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일본사회운동과 재일조선인 운동
1930년대 재일조선인의 일본 사회운동 속의 활동을 설명할 때는 우선 일본공산당 조직 내로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이 대거 들어간 사실을 지적해야 할 것이다.
가) 일본공산당
조선공산당 일본총국이 해산된 이후 재일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일본공산당에 가입했다. 일본공산당은 재일조선인 공산주의자를 지원하고 지도하기 위해 1931년 5월 이미 민족부를 설립했다. 민족부는 일본공산당의 중앙상임위원회 직속으로 설립되어 이와타 요시미치(岩田義道)와 마츠오 시케키(松尾茂樹)의 도움을 받은 카자마 죠키치(風問丈吉)가 주도했다. 이 조직에 있어서 조선부문의 지도자는 김치정이었다.
1931년 조선공산당 일본총국과 고려공산청년회 일본부를 해체하고 난 뒤, 일국일당주의에 따라 조직적으로는 일본공산당 세포에 속하여 일본공산당원의 당적을 갖게 되었다. 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당 중앙과 지구당 조직의 말단 행동원으로 광범위하게 활동했는데, 도쿄·교토·오사카·고베(神戶) 등지와 조선인이 다수 거주한 아이치(愛知)·후쿠오카(福岡)·야마구치(山口)·히로시마(廣島) 등을 비롯해 전 조선인 사회에서 투쟁을 선도했다.
나) 전협
전협은 일본 노동운동에 있어 일본공산당의 지도 아래 투쟁을 선도했던 조직이다. 그러나 전협은 재일조선인 노동자들이 다수 가맹했음에도 일본 혁명운동에 있어, 조선인들에게 지분을 주는데 망설였다.
1931년 전협은 일본 혁명운동에 조선인을 동원할 필요성에 대해 인식하였으나, 조선인의 민족문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대책도 세우지 않았다. 아무런 대책을 세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조선인의 민족의식이 계급의식 저해에 영향을 미친다고 비판하는 입장도 있었다. 그 결과 공장을 대상으로 한 조선인 조직화가 생각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므로 나온 대책이 바로 민족부의 설치였다.877)
전협 중앙은 조선어부 설치와 관련하여 그 임무를 일본 노동시장에 몰려 있는 50만 이상의 재일조선인 노동자를 광범위하게 조직화하여 일선프로레타리아의 강한 결합 아래 과감히 투쟁을 전개해야 한다고 했다.878)
1932년 9월에 열린 제1회 중앙위원회는 결의에서 재일조선인 노동자가 본질적으로 가장 혁명적인 계급이라고 전제하고, 전협의 중대한 결함의 하나로 이들 중국·조선 및 대만의 혁명적 노동조합운동과의 결합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나아가 1933년 1월 전협 중앙상무위원회의<전국협의회 당면의 임무>는 이 결의를 더욱 구체화했고, 제1회 중앙위원회는 ‘소연방 옹호·조선과 대만의 완전독립을 위한 투쟁, 천황제 폐지’를 행동강령으로 내걸고 특히 ‘제국주의전쟁반대·소동맹과 중국혁명의 옹호·대만과 조선의 독립운동지지 둥과 결부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전협 내에서 조선인 조합원의 수는 증가했다. 1931년에 일본 전국의 전협 조합원은 1만 700명이었는데, 그 가운데 4,100명이 조선인이었다.
실제로 1930년대 이후 일본 노동운동에 있어 가장 전투적 투쟁은 전협이 주도했다. 여기에 산하 조직으로 조선인위원회가 만들어졌는데, 이것은 조선인에 대한 특별조직이었다. 일부의 재일조선노동총동맹원은 조직적으로 해체하여 여기에 들어 갔고, 이후 전협 조선인위원회의 지령 아래 산업별 재조직 투쟁을 계속했다.
조선인 노동조합 해체를 주도한 조선인위원회는 지령·기관지·뉴스 등을 발행하여 가맹조합의 해체를 일상투쟁과 결합시켜서 해체활동을 전개했다. 1930년 4월이 되면 동경조선노동조합 산하 대부분의 조직과 교토·미에(三重)縣 조선노동조합은 해체되어 산업별조합으로 재편성되었다. 이후 전협 산하의 산별 조직에 다수의 조선인이 들어갔다.
