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조선 시대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Ⅲ. 19세기의 민중운동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2) 항쟁의 과정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1. 신분제의 이완과 민중사회의 성장
          • 1) 사족지배구조의 정착과 신분구조의 변화
          • 2) 17세기 위기 이후 대민 지배정책의 전환
            • (1) 국가의 대민 지배방식의 전환과 ‘여민휴식’정책의 철회
            • (2) 공동납체제로의 전환과 18∼19세기 호적 운영의 변화
          • 3) 사족지배질서의 동요와 민중의 성장
        • 2.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공동체 질서와 민중
          • 2) 18세기 향촌공동체의 변화와 민중조직의 활성화
            • (1) 면리제의 강화와 민
            • (2) 동계의 변화와 분동
            • (3) 민중조직의 활성화
          • 3) 19세기 민중의 사회적 결속
            • (1) 향회의 활용
            • (2) 민중조직과 농민항쟁
        • 3. 민중운동의 사상적 기반
          • 1) 성리학에 대한 사상적 도전
            • (1) 성리학의 교조화
            • (2) 민중사상의 확산
          • 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 (2) 민중사상 전파의 주체
            • (3) 정부의 대응책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과제
          • 1) 민중세계의 각성
          • 2) 유대관계의 강화
          • 3) 향권의 추이
          • 4) 사회세력의 동향
        • 2. 유민과 명화적
          • 1) 유민
            • (1) 유민발생의 배경
            • (2) 유민의 실태와 유입처
            • (3) 정부의 유민대책
          • 2) 명화적
            • (1) 명화적 발생의 배경과 조직체계
            • (2) 활동양상과 그 성격
            • (3) 정부의 대책
        • 3. 여러 지역의 항쟁과 ‘무신란’
          • 1) 18세기 초 민중의 동향과 변산군도
          • 2) 무신란의 발단과 전개
            • (1) 18세기 초 정치정세와 ‘무신당’의 결성
            • (2) 무신당의 반정계획과 지방토호·녹림당의 가세
            • (3) 무신란의 전개와 향촌사회의 동향
            • (4) 무신란의 참가계층과 그 성격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1. 서북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특성과 항쟁의 배경
            • (1) 서북지방의 사회·경제적 특성
            • (2) 매향과 향권의 동향
            • (3) 중앙권력의 구조적 수탈
          • 2) 항쟁의 과정
            •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 (2) 홍경래 난의 전개과정
          • 3) 항쟁의 결과
            • (1) 홍경래 난 전후 향촌지배세력의 변동
            • (2) 반봉기군 ‘의병’의 향권 장악
            • (3) 서북민항쟁의 역사적 의의
        • 2. 삼남지방의 민중항쟁
          • 1) 사회경제적 배경과 정치적 여건
            • (1) 사회경제적 배경
            • (2) 정치적 여건과 지방사회의 운영
          • 2) 항쟁의 과정과 양상
            • (1) 항쟁의 발생 지역
            • (2) 항쟁의 직접적 계기
            • (3) 항쟁의 전개과정
            • (4) 항쟁의 참가층과 주도층
            • (5) 항쟁조직
            • (6) 요구조건
            • (7) 공격대상
          • 3) 정부의 대책과 항쟁의 의미
            • (1) 농민항쟁에 대한 정부의 대응
            • (2) 삼정에 대한 대책
            • (3) 이정책에 대한 반대 논의와 저항
            • (4) 농민항쟁의 평가
        • 3. 변란의 추이와 성격
          • 1) 변란과 민란
          • 2) 변란발생의 배경
            • (1) 사회적 모순의 심화와 ‘저항적 지식인’의 활동
            • (2) ‘양이’의 침공과 ‘이단사상’의 만연
          • 3) 변란의 추이
            • (1) 19세기 전반의 변란
            • (2) 해서, 영남세력의 변란
            • (3) 광양란
            • (4) 이필제란
            • (5) 기타
          • 4) 변란의 성격
            • (1) 변란의 조직과 운동구조
            • (2) 변란의 이념
            • (3) 변란과 19세기 후반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항쟁의 과정

