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신량역천 규범과 칭간칭척자
고려 이래 세습적으로 역을 부담해 오면서 사환권의 제약을 받았던 칭간 칭척자는 태종 말년에 이르러 중요한 신분상의 변화를 보게 되었다. 태종 12년(1412)에는 칭간칭척의 여손이 종량되고,300) 태종 16년에는 관아에서 역을 지던 칭간칭척자의 모녀·자매가 방역되고 있었다.301) 당시의 위정자가 이러한 조치를「免賤」으로 표현하고 있었던 데서도302) 확인할 수 있듯이 칭간칭척자들은 태종 말년에야 공식적으로 양인으로 취급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무렵부터 관리들이 곧잘 이들을 고려 이래의 신량역천이라 표현하고 있었던 점이다. 그러나「신량역천」은 조선 건국 초에야 비로소 국가가 인위적으로 설정한 신분규범이었고 그 첫 적용 대상자도 이들 세습적 천역자와 전혀 무관한 자들이었다.
신량역천이라는 규범은 良賤籍俱不明者·良賤未辨人·文籍不明者 등으로 불리던, 신분을 증빙할 만한 문서가 없었던 자(이하 문적불명자)에 대한 신분 처리 방안을 최종적으로 확정하는 과정에서 탄생되었다. 양인으로 판결을 낸다는 원칙이 수립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대에 걸쳐 역사되었다면 노비 로 판정한다는 유보조항 때문에 분쟁이 계속되었던 문적불명자에 대하여 태 조 6년(1397)에 왕은 “신량역천으로 결정하여 官司의 사령으로 정속시키라”는 단안을 내렸던 것이다.303)
문적불명자를 신량역천으로 하라는 판정의 표면적인 의미는 글뜻 그대로 신분은 양인으로 인정하되 신역은 천역을 지운다는 것이지만, 내면적으로는 노비 신분에서 해방시켜 주지만 완전한 양인으로는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을 표현한 것이다. 즉 이들에게「역천」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천역의 부과 자체 에 목적이 있었다기보다는 칭간칭척자와 같은 세습적 천역자들을 선례로 하여 양인이 지니는 사환권을 허락하지 않고자 했던 데 있었던 것이다. 태조가 신량역천이라는 판정을 내리면서 지정한 관사 사령이라는 역 자체가 반드시 천역이라 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실제로 이들에게 부과된 역은 역처가사재감 수군이라는 특이한 곳이기는 했지만 대표적인 양역인 군역이었던 것이다.304)
신량역천이 양인으로 인정되면서도 사환권이 유보되는 양인을 가리키는 규범으로 설정되게 되자 그 규범은 문적불명자 이외의 자에게도 확대 적용되었다. 문적불명자를 신량역천으로 판정하던 날과 같은 날에 종량이 결정된 관리와 자신 소유의 비 사이의 소생과 태종 원년에 종량된 노와 양녀 사이 의 소생이 그들이다.305)
태조 6년(1397)에서 태종 원년(1401)에 이르는 사이에 탄생되었던 신량역 천은 곧 그 구성원의 변동을 보게 되었다. 우선 노와 양녀 사이에 소생은 불과 4년 뒤인 태종 5년에 다시 천인으로 환원되어 신량역천에서 제외되게 되었다. 정부가 문적불명자와 관리의 비첩 소생을 사재감 수군에 충속시킨 조치는 신분적 흠을 지닌 이러한 자들을 다른 양인과 구별하여 특별 관리하기 위한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이 목적이 사재감 수군이라는 수단을 통하여 이루어졌으므로 이제 역천이라는 용어가 마땅치 않게 되었다. 그리하여 정부는 이후에 종량문호의 확장에 따라 새로이 양인이 되게 된 자들에 대해서는 신량역천이라는 판정 대신에 사재감 수군에 충속시킬 것을 지시하는 것으로 대체하였던 것이고 그들을「身良水軍」이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신량역천이라는 규범이 부적절하게 되고 그 규범이 적용된 자들이 해체되게 되었지만 정부는 이 무렵부터 칭간칭척자를 신량역천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면서도 이들을 고려 이래의 신량역천이라 표현하고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노비 아닌 자=양인이라는 등식이 이미 확립되어 있었던 때문이었다. 이러한 관념에서는 노비 아닌 자인 칭간칭척자는 고려 이래의 신량 인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들을 새삼스럽게 신량역천으로 지칭하기 시작한 것은 앞서의 문적불명자 등의 경우와는 반대로「역천」이지만 양인임을 강조한 데서「신량」역천이라 부르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앞서 태종 말년에 이들이 양인으로 공인되었음을 살펴 본 바 있지만 이 무렵부터 성격이 다른 칭간자와 칭척자를 나란히 병칭하기 시작한 것 역시 정부가 이들에 대한 신분적 처우를 바꾸려는 데서 비롯된 것이었다. 신량역천이라는 규범은 이제 양인이지만 현재 천한 역을 지고 있는 자를 가리키는 것으로 단순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종부위량법을 제정하여 종량의 문호를 대폭 넓히고 신분적 흠을 지닌 양인에게 일정한 제한을 두어 입사자격을 허용하여 나가던 태종은 동왕 15년 (1415)에 이르러 사재감 수군을 대신하여 흠있는 양인을 모아 놓는 補充軍이 라는 새로운 병종을 신설하였다. 이 보층군에는 일찍이 사재감 수군에 속하였던 자 이외에도 염간을 제외한 모든 칭간칭척자들을 입속 대상으로 하였다. 당시의 정부는 보충군에 입속시킬 칭간칭척자의 수를 9,000명으로 잡고 3정 1호의 편호 방식에 의해 입역시키도록 결정하였다. 칭간칭척자가 보충군 입역을 마치게 되면 서반의 隊長·隊副職을 받아 去官하고 정7품까지의 수직이 가능하게 되었던 것은 그들의 신분적 지위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었다. 칭간칭척자가 보층군에 입속하게 되면 자손은 또다시 보충군에 충속되지 않았으며 그렇다고 해서 조상의 역을 다시 계승하게 되어 있지도 않았다.