주목할 만한 조직으로는, 전협 산하 토목건축노동조합879)이 있다. 여기에는 다수의 조선인이 가입했는데,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이 전협으로 해소하고 산업별로 조직되는 가운데 강력한 조직적 역량을 갖게 된 것이 바로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이었다. 여기에는 재일조선인의 역할이 지대했는데, 조선인으로는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본부에 강유홍·이성백·김종선·김수만·김기주·김수혁·함춘성이 각각 위원으로 활동했다.
지역 단위 주요 조직으로는 토쿄·오사카·카나가와·야마나시(山梨)·토야마(富山)지부 등이 있었다. 도쿄지부는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의 전국적 결성을 계기로 관동자유노동조합이 해소, 흡수되어 조직된 것으로 1931년 10월 말에는 조합원 700명의 조합이 되었는데, 이 가운데는 재일조선인이 500명이었다. 1932년 말에는 약 1,000명의 조합원 가운데 재일조선인이 930명에 달하여 지부의 주도권을 재일조선인이 장악하게 되었다.
카나가와지부는 1931년 4월에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본부의 츠네타카(平安名常孝)가 카나가와현조선노동조합의 김일성·김범윤·정호용·김영준 등과 협의하여 결성했다. 초기에 카나가와현조선노동조합은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의 해체에 적극적이지 않았지만 대세의 흐름에 순응하게 되었다. 1931년 10월 말에는 조합원수 810명이었으며, 그 가운데 재일조선인이 780명이었다. 이 지부는 그 어떤 조직 보다 전투적이었던 것으로 유명했다.
야마나시지부의 경우를 보면, 야마나시현 국도수리사업에 동원된 재일조선인 가운데 손해수·박상준 등은 토쿄市 직업소개소 실업등록자 재일조선인 300명을 모아 1931년 1월 야마나시토건노동조합을 결성했다. 이 조합은 박상준·강용달 등의 지도로 투쟁력이 강화되었고, 8월에는 일본토목건축노동조합 山梨지부로 개편되었던 것이다. 개편 후 야마나시지부는 조합원이 500명에 이르기도 했다.
한편 오사카지부에서는 이성국·강상호·이상길·구재봉·현호진·이병화·정암우 등의 활동이 두드러진다. 이 가운데 정암우는 1934년 3월부터 일시 와해된 대판지부의 재건을 목표로 직업소개소 노동자에 대해서 격문을 살포하고 박애회의 구성원인 박수봉·최봉식 등을 적극 견인했다.
다) 반제동맹
일본에서 반제운동이 현실운동에서 조직적인 내용을 갖게 되기 시작한 것은 1927년 5월 31일 조직된 대지비간섭동맹이라 하겠다. 이후 이 조직은 전쟁반대동맹으로 개조되었는데, 전쟁반대동맹은 1929년 11월 27일에 반제국주의민족독립지지동맹 일본지부로 되고 마침내 일본반제동맹880)이 되었다.
일본반제동맹은 중앙기관지로≪반제신문≫·≪반제뉴스≫·≪반제자료≫·≪반제팜플렛≫을 발행했고, 1934년부터는≪반제신문≫조선어판을 냈다. 특히 일본반제동맹은 재일조선인의 획득을 위해 이윤우를≪반제신문≫조선어판 책임자로 선정했고, 재일조선인은 적극적으로 일본반제동맹에 가입해 활동하게 되었다.
재일조선인 공산주의자들은 조선인만의 운동에 무력함을 느끼고 여기에 가입했으며, 재일조선인은 일본반제동맹이 개인이나 조직의 이해관계와 무관하게 민족·사회적 혁명을 재정·정치적으로 원조할 것이라는 내용에 매력을 느꼈던 것 같다. 이에 따라 재일조선인은 조직의 선두에 섰던 것이다. 결국 일본반제동맹 구성원의 60∼70%는 재일조선인이 차지하게 되었다.
이러한 일본반제동맹은 다음의 내용을 목표로 활동했다. ① 공산주의운동의 일부를 담당한다. ② 제국주의를 반대한다. ③ 소비에트·러시아를 방위한다. ④ 중국 및 인도혁명을 지지한다. ⑤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를 해방시키는데 일조한다 등이었다.
