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국사교과서Ⅳ. 고려 시대의 생활

5. 고려 후기의 대외 항쟁

〔학습 개요〕

최씨 무신 정권이 계속되는 동안 몽고족의 침입이 있었다. 이에, 고려는 서울을 강화도로 옮기면서까지 몽고의 침입에 끈질기게 저항하였다.

그러나, 강화도에서 투쟁하는 동안 최씨 무신 정권이 무너지자, 고려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게 되었다. 이에, 항몽 투쟁에 가장 용감했던 삼별초가 몽고에 계속 반기를 들고 자주 운동을 폈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이 때부터 고려는 몽고의 간섭을 받아 시련을 겪었다. 몽고의 세력이 약해진 공민왕 때에 북진 정책이 국내의 제반 개혁 정책과 함께 수행되었다. 그러나, 이 개혁 정치는 성공하지 못하였고, 또 밖으로부터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을 받게 되어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로의 발전을 위하여 노력하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학습 문제

1. 몽고의 침입에 대한 우리 민족의 항쟁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2. 삼별초의 항몽 투쟁은 민족사에서 어떤 의의를 지닐까?

3. 공민왕의 반원 개혁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4. 홍건적과 왜구의 침입은 고려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을까?

고려와 몽고의 접촉

최씨 무신 정권이 확립되어 갈 무렵, 몽고에서는 테무친이 나라를 세워 스스로 칭기즈칸이라 일컫고, 남송과 금에까지 그 세력을 뻗쳤다. 그리하여, 만주에 살고 있던 거란의 유족들은 몽고의 압력을 받게 되어 고려로 몰려왔다가, 김취려 장군에게 쫓겨났다.

그 후에 거란족은 다시 침입해 왔으나, 고려의 반격을 받아 강동성에 웅거하게 되었다. 이 때, 고려는 몽고군과 함께 강동성의 거란족을 소탕하였는데, 이로써 고려와 몽고는 처음으로 접촉하게 되었다.

그 후, 몽고는 거란족을 토벌한 것을 구실로 고려에 많은 물건을 요구하는 등 압력을 가해 왔으므로, 두 나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몽고에 대한 항쟁

고려와 몽고와의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몽고의 사신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길에 압록강 근처에서 살해된 사건이 일어났다. 일찍부터 고려를 칠 기회를 노리고 있던 몽고는, 이 사건을 고려의 소행이라고 트집잡아, 살리타를 보내어 대대적으로 침입해 왔다.

몽고군은 고종 18년(1231)에 의주를 거쳐 내려와 개경을 포위하였는데, 미처 전쟁 준비를 하지 못했던 고려는 화평을 내세워 적을 돌려 보냈다. 이에 몽고는, 지방의 감시관으로 다루가치를 남겨 두고 물러갔다.

그 후, 몽고가 무리한 조공을 요구해 오자, 고려는 최후까지 몽고와 싸울 결심을 하고, 이듬해에 서울을 강화도로 옮겨 철저한 항전 태세를 취하였다.

강화성   
몽고의 침입에 대항하기 위하여 쌓은 성이다. 경기 강화 소재.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몽고의 침입을 다시 받게 되자, 고려는 큰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나,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항전하였다. 또, 부처의 힘을 빌어 이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대장경 간행을 계획하여 고려 대장경판을 새기기도 하였다.

최씨 정권도 굳세게 항전하였지만, 민중의 과감한 투쟁은 참으로 놀랄 만하였다. 특히,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노비와 천민들까지 용감히 싸워 충주 등 곳곳에서 빛나는 공을 세운 것은 매우 주목할 만하다.

전쟁이 장기화되자, 몽고는 무력으로 고려를 정복하기가 어려움을 알고, 육지로 나와 강화할 것 등을 고려에 요구하였다.

이러는 사이에 강화도에서 정변이 일어나, 60여 년 간 계속된 최씨 정권이 무너졌다. 최씨 정권이 무너지자, 몽고와의 화해가 성립되고, 마침내 오랜 전쟁은 끝났다.

몽고와의 전쟁에서 고려는 큰 피해를 입었다. 국토는 황폐해지고 수많은 백성들이 생명을 잃었으며, 또 경주 황룡사의 9층탑과 대구 부인사에 보관된 대장경판 등 귀중한 문화재가 불타 없어졌다.

삼별초

강화가 성립된 후에 정부는 개경으로 환도하였다. 이 때, 몽고와의 항전에서 가장 용감히 싸운 삼별초는 정부의 개경 환도를 몽고에 대한 굴욕적 항복이라 하여, 배중손의 지휘하에 강화도에서 반기를 들고 반몽 투쟁을 벌였다(1270).

이들은 근거지를 진도와 제주도로 옮기면서 4년간에 걸쳐 완강하게 저항하였으나, 결국 여⋅몽 연합군에 의해 진압되었다.

삼별초의 대몽 항전(민족 기록화)   
삼별초군이 진도에서 몽고군과 전투하는 모습이다.

