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동굴유적
가) 금강유역
(가) 청원 두루봉유적
충북 청원군 가덕면 노현리 두루봉은 결정질 석회암이 잘 발달된 곳이다. 이미 1964년부터 석회암 채취로 많이 파괴된 두루봉유적이 발굴에 들어가 1976년∼1983년까지 모두 10차에 걸쳐 두루봉에 제2굴·새굴·처녀굴·흥수굴(<사진 8>) 등을 찾게 되었다.125)
㉮ 2굴:1976년∼1978년까지 3차례에 걸쳐 발굴된 2굴에서는 불을 피운 화덕자리와 숯, 망치와 가죽을 벗기거나 살을 자르는데 사용되었을 긁개와 자르개 등 석기들을 찾았다.
이 동굴에서 지금은 멸종된 첫소·쌍코뿔이·크로쿠타 크로쿠타·큰 원숭이 등 3문 7강 15목 28과 37속 46종이 밝혀져, 지금까지 우리 나라의 구석기유적 중 가장 많은 종의 짐승이 찾아졌다. 이들은 더운 시기에 살던 더운 짐승(La fauna chaude)으로 중기 홍적세의 따뜻한 시기로 해석된다.
그런데 두루봉사람이 살던 7층에서 꽃가루분석의 결과, 진달래꽃가루가 다른 곳에서는 전혀 없다가 바로 굴 입구의 모서리에서 한꺼번에 157개나 검출된 사실은 사람이 일부러 꺾어다 집자리인 동굴을 예쁘게 꾸미려는 미의식의 표현행위로 해석되며, 3월 하순쯤이라는 구체적인 시기까지도 밝혀 주고 있다(<사진 9>). 또한 2굴의 사람들은 동물상 가운데 주된 동물인 사슴과(科)의 이빨분석으로, 사슴의 사냥행위는 9·10월에 가장 많이 한 것으로 나타났다.126)
㉯ 9굴:이 굴은 1977∼1978년까지 2차례의 발굴을 통하여 동물화석·뼈연모·석기·예술품 등이 나왔다.
9굴의 문화층은 2개로 나누어지는데, 중기 홍적세 늦은 시기의 아래층인 노란흙층(Ⅱ층)은 사멸종이 50%나 차지하여 높은 비율을 보이고 있고, 간단한 떼기와 잔손질을 베푼 석기도 출토되었다.
후기 홍적세 시기에 해당하는 위층인 붉은흙층(Ⅰ층)에서 출토된 동물화석은 2문 4강 10목 24과 26속 31종(사멸종은 10종으로 32.3%)으로 밝혀졌다. 한편 따뜻한 기후를 보여주는 사자·원숭이 등의 짐승이 나타나고 있어서, 이 문화층의 형성시기는 추운 기후에서 따뜻한 기후로 넘어가는 시기로 생각된다.127)
㉰ 새굴·처녀굴:새굴은 두루봉의 정상에서 새로 찾았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으로 1980년 발굴되었다.
우리 나라와 아시아 구석기유적에서 정식발굴로는 처음 찾아진 옛코끼리(Elephas antiquitas) 상아(길이 62㎝, 지름 7.6㎝)는 당시의 기후와 문화·고동물을 연구하는 구석기학자들의 관심을 집중시킬 만한 중요한 자료이다(<사진 10>). 또한 약 1㎡ 범위의 굴의 구석진 부분에서 사슴머리뼈 13점이 모여 있었고, 같은 개체의 사슴뿔을 갈아서 만든 치레걸이(목걸이) 2점은 구석기시대 사람들의 사슴숭배(deer cult) 믿음에 따른 주술과 思惟의 의미로 해석하는 데 큰 기준을 제시하여 주고 있다.
처녀굴은 사람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아니한 굴이라 하여 ‘처녀굴’로 명명되었는데, 이 굴에서는 학술적으로 매우 중요한 완전한 개체의 동굴곰(Ursus spelaeus)이 발굴되었다. 이러한 동굴곰뼈의 한가운데에 큰꽃사슴의 뿔을 놓고 곰의 머리뼈와 긴 뼈들을 동쪽으로 향하도록 의도적으로 배열되었음이 발굴결과로 밝혀져, 당시에 의식을 집행한 곳으로 해석된다(<사진 11>).128)
㉱ 흥수굴:이 굴은 두루봉조사의 10차발굴(1982. 12∼1983. 1)에서 완전한 사람뼈와 석기·동물화석이 발굴된 가장 이상적인 구석기유적의 문화성격을 지닌 동굴유적이다. 이 굴은 제보자의 뜻을 기리고자 우리 나라에서는 처음으로 사람이름을 유적이름에 붙여 ‘흥수굴’이라고 하였다.
흥수굴에서 발견된 2개체의 어린아이뼈(‘흥수아이’ 1호·2호)와 여러 층위에서 발굴된 많은 수의 전형적인 구석기유물은 우리 나라의 석기발달과 구석기학의 체계를 세우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사진 12>·<그림 12>).
