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고려 시대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2. 농민·천민의 봉기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2)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1. 신분제의 동요
          • 1) 신분제 동요의 배경
          • 2) 양인·천인의 신분이동
            • (1) 양인·천인의 신분상승
            • (2) 양인의 신분하락
            • (3) 이성계 일파의 집권과 양인·천인의 신분고정
          • 3) 향리 및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1) 향리의 신분동요
            • (2) 양반귀족의 신분동요
        • 2. 농민·천민의 봉기
          • 1) 농민·천민봉기의 배경
            • (1) 중앙 통치체제의 문란
            • (2) 지방관의 탐학
            • (3) 대토지겸병의 확대
            • (4) 신분제의 동요
          • 2) 무신정권 성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서북지역의 농민봉기
            • (2) 공주 명학소민의 봉기
            • (3) 관성·부성·전주 등에서의 농민봉기
            • (4) 제주민의 항쟁
            • (5) 운문·초전민의 봉기
          • 3) 무신정권 확립기의 농민·천민봉기
            • (1) 만적의 난
            • (2) 진주민의 항쟁
            • (3) 경주민의 항쟁
          • 4) 외세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1) 거란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2) 몽고 1∼3차 침입기의 농민·천민봉기
            • (3) 몽고 6·7차 침입기의 농민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1. 몽고 침입에 대한 항쟁
          • 1) 몽고족의 흥기와 여·몽관계의 성립
            • (1) 13세기 몽고족의 흥기
            • (2) 몽고군의 고려 입경
            • (3) 강동성 전투와 여·몽관계의 성립
          • 2) 몽고의 고려 침입
            • (1) 몽고의 침략
            • (2) 최씨정권의 강화천도
            • (3) 몽고의 2·3차 침입
            • (4) 여·몽전쟁의 장기화
          • 3) 몽고의 침략에 대한 항전
            • (1) 살례탑군에 대한 항전
            • (2) 당고군에 대한 항전
            • (3) 야굴군에 대한 항전
            • (4) 차라대군에 대한 항전
            • (5) 고려의 입보책과 지방민의 항전
          • 4) 삼별초의 대몽항전
            • (1) 몽고와의 강화
            • (2) 삼별초의 봉기
            • (3) 삼별초의 진도 항전
            • (4) 삼별초군의 제주도항전
        • 2. 여·원관계의 전개
          • 1) 원의 간섭과 자주성의 시련
            • (1) 몽고제국 지배체제로의 편입과정
            • (2) 몽고제국 지배체제하의 고려왕조
            • (3) 여·원 양국간의 인적·물적 교류
          • 2) 북방문제
            • (1) 심양로의 심왕
            • (2) 동녕부
            • (3) 쌍성총관부
        • 3. 고려 말의 정국과 원·명 관계
          • 1) 원의 쇠퇴와 공민왕의 반원정책
          • 2) 공민왕의 개혁정치 실패와 명의 흥기
          • 3) 친원파와 친명파의 대립과 요동정벌
        • 4. 홍건적과 왜구
          • 1) 홍건적
            • (1) 원의 쇠퇴와 홍건적의 대두
            • (2) 홍건적의 침입
          • 2) 왜구
            • (1) 왜구의 성격과 규모
            • (2) 왜구의 침구목적
            • (3) 왜구의 침입
            • (4) 왜구에 대한 대책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명학소민의 2차 봉기

 1차 봉기가 끝난지 한 달도 지나지 않아 명학소민은 다시 일어났다. 그 들은 가야사를 함락시키고 黃驪縣(驪州)·鎭州(鎭川)도 쳐들어갔다. 그리고는 竹州(竹山)의 弘慶院을 불지르고 승려들을 살해하고는 주지승을 위협하여 개경에 편지를 보내었다. 그 내용은 “이미 우리의 향리를 현으로 승격시키고 또 수령을 두어 안무케 하더니, 다시 되돌려 군사를 내어 토벌하여 우리의 어머니와 아내를 잡아 가두니 그 뜻하는 바가 어디에 있느냐. 차라리 창, 칼 아래 죽을지언정 끝까지 항복한 포로는 되지 않을 것이며, 반드시 서울에 이르고야 말겠다”는 비장한 결의를 담고 있었다.138)

