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비제의 변화
(1) 제도적 변화
제도적 측면에서 19세기 노비제의 상태에 영향을 끼친 주요 변화는 內寺奴婢 해방, 免賤·從良의 기회 확대, 노비신분세습법의 변경과 폐지로 요약될 수 있다.
순조 원년(1801) 정월에 단행된 內寺奴婢 해방은 16세기 이래 진행되어 온 공노비제도의 동요 현상을 일정하게 반영한 것이지만, 이는 1894년 노비제 폐지로 마무리되는 19세기 노비제 해체의 역사의 단초를 연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사건이었다. 이 때 內奴婢 36,974명과 寺奴婢(各司奴婢) 29,093명 등 도합 66,067명의 내시노비가 해방되었다.0446) 내시노비가 공노비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조선 후기의 실정을 감안하면 내시노비 혁파는 사실상 공노비의 폐지를 의미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0447) 이 조치에서 제외된 各官奴婢도 지방 관아의 供役을 담당하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노비조차 확보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수가 크게 줄어 들고 있었다.0448) 내시노비 해방의 결과 19세기 노비제는 내부 구성의 면에서 이전 시기의 노비제와는 중요한 차이를 나타내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 들면서 노비의 면천·종량 기회는 조선 전기에 비해 크게 늘어났다. 면천·종량의 기회는 혈통(대체로 父系)에 따른 귀속적 성격의 從良路와 납속이나 공로 등에 의한 성취적 성격의 종량로로 대별된다. 귀속적 성격의 종량로는 補充隊를 통한 종량이 대표적이다. 보충대를 통한 천첩자녀의 종량은 임진왜란 이후에는 크게 문란해져서 형식적 절차에 지나지 않게 되었고, 특히 去官 제도는 유명무실하게 되어 반드시 거관하지 않아도 손쉽게 종량될 수 있었다.0449) 또한 같은 범주지만 더 쉽게 종량될 수 있었던 왕실의 천첩자녀의 경우에도 조선 후기에 적용 대상이 더욱 확대되었다.≪경국대전≫에서 일부 宗親(緦麻以上親)과 外戚(小功以上親)의 천첩자녀에게 贖身없이 종량하도록 하였던 것을,≪속대전≫에서는 先王의 방계 후손은 6대 이상(無贖身) 또는 7대에서 9대까지(代口贖身) 외손은 6대까지(代口贖身) 확대하였고, 다시≪대전통편≫에서는 嫡孫의 경우 限代를 철폐하고 庶孫은 9대까지 그리고 외손은 7대까지 공사천을 막론하고 대구속신토록 확대하였다. 한편 사족 집안의 경우에도≪속대전≫에서 承蔭者가 공천을 취하여 낳은 천첩자녀 또는 士族朝官의 공천 소생 承重者에게 대구속신의 길을 열어주었다.0450)
이와 같이 귀속적 성격의 종량로를 통한 면천·종량의 기회가 조선 후기에 들어 확대되고 있었던 것과 함께 世代內 사회이동을 가능케 하는 성취적 성격의 종량로들도 조선 전기의 엄격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완화되었다. 임진왜란을 계기로 크게 열린 군공 또는 납속에 의한 면천·종량의 길이 그 대표적 유형이다. 그 외에 양인 모칭자 중 과거급제자에 관한 대구속신,0451) 親騎衛·別武士 등 특수 군종에 입속한 노비 중 武才가 뛰어난 자에 대한 면천,0452) 捕盜·陳告 등 특별한 공로를 세운 노비에 대한 포상 차원의 면천 등이 허용되었다. 이 가운데 특히 납속면천은 경제적 부를 축적한 노비들에게 신분 변동의 가능성을 열어 줌으로써 조선 후기 동안 진행된 奴婢戶 격감의 한 요인으로 작용하였다.0453)
현종 10년(1669)에 처음 시행되어 영조 7년(1731)에 확정된 ‘奴良妻所生從母役法’은 조선 후기 노비제의 심대한 변화를 이끈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본래 15세기 중엽에 확립된 조선의 노비신분세습법인 從母/從父法은 고려의 ‘一賤則賤’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서 노비소유의 안정과 확대에 이해관심이 있는 노비소유자들에게는 크게 유리한 성격의 것이었지만, 거꾸로 노비의 입장에서는 世代間 사회이동의 가능성을 봉쇄함으로써 ‘有入無出’의 신분적 유폐 현상을 초래하는 주요인이 되었다. 종모/종부법은 良賤相婚의 경우에도 그 소생을 모두 노비로 만드는 법이므로 노비소유자들은 특히 奴의 경우 良女와 혼인하도록 강제함으로써 노비소유의 확대를 획책하였다.0454) 실제로 16·17세기 울산 지역의 경우 노비와 양인·양녀 간의 혼인이 널리 행해졌고, 이를 통해 양인 인구가 침식되어 가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0455) 이 법에 의해 노비 인구가 늘어날수록 그것과는 길항 관계에 있는 양인 인구의 위축 현상 곧 良少賤多 현상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노비신분세습법은 노와 양녀 사이에 출생한 자녀가 종래 ‘從父役’의 규정을 받아 노비로 되던 것을 막고 이들에게도 ‘從母役’의 규정을 적용하여 양인이 되도록 함으로써 기왕의 노비신분세습법에 일대 변형을 가한 것이었다. 아울러 이 법에 의해 종모/종부법에서 ‘종부’를 제거함으로써 조선의 노비신분세습법은 從母法으로서의 완전한 의미를 비로소 획득하게 되었다. 또한 노와 양녀 간의 혼인을 통한 노비 인구의 확대재생산이 불가능하게 되었고 노비의 세대간 신분이동을 차단했던 엄격함도 완화되었다.