흥수아이 1호 사람은 체질인류학적 분석으로 보면 5살 정도로, 머리 크기는 1,200∼1,300cc, 키는 110∼120㎝ 정도로 헤아려진다. 흥수아이의 머리뼈는 좁고 길며(Dolichocrany), 높은머리(Hypsicrany), 특히 윗머리뼈의 굽은 길이는 긴 가운형 얼굴이다. 라 끼나(La Quina)아이와 역포(평양부근)아이의 윗머리뼈들과 견주어 볼 때 흥수아이가 훨씬 크며, 이 길이는 평양 만달사람 어른뼈의 잰 값과 같음을 알 수 있다. 약 4만년 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이는 흥수아이는 머리뼈 잰 값의 결과로 현대인과 슬기슬기사람(후기 홍적세)의 특징을 함께 갖고 있다(<사진 13>).129)
앞으로 더 연구가 진행되면 구석기인의 이동과 우리 조상의 기원에 대한 의문을 풀어줄 수 있는 고리가 연결될 것으로 생각된다.
나) 한강유역
(가) 점말 용굴
충북 제천시 송학면 포전리 점말에 위치한 용굴은 1973년∼1980년까지 8차에 걸쳐 연차 발굴을 실시하였다. 남한강유역과 중원지방의 구석기연구에 박차를 가한 이 유적의 층위는 크게 7개로 구분되고 있다.
문화층으로는 Ⅲ층(흰 모래층)이 제3빙기(리스)로 전기 구석기에 해당되며, 제3간빙기의 Ⅳ층(붉은색 찰흙층)에서는 많은 큰 짐승의 뼈화석과 연모들이, 그리고 특히 털코뿔이의 앞팔뼈에 새겨진 사람얼굴의 모습은 이미 예술행위가 있었다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밑에 있는 Ⅴ층(갈색모래 찰흙층)은 U/Th/Pa연대측정으로 66,000BP로 나타나 제4빙기(뷔름)의 시기로 되며, 추운 시기에 살던 동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14C연대측정으로 18,660BP임이 확인된 Ⅵ층은 동물상·식물상을 통한 분석이 전개되었다.
이러한 일련의 연구는 종래의 구석기문화가 석기중심에서부터 석회암동굴이 갖는 여러 자료를 통한 층위구분, 동·식물상의 비교연구, 뼈연모의 분석 등 해석상에 커다란 과학적 기준을 통한 진전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130)
(나) 단양 금굴(충북 기념물 제 101호)
충북 단양군 매포읍 도담리에 있는 석회암동굴인 단양 금굴은 충주댐수몰지구 문화유적발굴의 일환으로 1983년∼1985년까지 3차에 걸쳐 조사되었다(<사진 14>).
발굴결과로 밝혀진 7개 문화층 가운데 전기에 속하는 1문화층(Ⅷ층), 2문화층(Ⅶ층, 185,870BP)에서 나온 석기들은 외날 긴찍개·휘인날 주먹도끼(<그림 13>) 등인데, 만듦새나 뗀 면이 매우 간단하며 크고 무거운 것이 특징이고, 수법은 부딪쳐떼기와 직접떼기를 사용하였다(<사진 15>).
중기 구석기에는 아슐리안·르발르와형식의 석기와 동물화석이 3문화층(Ⅳㄴ∼Ⅳㄱ층, 107,450BP)에서 발굴되었는데, 두께로 보아 금굴에서는 가장 긴 동안 살았음을 알 수 있다. 후기 구석기층(4문화층, 26,600BP)에는 짧은 시기 동안 살았고, 중석기층(5문화층, 11,000BP)은 그 흔적만을 찾을 수 있다.
이와 같이 5개의 구·중석기문화층 위에 빗살무늬토기층(6문화층, 5,670BP)과 민무늬토기층(7문화층, 4,000BP)이 있는 금굴유적은 전기 구석기시대부터 청동기시대까지의 선사시대 전시대에 걸친 7개의 문화층이 밝혀져,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표준유적(type site)」으로 들 수 있다.131)
이렇게 잘 발달된 선사문화가 층위를 이루면서 한 유적에 모여 있는 것은 세계 선사학계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기에, 발굴이 다 되지 못한 구역을 조사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다) 단양 구낭굴(충북 기념물 제 102호)
구낭굴은 2차(1986·1988년)에 걸쳐 파괴·교란되지 않은 완전한 상태로 찾아진 단양군 가곡면 여천리에 있는 석회암동굴이다(<사진 16>). 그러나 이 2차에 걸친 발굴로는 굴 전체(길이 약 140m)의 너비와 유물의 출토범위로 볼 때, 매우 한정된 구역(약 42㎡)에서만 조사가 진행되었고, 굴 바닥층에도 다다르지 못하여 전체 퇴적층위를 밝히지 못한 상태이다.
