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작업조건
노임 못지않게 작업조건도 임노동자에게는 중요하였다. 임노동자들이 노동을 원만히 수행하고 삶의 터전으로서 일터에 정착하기 위하여는 작업조건이 양호해야 했다. 고용주로서도 일의 능률을 올리기 위해서는 인부들이 불편없이 작업조건을 개선해 주어야 했다.
우선 임노동제하에서의 인부의 작업시간은 日照時間에 한정되고 있었다. 물론 부역제하에서도 작업시간은 원칙적으로 일조시간에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러나 부역꾼들은 악천후 속에서도 작업을 강요당하고 있었고, 때로는 야간에도 횃불을 걸고 작업을 강행해야만 했다. 임노동자들도 야간작업을 하지만, 그들은 부역꾼들과 달리 무상이 아니라 특별한 대가를 따로 받았다. 작업의 강도가 높아지면 임노동자의 노임 액수도 그에 따라 늘어나고 있었다.
다음, 인부들이 작업장에서 사용하는 작업도구는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개 작업장에서 지급되었다. 이에 대하여 종래 부역꾼들은 작업기간중에 소모되는 식량과 함께 작업도구를 스스로 지참하는 것이 관례였다. 정조 18년(1794) 수원부 화성축성공사에서 보면 작업에 쓰일 각종 도구를 관부에서 마련하고 있다. 이 때 관부는 곡괭이·괭이·삽·가래 등의 작업도구를 사상 등에게서 구매하고 있었다. 임노동하는 인부들은 장비를 지참하지 않고 맨 몸으로 작업장에 출입하였다. 인부들은 생산도구를 비롯한 일체의 생산수단으로부터 해방된 존재로서의 자유노동자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모습은 민간이 경영하는 금광에서도 엿보이는데, 여기에서도 작업도구들이 인부들이 사용하기 편하게 개선되기도 하고 새로운 도구들이 도입되기도 하였다. 당시 광산에서 쓰인 도구로는 곡괭이·쇄가래·정·망치 등과 더불어 유형소차가 주목되고 있다. 유형소차는 18세기 중엽 새로 도입된 운반용구로서 운반능력을 높여 주었다. 괭이와 가래도 광산에서의 작업에 편하게 개조된 것이 공급되었다.0348) 이러한 작업도구들은 각 광산에 계속 존치되고, 광산을 찾아온 인부들이 이용하게 했다.
작업장의 설비도 부역제하에서보다 개선되고 있다. 먼저 대기소나 숙소로서의 기능을 하는 假家가 조성되고, 숙식에 필요한 시설이 마련되고 있었다. 그러한 설비는 관부의 작업장에서는 관부가, 민간의 작업장에서는 민간 고용주가 마련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때로는 자재를 공급받아 인부들이 가가를 직접 만들기도 하였지만, 이 때에도 인부들은 노동력만을 제공하였다.
또 작업장에는 醫官이 파견되고 약품이 공급되기도 하였다. 이는 건강한 인부의 확보를 위해서도 불가피하였는데, 정조 9년(1785)에 편찬된≪典律通補≫에서는 이를 법제적으로 규정하고 있다.0349)
인부들은 작업환경을 안전하고 편하게 하고자 환경의 개선을 요구하기도 하였다. 이같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불만을 품고 돌아가버리든가, 집단적으로 소요를 일으켰다. 그만큼 의식이 성장하고 있었다. 종래 부역노동에 동원되던 농민들은 봉건적 압제에 거의 무조건적으로 순응하였지만, 이제 그들은 토지에의 긴박을 강요한 봉건지배층의 명령을 과감히 거부하고 농토에서 이탈한 유민들이 되었기 때문에 삶의 환경을 스스로 개선해 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분위기는 이 시기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었기에 일부 위정자들은 몹시 두려워했고, 따라서 당시 인부들의 작업환경은 종래 부역꾼들의 그것에 비해 크게 개선되고 있었다.
