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권위와 견제 장치
조선 왕조는 518년 동안 27명의 왕이 재위하였다.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왕들은 체제의 정비가 필요한 시기에 살기도 하였고, 강력한 개혁이 절실한 시기에 살기도 하였다. 태종이나 세조처럼 자신이 집권한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강력한 왕권을 확립해야 했던 왕, 세종이나 성종처럼 체제와 문물의 정비에 총력을 쏟았던 왕, 선조나 광해군처럼 개혁이 시대적 요구였던 시대를 살아간 왕도 있었다. 선조처럼 전란을 몸소 겪고 수습해야 했던 왕, 전쟁의 상처를 수습하고 국가 재건을 위해 노력했던 광해군, 인조처럼 적장(敵將)에게 항복할 수밖에 없었던 왕, 원인은 달랐지만 부왕(父王) 의 복수와 명예 회복을 위해 살아간 효종과 정조도 있었다. 이처럼 조선의 왕은 시대적 요구를 수행하여야 했고, 이 과정에서 백성과 신하들의 입장을 최대한 고려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민본 정치의 이념에 충실하고, 언관(言官)의 비판 같은 반대파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했다. 이러한 점에서 조선 국왕의 권위는 분명히 앞선 시대보다 약화되었다. 그러나 국왕의 권위를 높이는 사업에서는 좀 더 체계적이고 다양한 방법이 동원되었다.
조선의 왕은 국시(國是)로 채택된 성리학 이념을 충실히 따랐다. 성리학에서 추구하는 요순(堯舜) 같은 왕이 되기 위해서 학습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경연(經筵)을 통해 신하들의 조언을 최대한 반영하려 하였다. 왕세자 시절의 서연(書筵)이나 왕이 된 후 정기적으로 수행한 경연을 통하여 왕은 최대한 신하들의 의견을 받아들였다.
“대저 군주는 백성에 의존한다.”라는 『조선경국전』 이래의 원칙을 지켜 나가기 위해서는 백성들을 보호하는 데도 소홀할 수 없었다. 조선의 왕은 외견상 권위적으로 보였지만 모범적으로 학문에 충실하고 검약에 충실한 왕이 되기를 요구받았다. 조선의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를 받는 세종, 영조, 정조 등은 이러한 기준에 대체로 부합되는 왕이었지만, 연산군처럼 왕의 절대적인 권위와 독재권을 행사하는 왕에게는 언관 같은 왕권 견제 장치는 구속으로 다가왔다. 연산군을 폐위시킨 중종반정과 함께 쿠데타적 성격이 강한 인조반정과 같은 두 차례의 반정이 일어났던 역사에서는 경우에 따라 신하들의 힘에 의해 왕이 폐위될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 그만큼 왕권이 절대적이지 못했던 것이다. 조선 후기 붕당 정치(朋黨政治)가 치열하게 전개되면서 왕이 특정 당파(黨派)의 수장 같은 역할을 한 모습도 조선시대 왕이 신권의 견제를 상당히 받았음을 확인시켜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