(1) 서북민의 저항과 홍경래 난의 발발

 평안도지역에서는 18세기 중엽에 경제적 성장에 기초한 신향층의 대두로 인하여 기존의 향촌지배질서는 동요하고 있었다. 그러나 향권은 原鄕이라 불리는 기존의 향인층에서 신향층에게로 옮겨가지는 못하였고, 오히려 신향층을 이루는 모집단인 부민층이 수령권에 의한 주요한 수탈 대상으로 지목되고 있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수령권과 그에 기생하는 일부 원향층에 의해 주도되는 향촌지배질서는 부민층의 지속적 성장을 가로막았다. 이렇게 본다면, 부세수탈을 자행하는 수령권과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던 기존의 향촌지배질서에 대하여 부민층을 중심으로 한 서북민이 저항한 것은 필연적이었다. 그리고 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수령권에 모아질 수밖에 없었다. “官家는 부민들이 원망하는 곳이다”506)라 함은 부민층 일반이 관가 즉 수령권에 대하여 심각한 불만을 갖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표현이었다. 따라서 18세기 중엽 이후 수령권에 대한 여러 형태의 저항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몇몇 사례들을 통해서 그 구체적 양상들을 살펴보기로 하자.

 정조 14년(1790) 4월 평안도관찰사 심이지의 장계에 따르면, 渭原의 읍민이 관아의 뜰에서 칼을 빼들었다는 사실을 들어 막대한 변괴라고 보고하였다. 그리고 일이 여기에 이른 데에는 이유가 없지 않다라고 하면서 전위원군수 柳增萬의 위법 사례를 지적하였다. 즉 천여 결의 田摠에 대해 200결의 俵災를 내려 주었는데도 把束조차도 민에 나누어 주지 않은 채 防役이라 하여 모두 사사로이 써버렸고, 아래 사람들의 급료를 엄하게 깎아 관용에 보탰고, 倉監을 차출하면서 많은 賂錢을 받았기 때문에 그 해가 환곡을 받는 백성들에게 미쳤다는 등의 일을 지적하였다.507) 즉 田政이나 賣鄕 등으로 인한 수령권의 대민 침탈 또는 관속에 대한 억압 등이 위원 읍민의 저항을 초래하게 되었던 것이다.

 정조 19년(1795)에는 楚山府 阿耳鎭에서 鎭卒인 崔奉德이 僉使 李信馨을 구타한 일이 발생하였다. 즉 최봉덕은 本城의 里長이었는데 그 여동생이 淫奔의 죄를 지어 鎭婢가 되었다가 도망가자 첨사가 그에게 잡아올 것을 명하였다. 그러나 응하지 않자 이에 곤장을 치고 가두려 하였으나 곤장을 빼앗아 부러뜨리고 칼을 뽑고 몽둥이를 휘둘러 첨사를 구타하고 도망쳤지만, 곧 잡혀서 효수된 일이 있었다. 이는 개인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었으나 영조 50년(1774) 會寧府民이 아버지가 부사 趙圭鎭에게 매맞아 죽었다고 하여 복수하겠다고 부사에게 덤벼든 일과 함께 “민이 관을 범했다(以民犯官)”는 차원에서 논의되었다.508) 이는 그만큼 수령권에 대한 저항이 다양하게 전개되고 있었음을 뜻한다. 이런 모든 것들은 수령권의 위상을 상대적으로 격하시키는 사건들이었다.