한편 관부의 작업 같은 데서는 인부들을 지휘·통제하기 위해 감독기구가 있었다. 보통 대규모의 국가적인 토목공사가 시행될 때에는 都監이 설치된다.0350) 도감에는 도제조 이하 여러 관원이 있고, 그 밑에 실제로 인부들을 직접 지휘하는 하급관리로서 부장·비장 등이 있었는데, 부장·비장 등은 군인 출신이거나 강건한 자로서 인부들을 못살게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작업의 능률을 올린다거나 작업장의 기강을 잡는다고 하면서 강권을 행사하고, 때로는 노임을 감하기도 하여 부장·비장 등은 인부들과 수시로 충돌을 일으켰다. 그런데 임노동제하에서의 인부들은 종래 부역꾼들과 달리 순종적이지 않았다. 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의 노동력만이 생존의 토대인 자유로운 노동자였으므로 그들에게 주어진 작업 환경이나 작업의 강도 등 노동조건이 불리하다고 판단되면 그 어느 때라도 떠날 수 있었고, 실제 그렇게 행동하였다. 보다 좋은 조건의 일터를 찾으면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억압과 구속이 덜한 곳을 찾게 되니, 광산과 같은 곳이 그러한 곳이었다.
임노동자들이 어떠한 견제도 없이 자신들의 노동력을 자유롭게 상품화할 수 있는 지름길은 광산촌이나 수공업촌에 가서 고용되는 것이었다. 광산촌이나 그에 인접한 수공업촌은 대개 깊은 산간마을이어서 봉건적 억압이 덜 미치고 있었고, 또 그러한 곳에서의 작업장은 부상대고 등 개인이 경영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용관계가 비교적 경제적으로 수립될 수 있었다.0351) 그리하여 조선 후기 각지의 광산에는 농촌에서 유리된 무전농민을 비롯하여 신분제의 질곡에서 허덕이다가 도망친 노비 등 유민들이 임노동의 길을 찾아 무리를 지어 모여들었다.0352)
그러나 유민들이 노동의 기회를 확보하고 전업적 노동자로서 자리를 굳혀 갔다고 하여도, 광산이나 수공업촌에서 잡역부로 고용되어 생계를 유지해야 하는 그들의 생활처지는 매우 불안정하고 열악하였다. 황막한 광산촌에 내던져진 광부들은 폐광이 되면 이곳 저곳으로 돌아다니면서 스산한 환경 속에서 굶주림에 시달려야 했다. 물주인 富商大賈와 경제적 고용관계를 맺고 노동한다고 하지만, 약소한 노임만 획득할 수 있을 뿐 생산물은 모두 물주가 차지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생산물의 분배에는 참여할 수 없었다.0353) 더구나 거칠고 힘든 노동 활동 속에서 고된 상황을 잊기 위해 주색과 도박에 빠지다 보니, 약소한 노임마저 잃어버리게 되고, 그리하여 빈궁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에 그들은 자신들의 불만을 토로하고, 자기들을 빈궁과 기아로 몰아넣은 당대의 사회현실을 부정하였으며, 나아가 최소한의 생존을 위해 당대의 지배체제에 항거하였다. 항거의 대상은 그들을 고향에서 떠나게 한 양반관료·토호, 그리고 광산·수공업장에서 그들을 착취하고 있던 부상대고 나아가 당시 정치를 이끌고 있던 위정자들이었다. 순조 11년(1811) 洪景來가 주동이 된 사회변혁운동은 그들의 의사결집으로서, 농민뿐 아니라 광부·수공업자·이속 등이 대거 참가하고 있었다. 특히 운동의 초기에는 무전농민들인 광부들이 다수 참여하여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0354) 그리고 관찬기록에서도 한결같이 광부들의 난으로 규정하고 있다.0355)
요컨대 18세기를 전후한 조선사회에서는 토지소유구조의 모순, 상품화폐경제의 농촌침투, 봉건적 수탈과 억압 등으로 인해 극소수 농민들이 경영형부농으로 성장하고, 대지주의 토지집적이 심화되는 한편으로 대다수 농민들의 빈궁화가 촉진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전개된 농민층 분해는 궁극적으로 다수의 농민을 농토에서 유리시켜 임노동 자원을 생성시켰다. 그런가 하면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은 일부 부상대고들에게 상업자본을 집적시켰다. 그들은 자본을 투하하여 상업·수공업·광업 등에서 새로운 생산관계를 조성하였다. 생산수단을 확보한 자본가의 등장과 자기의 노동력밖에 생계수단이 없는 노동자의 발생은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생에서 필수적 전제조건이었다. 이러한 상황의 조짐이 조선 후기사회에서 보여지고 있었는데, 특히 임노동자의 출현은 그들의 노임이나 작업조건이 아직 미흡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봉건적 사회질서에 대신할 새로운 경제관계의 출현을 예고하는 것이었다. 그들의 노동력은 어떠한 생산수단이나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지 않은 자유로운 것이기에 더욱 그러하였다.
<崔完基>