‘노양처소생’에 대한 從母從良의 시행은 특히 조선 후기 동안 진행된 奴婢戶口 감소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추정된다. 공노비 감소에 미친 영향은 예컨대 영조 37년(1761) 12월 강원도 관찰사 金孝大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을 보면 그러한 사정을 미루어 알 수 있다.
辛亥(영조 7년) 이후 奴良妻所生을 어미의 役에 따라 양인이 되도록 허락한 후 各驛과 各邑의 노비가 날로 점점 줄어들어 이제는 모양을 이룰 수 없다.0456)
사노비에 미친 영향에 관해서는 茶山 丁若鏞(1762∼1836)이 종모법 시행 이후 19세기 사족층의 보유 노비가 급격히 감소되는 현상에 대해 우려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한 것에서 대개 짐작할 수 있다.
이로부터 상층은 약해지고 하층은 강해졌으며 기강이 해이해지고 民志가 흩어져 제어되지 않는다. 드러나서 뚜렷해진 것으로써 말해 본다면, 萬曆 壬辰之難 때 남쪽 지방에서 倡義한 집은 모두 家僮 數百으로 卒伍를 편성할 수 있었는데 嘉慶 壬申之難 때는 故家名族이 서로 일을 의론하였으나 한 집에 家僮 하나 얻기도 어려웠다. 이 한 가지 일을 두고 보더라도 大勢가 완전히 변했음을 알 수 있다. 국가가 의지하는 바는 士族인데 無權失勢함이 이와 같으니, 만약 위급한 때에 小民들이 모여들어 亂을 일으킨다면 누가 능히 그것을 막을 수 있겠는가. 이로써 보건대 노비의 법은 좋게 변한 것이 아니다.0457)
즉 임진왜란 때는 의병장들이 家奴 수백 명을 부대원으로 동원할 수 있었지만, 종모법 시행 이후 노비소유가 위축되어 임신년(1812) 洪景來의 亂 때는 ‘一家一僮’을 내기 어려울 정도로 대세가 ‘全變’하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중대한 변형을 경험한 노비신분세습법은 고종 23년(1886)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되었다. 내시노비 해방의 뜻을 이어받아 노비의 世役을 금한다는 취지를 담은 傳敎에 의거하여 형조에서 마련한 節目에 의해 노비의 신분세습은 법적으로 폐지되었다.0458)
0446) | ≪純祖實錄≫2, 순조 원년 정월 을사. 內寺奴婢의 해방은 奴婢案을 소각하는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다. 內奴婢 가운데 일부 누락되는 사례는 있었다(≪고종실록≫, 고종 원년 7월 30일). 한편 寺奴婢의 경우 이 조치 이후에도 籍沒 등에 의해 발생하는 형벌노비 중 京中 거주자는 刑曹에 소속시켜 사역하도록 조치하였으므로(≪승정원일기≫, 순조 원년 9월 20일) 제도적인 면에서 완벽한 폐지를 달성한 것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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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47) | 全炯澤,≪朝鮮後期奴婢身分硏究≫(一潮閣, 1989), 228쪽. |
0448) | 全炯澤, 위의 책, 255쪽. |
0449) | 平木實,≪朝鮮後期奴婢制硏究≫(知識産業社, 1982), 184∼185쪽 참조. |
0450) | 여기서 承蔭者는 ‘東西班三品正職之子與孫’과 ‘曾經吏兵曹司諫院司憲府弘文館都摠府宣傳官之子’에 해당된다. 二品以上의 有子女賤妾은≪經國大典≫에 贖身이 가능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
0451) | 平木實, 위의 책, 179쪽. |
0452) | 全炯澤, 위의 책, 221쪽. |
0453) | 全炯澤,<한국 노비의 존재양태>(≪奴婢·奴隷·農奴-比較史的 檢討-≫, 역사학회 특별심포지움, 1996. 8. 31.), 10∼11쪽. |
0454) | 平木實, 위의 책, 143쪽. |
0455) | 韓榮國,<朝鮮中葉의 奴婢結婚樣態>(≪歷史學報≫75·76·77, 1977·1978). |
0456) | 全炯澤, 앞의 책, 252쪽 참조. |
0457) | 丁若鏞,≪牧民心書≫禮典 辨等. |
0458) | ≪고종실록≫23, 고종 23년 1월 2일;3월 11일. 이 절목에는 救活奴婢·自賣奴婢·世傳奴婢의 世役 금지, 救活奴婢·自賣奴婢 소생의 매매 금지, 負債에 의한 壓良爲賤 금지 등이 포함되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