 그런 중에서 정조 21년 价川郡에서 있었던 鄕任과 武任 간의 싸움은 향권의 동향과 관련하여 주요한 의미를 갖는 사건이었다. 평안도안핵어사 呂駿永의 장계에 따르면 사건의 경과는 다음과 같다.509) 4월에 장교 金晦恒이 군수와 함께 外倉에 나갔다가 본읍의 軍器에 관한 일로 推考의 명을 받아 황송하게 여기면서 관아에 돌아왔는데 鄕廳의 임원들이 나와 맞이하지 않았다. 김회항이 이로 인하여 향임들을 비난하였다. 그러자 향임들은 “양반이 상한에게서 욕을 당했다”고 관에 고하였고, 이에 김회항은 “너희들이 비록 양반이라 칭하나 향임자손에 지나지 않는다. 나는 비록 武列에 있으나 본시 사족의 소생이니 어찌 凌踏이라 하겠는가”라고 하여 상호 쟁변을 벌임으로써 鄕·武 간에 쟁단이 일어났다. 이에 향임측에서는 玄在黙 등의 주장하에 玄在欽이 통문을 돌려 향인 800여 인을 이끌고 綸音을 받들고 와서 향회를 열었다. 향인들은 거의 玄哥 세력이었다. 그 향회의 목적은 향인들의 세력을 과시함으로써 김회항을 관에 일러 죽이고자 하는데 있었다. 그러자 장교배들이 윤음은 事體가 지극히 敬謹하니 무단히 받들고 올 수 없다고 하여 빼앗아서 東軒에 奉安하였다. 그러자 향인배들이 관정에 돌입하여 김회항을 죽일 기세로 덤벼들었다. 관가에서 이를 물리치자 김회항의 집을 부숴버리고 장교배들을 구타하였다. 그리고 나아가 營門에 呈訴하여 군수를 誣告하였다. 6월 기묘에510) 올린 평안도관찰사 朴宗甲의 馳啓에서 현재묵이 一邑의 巨猾로서 예전의 직함을 믿고 官庭에 作拏하고 民家를 사사로이 부수며 土主를 誣辱하였다고 하여 엄하게 처벌할 것을 청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呂駿永이 안핵어사로 파견되기에 이르렀다.

 현재묵은 일찍이 登科하고 典籍511), 外臺(都事) 등을 거치는 등 관서지방에서는 두드러진 인물이었다. 따라서 “朝官의 세력을 믿고 鄕議에 간섭하고 주장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512)라고 하듯이, 중앙권력과의 연고를 배경으로 향권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일종의 토호였다. 그리고 이들 현가 세력을 중심으로 鄕案入錄을 허락하여 뇌물을 받는 등 평일의 기세가 대단하였다.513) 안핵어사도 현재묵에 대해 “조관이라 칭하면서 향권을 손에 쥐고 몰래 일을 도모함이 극히 낭자하다”514)고 하였듯이 현가들은 곧 원향들로서 향권을 장악하고서 매향 등을 주도하는 등 각종 비리를 통하여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따라서 이 鄕武爭端은 장교배들이 수령권에 접근하여 그들의 기득권을 침해하자 이에 반발하여 일어난 것이었다.

 그 쟁단의 성격은 여준영이 “처음의 뜻은 수령을 죽이고자 한 데서 나왔는데 마침내는 향전으로 돌아간 듯하다,”515)고 하였듯이, 향전의 성격보다는 오히려 수령권에 대한 저항으로서의 성격이 앞서 있었다. 정조 14년(1790) 정주 매향사건의 경우라면 결탁했을 두 세력 즉 수령권과 원향세력이 여기서는 대립적으로 나타났다. 이는 수령권을 매개로 한 중앙권력의 수탈이 심화됨에 따라 토착적인 현재묵 세력의 이해와 충돌하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결과는 현재묵이 絶島에 刑配됨으로써 중앙권력의 비호 아래에 있던 수령권의 승리로 끝났다. 현재묵은 스스로 분을 참지 못하여 곧 죽고 말았다.

 이는 수령권 대 원향층 간의 대립의 한 사례이며 수령권이 향촌사회의 어떠한 재지세력보다 우위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원향층마저 배제할 정도로 수령권의 자의적 수탈이 행해지고 있었음도 보여준다. 이는 곧 수령권에 대한 향촌 사회세력들의 종속이란 결과를 이끌었겠지만, 역으로 수령권에 대한 저항이 있을 때 수령권은 향촌의 모든 세력들로부터 고립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대립은 평안도의 인접 지역인 함경도의 단천·북청에서 1808년에, 황해도의 곡산에서 1811년에 각각 나타나고 있었다. 단천·북청의 작변과 곡산지방 농민항쟁은 홍경래 난과 시기적으로 이어지며 사건의 전개에서도 유사한 세력배치를 보인다.

