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명학소민의 2차 봉기
1차 봉기가 끝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명학소민은 다시 일어났다. 그 들은 가야사를 함락시키고 黃驪縣(驪州)·鎭州(鎭川)도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竹州(竹山)의 弘慶院을 불지르고 승려들을 살해하고는 주지승을 위협하여 개경에 편지를 보내었다. 그 내용은 “이미 우리의 향리를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안무케 하더니, 다시 되돌려 군사를 내어 토벌하여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 가두니 그 뜻하는 바가 어디에 있느냐. 차라리 창, 칼 아래 죽을지언정 끝까지 항복한 포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담고 있었다.138)
정부는 명학소민과 강화를 맺어 현으로 승격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주민들을 안무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사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소민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가두었던 모양이다. 이에 명학소민들은 정부가 소에서 현으로 승격시켜 준 자체가 봉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시적인 조처였음을 깨달았다. 정부가 바라는 것은 봉기의 진압이지 봉기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여 피지배층의 요구를 적극 수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신분해방을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도 결국은 정부타도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정부의 기만적이고 미봉적인 대책과 더불어 또 하나의 불만 대상은 지방의 토호와 더불어 대지주의 성격을 지닌 사원이었다. 반민들의 사찰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고려시대의 불교가 왕실이나 귀족 중심의 종교로서 피지배층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관심이나 이를 구원하고자 하는 의욕이 부족했던 것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농민을 수탈하는 정도에 있어서 지방관이나 토호 못지않는 사원의 지주적인 성격이 그들을 가장 괴롭혔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사원은 왕실이나 귀족들의 개인 사찰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 많았으며, 또 그들의 비호를 받아 많은 토지와 인구 그리고 소도 장악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이전의 通度寺의 寺領지배 상황을 기록했던≪通度寺 舍利袈裟事蹟略錄≫의 寺之四方山川裨補條에 의하면 사찰이 茶所를 소유하고 있었다.139) 이와 같은 사찰에 소속된 所는 비단 다소뿐만 아니라 사원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납하는 다른 소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사원경제가 그 사회에서 생산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추측이 가능하다.140) 따라서 경제적으로 비대해지는 사원에 대한 피지배층의 괴리감은 국가가 그 곳에 제공하는 특혜와 더불어 더욱 커져갔다.
그러면 일반 백성들의 사원에 대한 분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축적되어 갔는지 2차 봉기 때 가장 피해가 심했던 弘慶院의 경우를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① (현종은 姜民瞻과) 金猛을 別監使로 삼아 弘慶院 신축을 함께 관리하게 하였는데 모두들 공치사나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인부를 사역할 때는 농사철을 피하였으며 물자도 국가의 창고에서 꺼내지 않았다. 기와장이는 기와를 대고 나뭇군은 목재를 공급하였다. 톱질과 자귀질은 일없는 목수들을 모아서 시키고 괭이질·삽질은 놀고 있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일하였다(崔忠,<奉先弘慶寺碣記>,≪朝鮮金石總覽≫上, 260∼262쪽;≪東文選≫권 64, 記).
② 이자겸이 홍경원을 수리하게 하였다. 僧正 資富와 知水州事 奉佑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그 때 주·현의 장정을 징발하여 그 폐해가 매우 컸다(≪高麗史≫권 98, 列傳 11, 高兆基).
③ 呵吒波拘神道場을 홍경원에, 般若道場을 選軍廳에 모두 27일간 설치케 했는데 묘청의 말을 좇아서였다(≪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8년 8월 임자).
사료 ①은 홍경원을 설립할 당시의 일을 적은 것으로, 국가는 사찰을 지으면서 국고금 없이 오직 백성들의 노동력에 의거하였다. 정부는 기와장이, 나뭇군, 목수들을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사원 건립에 필요한 물자도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무려 5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하였다. 마찬가지 내용으로 사료 ②도 홍경원을 개수할 때에 주현의 장정을 징발하여 그 폐해가 매우 컸음을 나타내고 있다.
국가의 강제노역에 의한 사원 건립은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는 정부나 지방관에 대한 원망으로 표현되겠지만, 또한 그들이 지은 후에 정부의 비호 아래 많은 賜田을 가지고 그 곳에 안주하는 승려들이나 사원이 지닌 성격 자체에도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원의 귀족적이고 지주적인 성격은 농민봉기가 발생했을 때 타도의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홍경원은 현종 때 창설된 후 계속해서 왕실과 문벌귀족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는데, 따라서 稷山의 토호세력으로서 막강한 경제력을 행사했으리라 생각된다. 앞서 내용에서 반민들이 홍경원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죽인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백성들을 수탈하여 원성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홍경원의 경우와 같이 명학소민의 표적이 되었던 덕산의 가야사에 대해서는 살필 수 있는 자료가 없으나, 원래 가야산 기슭은 사찰이 많았으며, 가야사는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풍수지리학상으로도 명당으로 유명했다고 한다.141) 따라서 가야사 또한 홍경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렸으며, 주변 주민들을 수탈하여 원성을 샀을 것은 뻔하다.
이후 반민들은 牙州 등 충청도 전역을 공략하여 공주뿐 아니라 청주관내 군현이 모두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오직 청주만이 남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회유를 통해 난을 진압하려는 작전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142) 그 해 5월에는 宣旨使用別監을 보내어서 남적을 제압한 전공을 살펴 관군의 사기를 앙양시켰으며 또한 충순현을 삭제하였다. 정부는 손청·이광 등 망이 주위의 반민들을 진압하여 명학소민을 고립시킨 후143) 총력을 다하여 공격하였다.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밀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망이 등은 항복을 요청하였다. 명종 7년 7월, 망이 등이 잡혀 淸州獄에 갇힘으로써 무려 1년 반이나 지속된 공주지역 농민·천민의 항쟁은 여기서 끝맺게 되었다.
138) | ≪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3월 정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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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 | <通度寺 舍利袈裟事蹟略錄>(≪通度寺志≫, 亞細亞文化社, 1979), 26쪽. |
140) | 고려시대 사원경제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劉敎聖,<高麗 寺院經濟의 性格>(≪白性郁博士還曆紀念 佛敎學論文集≫, 1959). 李載昌,<麗代 寺院領擴大의 硏究>(≪佛敎學報≫2, 1964). 閔丙河,<高麗時代 佛敎界의 地位와 그 經濟>(≪成大史林≫1, 1965). 李炳熙,≪高麗後期 寺院經濟의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
141) | 가야사는 조선시대 말기에 명당을 탐낸 대원군이 이곳을 불태우고 그의 아버지 南延君의 묘지로 만들었다. |
142) | 당시 南賊處置兵馬使로서 청주에 주둔했던 정부군의 지휘자는 鄭世猷이고, 南路捉賊左道兵馬使로서 驪州지역에 머무르면서 李光을 사로잡은 사람은 梁翼京이다. 그리고 南賊制置右道兵馬使로서 예산방면으로 가서 孫淸을 죽인 사람은 李夫였으리라 보여진다. 반란민이 3파로 나누어 북쪽으로 진격하자, 정부군도 청주를 거점으로 3파로 나누어서 그들을 방어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
143) | ≪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3월 무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