성을 위한 무관 학교가 설립되었다. 1919년까지 간도 일대만 해도 백 수십 개의 학교가 설립되었고, 연해주에도 신한촌의 한인 학교를 비롯하여 십여 개의 민족 학교가 있었다.

더욱이 이상설과 이동휘를 정⋅부통령으로 하는 대한 광복군 정부가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됨으로써(1914) 독립군의 무장 항일 운동의 터전이 마련되었을 뿐 아니라, 임시 정부 수립의 길을 열어 놓았다.

만주와 연해주의 독립 운동 기지   

한편, 중국, 일본, 미국 등지에도 독립 투사들이 망명하여, 그곳의 한인 동포 사회를 중심으로 독립 운동을 추진하였다.

국내 무장 항일 투쟁

3⋅1 운동 이후, 무장 항일 투쟁의 본거지는 만주와 연해주가 그 중심이 되었으나, 국내에서도 독립군 부대가 결성되어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국내의 대표적인 무장 단체로는, 평북의 동암산을 근거로 무장 활동을 하던 보합단, 평북 천마산을 근거지로 한 천마산대, 그리고 황해도 구월산의 구월산대를 들 수 있다. 국내에서 편성된 이들 독립군 부대는 만주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독립군과 긴밀한 연락을 취하며 일제의 식민 통치 기관 파괴, 일본 군경과의 교전, 친일파 처단, 군자금 모금 등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특히, 천마산대는 일제 군경에 대한 유격전을 전개함으로써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으며, 만주에 설치된 광복군 사령부와 긴밀하게 협조하였다. 그 후, 천마산대는 일제 군경의 집요한 반격으로 활동이 여의치 않게 되자 만주로 이동하여 대한 통의부에 편입되었다.

애국 지사들의 항일 의거

무장 항쟁 중에는, 애국 지사들이 개별적으로 전개하였던 의거도 여러 차례 있었다. 이들은 독립 운동 단체에 소속되어 특명을 받고 의거를 일으키기도 하였으나, 순전히 개인적 판단으로 거사한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서 김원봉이 조직한 의열단과 김구가 중심이 되어 조직한 한인 애국단의 활동이 가장 두드러졌다.

국내에서의 의거로는 총독을 저격한 강우규, 종로 경찰서에 투탄한 김상옥, 그리고 총독부에 투탄한 김익상과 동양 척식 주식 회사에 투탄한 나석주 등의 활동이 유명하였다.

국외에서도 의거를 일으킨 지사들이 많았다. 타이완에서 일본 왕족을 죽인 조명하, 일본에 건너가 일본 국왕을 죽이려 하였던 김지섭의 거사는 국제적으로 한국 독립 운동의 의기를 드높였다.

조명하   

독립군의 항일 전쟁

거족적인 3⋅1 운동은 독립 운동의 분수령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민족 지도자들은 비폭력 항일 운동으로는 독립을 쟁취할 수 없다는 것을 자각하고, 조국 광복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무장 독립 전쟁의 조직적인 전개가 지름길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하여 민족 지도자들은 간도를 비롯한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 살고 있는 100여만 명의 동포 사회의 협조로 많은 항일 단체를 조직하여 독립 운동의 기지화를 추진하였으며, 무장 독립군을 편성하고 동포들이 제공한 자금을 바탕으로 무기를 구입, 항전 준비를 갖추었다.

독립군은 부대를 정비, 강화한 다음, 무장을 갖추어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너 국내의 일제 식민지 통치 기관을 습격, 파괴하였으며, 일본 군경과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이와 같은 독립군의 활동은 국내의 청년들을 고무시켜 수많은 애국 청년들이 만주와 연해주로 건너가 독립군에 합세하였고, 대한 제국 시기의 의병들도 여기에 가담하여 독립군의 군세는 나날이 강성해 갔다.

독립군의 국내 전투 상황
연도 교전 횟수 출동 병력
1920 1,651 4,643
1921 602 3,148
1922 397 2,127
1923 454 2,797
1924 560 3,438

봉오동⋅청산리 전투

1920년대에 들어와 만주와 연해주에는 수많은 독립군 부대가 활동하고 있었다.1) 이들은 일본 군경과 전투를 전개하면서 군자금 모금, 밀정 처단, 친일파 숙청 등의 활동을 벌였다. 이 가운데 가장 눈부신 전과를 올린 것은 홍범도가 이끈 대한 독립군이 거둔 봉오동 전투와 김좌진이 이끈 북로 군정서군 등이 거둔 청산리 대첩이었다.

대한 독립군은 최진동의 군무 도독부군, 안무의 국민회 독립군과 연합하여, 봉오동을 기습해 온 일본군 1개 대대 병력을 포위, 공격하여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것이 봉오동 전투였다(1920).