 단천과 북청의 경우는 양자 모두 그 주도세력은 다르지만 수령권의 향권침탈에 대한 저항이라는 공통점을 지닌다.516) 먼저 단천의 경우를 보면, 순조 8년(1808) 정월 3일에 본읍의 노소 향인들이 향청에 전례대로 모여서 民事를 논의하는데 거기서 지난번에 허물이 많았다고 하여 좌수 沈趾源을 몰아냈다. 그러자 좌수의 편을 들어 수백의 향인이 몰려들어 다툼이 일어났고 公堂에 올라가 부사 金錫衡을 몰아내기까지 하였다. 부사는 처음에는 書室에 숨어있다가 다시 將廳으로 도망하여 5일 동안이나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그 후 부사는 향전이라 하여 이를 주동한 金亨大 등을 着枷하여 嚴囚하였다. 이는 단천부사 김석형이 향권을 천단하고자 향회를 구실로 좌수를 몰아내었고 그러자 기존의 향인층이 이에 반발하여 일으킨 사건이었다. 역시 수령권 대 향인층 간의 대립의 한 양상이었다.

 그런데 6월 17일 함경도관찰사 曺允大의 謄報에는 부사 김석형의 탐학불법한 죄를 상세히 보고하고 있어 작변의 원인을 보다 정확히 규명할 수 있다. 그 죄목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座首·鄕所·倉監·中軍으로부터 千摠·哨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직임에 대한 賣任과 津浦 船舶의 商稅에 대한 科外疊徵, 그리고 公稅를 무시한 礦銀의 勒奪 등이었다. 이는 곧 수령권에 의한 수탈의 대상이 신향층과 상업, 광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부민층 일반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향인층을 중심으로 한 작변은 바로 이러한 수탈이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북청의 경우는 다음과 같다. 부사 沈厚鎭이 부임한 후 倉穀 500여 석과 大同別需錢 만여 냥이 流來의 포흠으로 그 때까지 덮어져 있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首鄕(좌수) 金元厚와 倉監(鄕所) 李仁赫을 시켜 그 수를 조사케 하여 逋欠穀을 거두어 들이고자 하였다.517) 그러자 利를 잃게 됨에 원한을 품은 吏輩들이 吏案에서 이름을 지우고, 3월 5일에 본부의 백명 가까운 이배들이 결당하여 향청에 돌입하여 좌수 김원후와 향소 이인혁을 나체로 구타한 다음 불태워 죽이려 하였고 나아가 부사 沈厚鎭까지 모해하고자 하였다.518) 이것은 부세 징수과정에서 있었던 수령권의 침탈에 대응한 이배들의 저항이었다.

 단천과 북청에서 있었던 이 두 사건은, 언뜻 보면 단천은 향인층간의 대립으로, 북청은 향인층 대 이서배의 대립처럼 보여진다. 즉 외형적으로는 향전의 성격을 지니나 단천의 향회나 북청의 좌수·향소는 이미 독자적인 세력집단으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니었다. 수령권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에 지나지 않았다. 작변의 원인이 바로 탐묵과 다름없는 수령의 吏鄕差任에 있었다는 지적은519) 역시 대립의 성격이 향인층이나 이서층간에 있었던 향전적인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하여 준다. 따라서 향인층이나 이서층이 향회나 좌수, 향소 등을 공격하였다고 하여 저항의 최종적 목표가 바로 그들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궁극적인 목표는 이들에 대하여 실질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수령권이었던 것이다. 이 점은 난민들의 세만 강하였다면 그 저항의 목표가 수령을 넘어서 곧바로 감사와 병사에까지 미쳤을 것이라는 김재찬의 우려에서도 확인되며, 그러한 우려는 바로 홍경래 난에서 중앙권력에까지 확대되어 현실로 나타났던 것이다.520)