 정부는 명학소민과 강화를 맺어 현으로 승격시키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주민들을 안무하겠다고 약속하고는 사실은 다시 일어나지 못하도록 소민의 가족을 인질로 잡아 가두었던 모양이다. 이에 명학소민들은 정부가 소에서 현으로 승격시켜 준 자체가 봉기의 확산을 막기 위한 일시적인 조처였음을 깨달았다. 정부가 바라는 것은 봉기의 진압이지 봉기가 발생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이 무엇인지를 규명하여 피지배층의 요구를 적극 수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제 신분해방을 확실하게 달성하기 위해서도 결국은 정부타도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

 피지배층의 입장에서 볼 때, 정부의 기만적이고 미봉적인 대책과 더불어 또 하나의 불만 대상은 지방의 토호와 더불어 대지주의 성격을 지닌 사원이었다. 반민들의 사찰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는 고려시대의 불교가 왕실이나 귀족 중심의 종교로서 피지배층이 당하는 고통에 대한 관심이나 이를 구원하고자 하는 의욕이 부족했던 것도 원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농민을 수탈하는 정도에 있어서 지방관이나 토호 못지않는 사원의 지주적인 성격이 그들을 가장 괴롭혔다고 생각된다.

 고려시대의 사원은 왕실이나 귀족들의 개인 사찰적인 성격이 강한 것이 많았으며, 또 그들의 비호를 받아 많은 토지와 인구 그리고 소도 장악하고 있었다. 고려시대 이전의 通度寺의 寺領지배 상황을 기록했던≪通度寺 舍利袈裟事蹟略錄≫의 寺之四方山川裨補條에 의하면 사찰이 茶所를 소유하고 있었다.139) 이와 같은 사찰에 소속된 所는 비단 다소뿐만 아니라 사원에서 필요한 물품을 공납하는 다른 소도 있었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고려시대의 사원경제가 그 사회에서 생산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에서도 추측이 가능하다.140) 따라서 경제적으로 비대해지는 사원에 대한 피지배층의 괴리감은 국가가 그 곳에 제공하는 특혜와 더불어 더욱 커져갔다.

 그러면 일반 백성들의 사원에 대한 분노가 어떤 경로를 통해 축적되어 갔는지 2차 봉기 때 가장 피해가 심했던 弘慶院의 경우를 예로 들어 살펴보기로 하자.

① (현종은 姜民瞻과) 金猛을 別監使로 삼아 弘慶院 신축을 함께 관리하게 하였는데 모두들 공치사나 교만한 마음을 품지 않았다. 인부를 사역할 때는 농사철을 피하였으며 물자도 국가의 창고에서 꺼내지 않았다. 기와장이는 기와를 대고 나뭇군은 목재를 공급하였다. 톱질과 자귀질은 일없는 목수들을 모아서 시키고 괭이질·삽질은 놀고 있는 사람들이 달려와서 일하였다(崔忠,<奉先弘慶寺碣記>,≪朝鮮金石總覽≫上, 260∼262쪽;≪東文選≫권 64, 記).

② 이자겸이 홍경원을 수리하게 하였다. 僧正 資富와 知水州事 奉佑로 하여금 그 일을 주관하게 하였는데 그 때 주·현의 장정을 징발하여 그 폐해가 매우 컸다(≪高麗史≫권 98, 列傳 11, 高兆基).

③ 呵吒波拘神道場을 홍경원에, 般若道場을 選軍廳에 모두 27일간 설치케 했는데 묘청의 말을 좇아서였다(≪高麗史≫권 16, 世家 16, 인종 8년 8월 임자).