봉오동 전투 기사(독립 신문)   

일본군은 얕보던 독립군에게 뜻밖에 참패를 당하자,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부대와 관동 지방에 주둔 중인 부대 및 시베리아에 출병 중인 부대를 동원하여 세 방향에서 독립군을 포위, 공격하여 왔다.

이에 북로 군정서군, 대한 독립군, 국민회 독립군 등 여러 독립군의 연합 부대는 일본군 대부대를 맞아 6일간 10여 차례의 전투에서 일본군을 대파하는 빛나는 전과를 올렸다.2) 이것이 청산리 대첩이었다(1920).

큰 타격을 받은 일제는, 독립군의 항전을 자기들의 식민 통치에 대한 위협이라 판단하고, 이 기회에 만주에 있는 한국 독립 운동의 근거지를 소탕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일제는, 독립군은 물론 만주에 사는 한국인을 무차별 학살하고 마을을 초토화시킨 간도 참변(경신참변)을 일으켰다.3)

독립 전쟁의 시련

독립군의 거듭된 승리로 사기가 충천해 있던 만주의 한민족에 대해, 일본군은 한인촌에 대한 대량 학살과 방화, 약탈, 파괴를 자행하였다. 이에 독립군은 한때 각지로 분산하여 대오를 재정비하였고, 그 중 4000여 명 규모의 주력 부대는 소⋅만 국경에 위치한 밀산부에 집결하였다. 그 곳에서 서일을 총재로 하는 대한 독립군단을 조직한 후, 일본군의 추격을 피하여 소련 영토 내로 이동하였다.

그들은 그 곳에서 한국인의 민족 운동을 지원한다고 하는 적색군의 감언이설에 속아 자유시로 이동하였고, 적색군을 도와 내전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적색군은 내전에 승리한 후 독립군의 무장을 강제로 해제하려 하였고, 이에 저항하는 독립군을 공격함으로써 무수한 사상자를 낸 이른바 자유시 참변을 야기하였다(1921).

적색군의 배신으로 와해된 독립군은 이에 굴하지 않고 다시 만주로 탈출하여 조직을 재정비하면서 역량을 강화한 다음 각 단체의 통합 운동을 추진하였다. 그리하여 압록강 건너편 지역에서는 임시 정부 직할하에 육군 주만 참의부가 설립되었고, 길림과 봉천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 일대에서는 정의부가 결성되었다. 또, 북만주 일대에서는 소련 영토에서 되돌아온 독립군을 중심으로 신민부가 조직되었다.

이에 만주의 독립군 조직은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의 3부로 재편성되었다. 이들은 각기 그 곳 동포들의 자치 행정을 맡아 보는 민주적 민정 기관을 두고 입헌 정치 조직까지 갖추었으며, 독립군의 훈련과 작전을 맡는 군정 기관도 설치하였다. 그리고 자체의 무장 독립군도 편성하여 한⋅만 국경을 넘나들며 일제와 치열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그러나 독립군은, 일제와 만주 군벌 사이에 독립군의 탄압을 위하여 맺어진 이른바 미쓰야 협정(三矢協定)에 의해 다시금 큰 타격을 받았다. 이 협정은 일제와 만주 군벌이 공동으로 독립군을 소탕하고 체포된 독립군을 일본측에 인도한다는 내용이었다.

미쓰야 협정 내용(1925. 6. 11.)

만주에 있는 한국 독립군을 근절시키기 위하여 중국의 봉천성 경무처장 우진과 조선 총독부 경무국장 미쓰야 사이에 맺어진 협정이다.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한국인의 무기 휴대와 한국 내 침입을 엄금하며, 위반자는 검거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2) 재만 한인 단체를 해산시키고 무장을 해제하며, 무기와 탄약을 몰수한다.

(3) 일제가 지명하는 독립 운동 지도자를 체포하여 일본 경찰에 인도한다.

(4) 한국인 취체의 실황을 상호 통보한다.

이어서, 일제가 만주 사변을 일으키고, 괴뢰 정권인 만주국을 수립한 이후 만주 일대를 장악함으로써, 이 곳을 근거지로 활동하던 독립군은 보다 큰 위협을 받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독립군은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항전을 계속하였다.

특히, 우리 독립군은 일제의 만주 침략으로 항일 의식이 고조된 중국군과 연합하여 항일전을 전개함으로써 이 난국을 타개하려 하였다. 먼저, 지청천이 인솔하는 한국 독립군은 중국의 호로군과 한⋅중 연합군을 편성하고, 쌍성보 전투, 사도하자 전투, 동경성 전투에서 일⋅만 연합 부대를 크게 격파하였으며, 특히 대전자령 전투에서는 4시간의 격전 끝에 승리하여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였다.