2차까지의 발굴결과로는 전체 층위가 8개층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사람뼈와 석기·뼈연모 등의 문화유물 및 많은 동물화석이 제2퇴적층(3층)에서 집중적으로 출토되고 있어, 이 3층이 구낭굴의 주된 문화층이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여기에서 나온 사람뼈는 형태와 크기로 보아 남자 어른의 것으로 판단된다.
지금까지 조사로 밝혀진 동물의 최소마리수(MNI)는 짧은꼬리원숭이 1마리(<그림 14>)·사슴 46마리·곰 5마리·호랑이 2마리 등 64마리가 확인되었다. 그리고 짧은꼬리원숭이는 이빨의 모양과 크기의 비교에서 물라타원숭이(Macaca mulatta)와는 전혀 다른 종이며 큰원숭이(M. robustus)와 푸스카타원숭이(M. fuscata)와의 친연성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해석되어, 홍적세 중 따뜻한 시기에 우리 나라에서 유전적으로 고립되었던 종으로 여겨진다.132)
앞으로 구낭굴은 연차적으로 계획적인 발굴이 이루어지고, 그리고 학계에서 차지하는 올바른 위치를 밝혀 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라) 상시 바위그늘
1981년 7월∼8월에 걸쳐 발굴된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에 있는 유적이다. 이 유적에 있는 3개의 바위그늘은 모두 시기를 달리하여 사람이 살았는데, 1그늘-구석기, 2그늘-신석기∼청동기, 3그늘-늦은 구석기∼신석기시대의 문화가 있음이 밝혀져 주목된다.
1그늘의 각 문화층에서는 모두 동물화석과 뼈연모가, 5·7·9층에서는 석기가 출토되었다. 특히 5층에서 출토된 사람뼈는 최소 2개체분인데, 뼈의 특징으로 보아 슬기슬기사람(Homo sapiens sapiens)과는 다르고, 네안데르탈사람과 흡사한 슬기사람(Homo sapiens)의 특징을 보이고 있어, 이를「상시 슬기사람」으로 부르고 있다. 키 156∼158㎝쯤 되는 20살이 넘는 상시사람은 남한에서 처음으로 출토된 슬기사람으로서, 당시 인류의 진화과정을 밝혀 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그림 15>·<사진 17>).133)
<李隆助>
125) | 이융조,<淸原 두루峰洞窟의 舊石器文化>(≪第1回 文化財硏究 國際學術會議:東亞細亞의 舊石器文化≫, 문화재연구소, 1992), 81∼9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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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 | 이융조,≪한국의 구석기문화(Ⅱ)≫(탐구당, 1984). ―――,<한국 구석기문화에서의 두루봉문화>(≪歷史學報≫ 109, 1986), 203∼234쪽. |
127) | 손보기,≪두루봉 9굴 살림터≫(연세대 선사연구실, 1983). |
128) | 이융조,<청원 두루봉 새굴·처녀굴의 자연환경 연구>(≪孫寶基博士停年紀念 考古人類學論叢≫, 지식산업사, 1988), 29∼68쪽. 이융조·우종윤·하문식,<청원 두루봉 구석기문화의 고고학적 고찰>(≪청원 두루봉동굴 발굴 2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東北亞 舊石器洞窟遺蹟과 文化≫, 충북대 박물관, 1996), 65∼74쪽. |
129) | 이융조·박선주,≪淸原 두루봉 흥수굴 發掘調査報告書≫(충북대 박물관, 1991). ―――,<우리 겨레의 뿌리에 관한 고인류학적 연구-청원 두루봉 [흥수아이]와 선사인류화석을 중심으로>(≪先史文化≫1, 충북대 선사문화연구소, 1992), 48∼142쪽. 이융조·우종윤·하문식,<淸原 두루봉 興洙窟의 舊石器文化>(≪中·露·韓 國際學術會議≫, 충북대 선사문화연구소, 1996), 39∼62쪽. |
130) | 손보기·한창균,<점말 용굴 유적>(≪博物館紀要≫5, 단국대 중앙박물관, 1989), 149∼172쪽. |
131) | 손보기,<丹陽 島潭里 금굴遺蹟 發掘調査報告>(≪忠州댐水沒地區 文化遺蹟延長發掘調査報告書≫, 충북대 박물관, 1985), 1∼99쪽. |
132) | 이융조·박선주·우종윤,≪단양 구낭굴 발굴보고(Ⅰ)≫(충북대 박물관, 1991). |
133) | 손보기,≪상시 1그늘 옛살림터≫(연세대 박물관 선사연구실, 1983). ―――, Contribution à l'Etude des Retes Humaines des Os Pariétaux Découvertes à Sangsi Corèe du Sud(≪孫寶基博士停年紀念 考古人類學論叢≫, 지식산업사, 1988), 137∼178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