 사료 ①은 홍경원을 설립할 당시의 일을 적은 것으로, 국가는 사찰을 지으면서 국고금 없이 오직 백성들의 노동력에 의거하였다. 정부는 기와장이, 나뭇군, 목수들을 징발하였을 뿐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사원 건립에 필요한 물자도 담당하게 하였는데, 이렇게 하여 무려 5년간의 공사 끝에 완성하였다. 마찬가지 내용으로 사료 ②도 홍경원을 개수할 때에 주현의 장정을 징발하여 그 폐해가 매우 컸음을 나타내고 있다.

 국가의 강제노역에 의한 사원 건립은 일반 백성들에게 있어서 일차적으로는 정부나 지방관에 대한 원망으로 표현되겠지만, 또한 그들이 지은 후에 정부의 비호 아래 많은 賜田을 가지고 그 곳에 안주하는 승려들이나 사원이 지닌 성격 자체에도 불만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사원의 귀족적이고 지주적인 성격은 농민봉기가 발생했을 때 타도의 대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홍경원은 현종 때 창설된 후 계속해서 왕실과 문벌귀족들의 비호를 받고 있었는데, 따라서 稷山의 토호세력으로서 막강한 경제력을 행사했으리라 생각된다. 앞서 내용에서 반민들이 홍경원을 불태우고 승려들을 죽인 것으로 보아 이곳이 백성들을 수탈하여 원성의 대상이 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홍경원의 경우와 같이 명학소민의 표적이 되었던 덕산의 가야사에 대해서는 살필 수 있는 자료가 없으나, 원래 가야산 기슭은 사찰이 많았으며, 가야사는 그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풍수지리학상으로도 명당으로 유명했다고 한다.141) 따라서 가야사 또한 홍경원과 마찬가지로 많은 토지와 노비를 거느렸으며, 주변 주민들을 수탈하여 원성을 샀을 것은 뻔하다.

 이후 반민들은 牙州 등 충청도 전역을 공략하여 공주뿐 아니라 청주관내 군현이 모두 농민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오직 청주만이 남게 되었다. 이에 정부는 회유를 통해 난을 진압하려는 작전을 포기하고 본격적인 토벌을 감행하였다.142) 그 해 5월에는 宣旨使用別監을 보내어서 남적을 제압한 전공을 살펴 관군의 사기를 앙양시켰으며 또한 충순현을 삭제하였다. 정부는 손청·이광 등 망이 주위의 반민들을 진압하여 명학소민을 고립시킨 후143) 총력을 다하여 공격하였다. 관군의 대대적인 토벌작전에 밀려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된 망이 등은 항복을 요청하였다. 명종 7년 7월, 망이 등이 잡혀 淸州獄에 갇힘으로써 무려 1년 반이나 지속된 공주지역 농민·천민의 항쟁은 여기서 끝맺게 되었다.

138)≪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3월 정해.
139)<通度寺 舍利袈裟事蹟略錄>(≪通度寺志≫, 亞細亞文化社, 1979), 26쪽.
140) 고려시대 사원경제에 관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글들이 있다.

劉敎聖,<高麗 寺院經濟의 性格>(≪白性郁博士還曆紀念 佛敎學論文集≫, 1959).

李載昌,<麗代 寺院領擴大의 硏究>(≪佛敎學報≫2, 1964).

閔丙河,<高麗時代 佛敎界의 地位와 그 經濟>(≪成大史林≫1, 1965).

李炳熙,≪高麗後期 寺院經濟의 硏究≫(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2).
141) 가야사는 조선시대 말기에 명당을 탐낸 대원군이 이곳을 불태우고 그의 아버지 南延君의 묘지로 만들었다.
142) 당시 南賊處置兵馬使로서 청주에 주둔했던 정부군의 지휘자는 鄭世猷이고, 南路捉賊左道兵馬使로서 驪州지역에 머무르면서 李光을 사로잡은 사람은 梁翼京이다. 그리고 南賊制置右道兵馬使로서 예산방면으로 가서 孫淸을 죽인 사람은 李夫였으리라 보여진다. 반란민이 3파로 나누어 북쪽으로 진격하자, 정부군도 청주를 거점으로 3파로 나누어서 그들을 방어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143)≪高麗史≫권 19, 世家 19, 명종 7년 3월 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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