한편, 양세봉이 지휘하는 조선 혁명군도 중국 의용군과 연합해서 홍경성 전투, 영릉가 전투에서 일본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었다.

1930년대 중반까지 계속된 한⋅중 연합 작전은 그 후 일본군의 대토벌 작전, 중국군의 사기 저하, 한⋅중 양 군의 의견 대립으로 더 이상 계속되지 못하였다. 또, 임시 정부가 직할 군단 편성을 위하여 만주에 있는 독립군의 이동을 요청하자, 대부분의 독립군은 중국 본토로 이동하여 한국 광복군 창설에 참여하였다.

무장 독립군의 대일 항전   

한국 광복군의 창설

대한 민국 임시 정부가 숙원 사업이던 한국 광복군의 창설을 시도한 것은 중⋅일 전쟁 이전부터였으나, 본격화된 것은 중⋅일 전쟁이 일어난 이후였다. 광복을 위해서는 일본과 결전을 벌이는 길이 최선이며, 국제 정세도 일본과 전쟁할 시기가 임박하였음을 시사하고 있었다.

임시 정부가 군사 계획을 추진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어려움은 훈련받은 병사의 부족이었다. 그리하여 임시 정부는 중국 정부에 요청하여 한국의 청년들을 중국의 정규 군사 학교에 입교시켜 군사 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 후 임시 정부의 김구, 지청천 등은 만주와 시베리아에서 항전하던 신흥 무관 학교 출신의 독립군과 중국 대륙에 산재하여 독립 운동에 참여하던 수많은 청년을 모아 마침내 충칭에서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였다(1940).

한국 광복군   

이보다 앞서, 김원봉의 조선 민족 혁명당 쪽에서는 조선 의용대를 결성하여 중국 각지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한국 광복군은, 조선 의용대를 흡수 통합하여 군사력을 증강하였고, 중국 국민당 정부와의 적극적인 협력하에 연합군의 일원으로서 대일 전쟁에 참전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한편, 한국 광복군에 합류하지 않고 중국 공산당과 함께 옌안을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고 있던 조선 독립 동맹 계열의 조선 의용군은 화북 지역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하였다.

대일 선전 포고와 한국 광복군의 활약

대한 민국 임시 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함께 여러 번 옮겨 다니다가, 충칭에 정착한 이후에는 정부 조직을 본토 수복을 위한 체제로 정비하였다. 그리고 흩어져 있던 각지의 무장 세력을 임시 정부 산하의 한국 광복군으로 통합하면서 군사력을 강화하였다.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임시 정부는 즉각 대외 활동을 펴 대일 선전 포고를 발표하였으며, 한국 광복군을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시켰다. 그 후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 포고함으로써 국제적 위상을 높였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대일 선전 성명서(사본)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한국 광복군은, 중국에서는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제에 대항하였으며, 미얀마, 인도 전선에까지 파견되어 영국군과 연합 작전을 수행하였다. 대일전에 참전한 한국 광복군은,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것 외에도 포로 심문, 암호 번역과 선전 전단의 작성, 대적 회유 방송 등의 심리전에도 참여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중국과 동남아 일대에서 연합군과 같이 대일전에 참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조국의 광복을 우리의 손으로 쟁취하기 위하여 직접 국내로 진입하여 일본군과의 전면전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한국 광복군은 총사령관 지청천, 지대장 이범석 등을 중심으로, 중국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과 연합하여 국토 수복 작전의 임무를 맡은 국내 정진군을 편성하여 특수 훈련을 실시하였고, 비행대의 편성을 꾀하였다.

그러나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무조건 항복함으로써 한국 광복군은 그 해 9월에 실행하려고 준비 중이던 국내 진입 계획을 실현하지 못한 채 광복을 맞게 되었다.

1) 1920년대를 전후하여, 만주에서는 대한 독립단, 서로 군정서, 북로 군정서, 대한 독립군, 대한 독립 군비단, 의군부, 광복단, 태극단, 광한단, 광복군 사령부, 광복군 총영, 대한 통의부, 광정단 등의 독립군 조직이, 연해주에서는 혈성단, 경비대, 신민단 등이, 미국에서는 국민 군단, 비행사 양성소, 소년병 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2) 청산리 대첩의 전과는 자료마다 달라서 정확히 밝힐 수 없다. 대한 민국 임시 정부의 발표는 일본군 사망 1,254명, 박은식의 ‘한국 독립 운동지혈사’에서는 약 2,000명, 이 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의 ‘우둥불’에서는 사상자를 3,300명이라 기록하고 있다.
3) 간도 지방에서 일본군에 의하여 학살된 한국인은 훈춘현에서 242명, 연길현에서 1,124명, 화룡현에서 572명, 왕청현에서 347명, 영안현에서 17명, 그 밖의 현에서 804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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