삼별초군은 비록 그 뜻을 이루지는 못하였으나, 고려 무인들의 몽고에 대한 항쟁 의식을 잘 나타내 주었다.

고려와 원

몽고족이 세운 원은, 삼별초의 항쟁이 끝난 후부터 고려에 대하여 여러 가지로 압력을 가하기 시작하였다. 원은 그들의 일본 원정에 고려가 협력하기를 강요하였다. 두 차례에 걸친 원의 일본 원정은 태풍으로 모두 실패했는데, 이 원정으로 말미암아 고려가 입은 경제적, 군사적 손실은 막대하였다.

원은 일본 원정을 위해 정동행성이라는 관청을 두었는데, 점차 고려의 내정을 간섭하였다. 그리하여, 고려의 관제가 개편되고, 공식 용어도 많이 바뀌었다.

한편, 여⋅원이 문물을 교류함에 따라 고려의 궁정이나 상류 사회에서는 몽고식 의복과 몽고말이 유행하였고, 반대로 몽고에서는 고려양이라는 고려식 생활 풍속이 유행하였다.

원은 고종 때 화주(영흥)에 쌍성총관부를 두어 철령 이북의 땅을 다스렸고, 원종 때에는 서경에도 동녕부를 두어 한때 자비령 이북 지역을 점령하였다. 그리고, 삼별초의 항쟁이 실패로 돌아간 후, 원은 제주도에 탐라총관부를 설치하였다.

공민왕의 개혁

원의 간섭하에서 자주권을 찾으려는 노력은 충선왕 때에 이미 있었으나, 실패하였다. 그 후, 14세기 중엽에 이르러 원이 새로 일어난 명에 의해 북방으로 쫓기게 되자, 공민왕은 이 틈을 타서 원의 간섭을 제거하고 독립 국가의 체통을 다시 찾기 위하여 과감한 개혁 운동을 벌였다. 이 운동은 밖으로는 배원 정책, 안으로는 사회의 개혁이 목적이었다.

공민왕은 먼저 원의 감독 기관인 정동행성을 없애고, 쌍성총관부를 공격하여 철령 이북의 땅을 되찾고, 고려의 옛 관제를 복구하였다. 또, 몽고식 의복과 변발 등 몽고 풍속을 금하고, 역대의 숙원인 북진 정책을 실현하기 위하여 압록강을 건너 요동에 있는 동녕부를 공격하였다.

공민왕의 영토 수복   

이 밖에, 공민왕은 사회의 각종 폐단을 개혁하였다. 우선 친원 세력인 권문 세가를 누르고 정방을 폐지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또, 신돈을 등용하고 전민변정도감을 설치하여, 권문 세가들이 불법으로 차지한 많은 토지를 원주인에게 되돌려 주고 노비를 해방시켰다.

공민왕의 이러한 개혁 정치는 백성들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신돈의 발호와 권문 세가들의 반대로 이 개혁 운동은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홍건적과 왜구

고려가 개혁 운동을 벌이고 있을 무렵, 북쪽의 홍건적과 남쪽의 왜구가 고려에 침입하여 개혁 운동에 커다란 지장을 주었다.

홍건적은 원의 지배에 반대하여 일어난 한족의 무리로, 주로 중국 북쪽 지방에서 저항 운동을 벌여 오다가, 원에 쫓기면서 두 차례나 고려를 침입하였다. 홍건적의 침입으로 한때 개경이 함락되기도 했으나, 정세운, 이방실, 이성계 등이 이들을 물리쳤다.

한편, 고종 때부터 삼남 지방의 해안을 노략질하던 왜구는, 공민왕 이후에는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육지에까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소란을 피웠다.

왜구의 침입으로, 해안 지대의 농토는 황폐해지고 조세의 해상 운반이 어렵게 되자, 정부는 무력으로 다스리는 방법도 취하면서 한편으로는 일본 정부에 왜구의 철저한 단속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최영, 이성계 등은 육지에서 여러 차례 왜구를 격파하였고, 최무선은 화통도감을 설치하고 새로 만든 화포로 바다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창왕 때 박위가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 섬을 정벌하자, 왜구의 세력은 점차 꺾였다.

황산 대첩비 비각   
고려 말에 이성계가 왜구를 황산에서 크게 무찌른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각이다. 전북 운봉 소재.

이렇게 고려 말기의 국내외 정세는 몹시 어수선하여, 우리 민족은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사회와 문화 발전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었다.

학습 정리

1. 고려는 13세기 초엽에 몽고의 침입을 받았으나, 약 40년간에 걸친 줄기찬 항전을 전개하였다.

2. 삼별초의 대몽 항전은 고려 무인들의 자주 정신을 잘 보여 준 것이었다.

3. 고려는 원의 간섭으로 한때 자주성이 흔들렸으나, 원이 쇠약해진 후 반원 자주 운동을 펴 자주성을 회복하였다.

4. 공민왕 때의 개혁 운동의 실패와 홍건적과 왜구의 거듭된 침입으로 고려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이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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