 특히 순조 11년(1811) 황해도 곡산농민항쟁의 경우는 부민층 일반이 수령권에 대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을 잘 보여준다.521) 곡산에서는 관속과 부민, 상인들이 상호 결탁하여 상품경제를 통한 부의 축적을 꾀하고 있었다. 이에 대하여 부사 朴宗臣이 이를 제어하고, 나아가 이러한 제어를 틈타 사적 이득을 꾀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상업적 이해를 둘러싼 수령 대 관속·부민·상인의 연대세력간의 대립이 항쟁의 성격을 규정하는 주요한 모순관계였다. 결국 관속·향인층의 농업세력과 邑里富民 또는 倉底富民이라 불리는 상업세력이 상호 연대로 수령권에 대한 저항세력을 이루었던 것이다. 그런 점은 난의 전개과정에서뿐 아니라, 난이 끝난 후 곡산민들이 부사 박종신을 가서 죽이자고 도내에 발통하였을 때 鄕品官輩들이 착명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는 데에서도 드러난다.522) 바로 수령권에 대하여 향인층을 중심으로 한 사회세력 일반이 함께 저항집단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상업적 이해관계의 확대, 그 실현을 둘러싸고 결탁한 사회세력들과 이들을 수탈대상으로 하는 수령권과의 대립, 이것이 이 지역에서 당시의 주요한 대립의 내용이었다.

 저항의 궁극적 목표는 이처럼 수령권에 모아지고 있었다. 그 저항의 주체들은 향인층, 이서층 등 다양하였다. 그러나 어느 층이든 이들이 수령권에 대한 저항의 필요성을 느끼는 것은 그들의 이권이 침탈되었을 때였음은 물론이다. 이들의 이권의 공통적 기반은 앞서 경제적 성장 부분에서 상업의 발달이 두드러졌음을 보았듯이 상업에서 비롯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상업세력과의 연대를 통해 이들은 하나의 세력집단을 이루어 수령권에 맞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서북민에 대한 차별이라는 서북민 공통의 피해의식 역시 중앙권력의 대리자인 수령에 공동으로 저항할 수 있는 원인을 제공하였다. 서북민 차별의 정도를 정조∼철종 연간의 문과 급제자의 분포를 통해 살펴보면, 민심수습책 정도의 형식적 의미만을 갖는 式年試의 경우에는 평안도가 전체의 26.2%를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서울거주 京華子弟를 대상으로 하는, 따라서 중앙권력으로의 진출 집중도가 높은 別試의 경우에는 5.9%로 줄어들고, 더나아가 문신 가운데서 당상관의 일차적인 후보집단을 선정하는 都堂錄의 경우를 보면 함경·황해도와 함께 평안도에서는 단 한 사람도 오르지 못하는 기만적인 차별성을 보였다.523)

 이러한 사정에서 중앙권력의 대리자인 수령권에 대항하여 서북민 일반의 반봉건적 저항이 일어났고, 이는 순조 11년(1811) 홍경래 난에서 농민들에 의한 거센 항쟁으로 집약되었던 것이다.

506)≪日省錄≫순조 11년 윤 3월.
507)≪日省錄≫정조 14년 4월 17일.
508)≪日省錄≫정조 19년 7월 8일.

≪正祖實錄≫권 43, 정조 19년 7월 무오.
509)≪日省錄≫정조 21년 10월 6일.
510)≪正祖實錄≫권 46, 정조 21년 6월 기묘.
511)≪正祖實錄≫권 40, 정조 18년 7월 무신.
512)≪日省錄≫정조 21년 10월 6일.
513)위와 같음.
514)위와 같음.
515)≪日省錄≫정조 21년 10월 28일.
516)≪日省錄≫순조 8년 3월 22일.
517)≪日省錄≫순조 8년 4월 11일.
518)≪日省錄≫순조 8년 4월 9일.
519)金載瓚,≪海石日錄≫권 7, 순조 8년 4월 30일.
520)金載瓚,≪海石日錄≫권 4, 순조 8년 4월 12일.
521)곡산지방 농민항쟁에 대하여는 한상권,<1811년 황해도 곡산지방의 농민항쟁>(≪역사와 현실≫5, 1991)에서 상세히 다루어지고 있어 많은 참고가 된다. 따라서 여기서는 그 전개과정이나 참가계층 분석 등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였다.
522)≪日省錄≫순조 11년 4월 7일.
523)남지대,<중앙정치세력의 형성구조>(≪조선정치사 1800∼1863 상≫, 청년사), 147∼159쪽.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