칭간칭척자 중에는 보충군의 입속대상에서 제외된 염간 이외에도 진척처 럼 그대로 남아 있던 칭간칭척자가 없지 않았다.306) 그러나 칭간칭척자의 보충군 녹적이 계속 추진되었고 보충군 설치 이전에 보이던 칭간칭척자들이 자취를 감춘 것으로 미루어 보면 상당수가 여기에 입속하여 일반 양인화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이후 정부는 기존의 칭간칭척자와 전혀 관련이 없는 잡색역 부담자들을 새로이 간이라 명명하고 있었다. 이는 칭간칭척자가 이미 신분적 특이자가 아니라 단순히 이색적인 신역을 부담하는 자로 인식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간이라 불리게 된 자 중에는 生鮮干의 경우처럼 심지어 천인까지도 끼어 있게 되었다.
이 때 새로운 유형의 칭간자가 출현한 경위를 보면, 첫째 양수척과 같은 달탄 계통의 이민족 출신으로 司饔房에 소속되어 매를 바치던 時波赤와 낙농제품을 바치던 酥油赤가 각각 生鷹干, 酥油干으로 명명되었던 것처럼 종래 의 칭호가 간으로 대체된 경우가 있다. 다음으로는 고려 이래로 목장에서 우 마를 사육하던 목자를 牧子干이라 부르기 시작한 것처럼 종래의 명칭에 간 이 덧붙여진 경우가 있다. 전혀 새로운 명칭을 부여한 예도 있었다. 한강변 에 거주하는 어부에게 생선을 진상하는 의무를 지우면서 생선간이라 한 것이나 徒刑을 받은 자를 庭燎干이라 명명한 것을 들 수 있다.307)
이처럼「간」이 단순히 이색적인 역을 지는 자를 가리키는 칭호로 변모되어 가다가 마침내 칭호 자체가 사라지게 되었다. 세조대에 이르면 기존의 칭간칭척자에 대하여 신분적 차별을 보이지 않는「夫」라는 칭호를 사용하여 염간→염부, 진척→진부, 해척→어부, 수참간→수부, 생선간→어부의 경우처럼「○夫」라 호칭하든지, 양역임을 보이는「軍」을 사용하여 烽火干→烽燧 軍, 守護軍→看守軍의 경우처럼「○軍」으로 부르든지 아니면 목자간→목자처럼「간」이라는 칭호를 삭제하든지 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종전의 칭간 칭척자들은 일반 잡색역 부담자와 더불어 군역을 부담하지 않는 자를 범칭 하는 雜類로 분류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칭간칭척자마저 대부분 일반 양인화되어 가자 정부는 양인 내의 신분적 하자가 있는 자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던 신량역천의 용어는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양인 중에는 여전히 염간이나 역리와 같은 세습적 천 역자가 남아 있었으나 정부는 더 이상 이들을 신량역천이라 명명하지 않았 으며 이들의 신역도 사회적으로 천시되기는 하였어도 법제적으로는 엄연한 양인의 역, 즉 양역으로 간주되었다. 이리하여 신량역천이라는 용어는 세종 초년을 끝으로 사료에서 자취를 감추어 버렸던 것이다. 다만 수군의 경우처 럼 고역이어서 누구나가 기피하는 역의 부담자를 확보하기 위해 국가가 강제적으로 그 역을 세습시키고 이에 따라 더욱 그 역이 천시되고 기피되는 악순환과정에서 고정되어버린 부류, 즉 현실상의 신량역천이라고 간주할 수 있는 부류가 형성되어 가고 있었던 점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308)
300) | ≪太宗實錄≫권 26, 태종 13년 8월 병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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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1) | ≪太宗實錄≫권 31, 태종 16년 5월 신해. |
302) | ≪世宗實錄≫권 3, 세종 원년 4월 무자. |
303) | ≪太祖實錄≫권 13, 태조 7년 4월 경진. |
304) | 당시에 사재감 수군에 노비를 충속시켰다가 노비를 군에 충속시키는 것은 곤란하다는 이유는 그 명칭을 轉運奴로 바꾼 바 있음은 앞에서 본 대로이다. |
305) | ≪太宗實錄≫권 2, 태종 원년 정월 갑술·권 27, 태종 14년 정월 기묘. |
306) | 태종 무렵 설치된 것으로 보이는 鐵干은 보충군 설치 후에도 남아 있었으나 세종 12년에 선공감이나 군기감에 일정량의 철을 납부하던 의무가 폐지되면서 군역에 충속되었다. |
307) | 이외에도 從父爲良法이 시행되던 시기에 종량되었던 평민과 공사비와의 소생을 營繕干이라 명명한 경우가 있고 세종 27년(1445), 대대적으로 位田을 혁파할 때 유일하게 나타나는 宗廟干·迎曙亭干도 이 경우에 해당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
308) | 李載龒, <朝鮮前期의 水軍>(≪韓國史硏究≫5, 1970;≪朝鮮初期 社會構造硏究≫, 一潮閣. 198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