특히 일본반제동맹 규약에서는 식민지 독립을 우선 강조했다. 즉 일본제국주의에 반대하고 조선지부, 기타 피압박민족의 정치적·사회적 해방투쟁을 지지하는 개인 및 조직을 단결시키고, 이와 함께 일본제국주의 내의 노동자·농민과 조선·대만·몽고 등 일본제국주의에 고생하는 식민지의 피압박 민중과 소비에트연방의 노동자·농민을 단결시키며, 조선·대만·몽고 등 식민지의 피압박 민중에 대한 민족적 억압, 차별대우에 맞서 해방을 위해 조선·대만·몽고 등의 민족·사회적 혁명을 재정·정치적으로 원조할 것이라고 했다. 즉 일본반제동맹은 제국주의 반대투쟁에 당면한 정치적 임무가 있다고 전제하고, 일본제국주의 타도를 목표로 하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공동투쟁을 강조했다.
그런가 하면 1932년 일본반제동맹 중앙의 조직적인 투쟁으로 7월에 오사카지방위원회가 확립되었다. 오사카지방위원회는 8월에 동아통항조합에서, 9월 하순에는 泉南지방에서 조직원을 견인해 냈다. 또한 12월에는 동·서·남 및 농촌의 4지구에 약 400명의 재일조선인을 조직했다. 오사카지방위원회가 발간한 인쇄물로는<8·1 반전투쟁의 국제적 캠페인에 대한 재대판 혁명적 조선노동자는 선두에서 궐기하라>·<조선이 나은 반제국주의자 윤봉길의 총살에 대한 반대운동을 일으키라>·<神武天皇祭 및 반동의 시위운동을 분쇄하라> 등의 문건과 팜플렛≪반제신문≫(오사카판) 등이 있었다.
라) 코프
일찍이 재일조선인 프롤레타리아 문화운동은 1927년 3월에 재일유학생인 洪曉民·조중랑·한식·고경흠·이북만 등이 제삼전선사를 조직한 이후 시작되었고, 이 조직은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이하:카프) 동경지부로 해소되었다. 이후 이 동경지부는 1929년 11월 해체되어 무산자사로 합류했다. 그런가 하면 무산자사에서 활동하다가 검거를 피한 김두용·박정석·이북만 등은 1931년 11월 카프 동경지부 구성원, 동경조선프롤레타리아 연극연구회원과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과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과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를 적극적으로 지원, 지지하고 확대 강화를 위해 투쟁한다는 강령 아래 동지사를 결성했다. 동지사는 조직의 강화가 도모되고 활발하게 사업이 진행되는 가운데 일본에서 조선과 일본 예술의 공동전선수립의 원칙에 따라 조직을 해산하고 코프(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화연맹)에 가입하기로 했다. 동지사는 해체선언을 발표했고, 그 구성원들은 일본프롤레타리아 연극동맹·미술가동맹·작가동맹·과학연구소·영화동맹·사진동맹·무신론자동맹 등에 가입했다.
코프 중앙협의회 서기국은 1932년 2월 조선협의회881) 설치를 결정했다. 이 조선협의회는 그 목적을 다음과 같이 했다. 첫째로 조선협의회는 재일조선인 노동자를 문화를 통하여 획득하여 전 동맹의 활동을 통일시킴을 그 목적으로 했고, 카프의 확대 강화에 따라서 조선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의 확립을 위해 조선 내의 문화단체·클럽 원조를 두번째 목적으로 했다. 그리고 셋째는 조선민족의 문화 연구에 그 목적을 두었다.
조선협의회는 코프 중앙협의회 산하의 청년·소년·부인·농민 등의 협의회와 동등한 지위를 갖았다. 여기에서는 이홍종·박영근·김용제·유정식·은무암·윤기청·정운상 등이 협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조선협의회는 당면 임무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정리했다. 첫째 조직의 확립을 위해 각 동맹에서 유능한 일본인 동지를 끌어들여 조선인만이 모여 생기는 섹트적 투쟁을 극복할 것, 둘째 각 동맹의 조선위원회를 확립하여 그 위원회는 조선인에 대한 활동에서 전 동맹적 해결방법을 취하고 그것을 조선협의회에 반영시킬 것, 셋째 각 동맹이 조선인 구성원의 획득에 노력할 것, 넷째 각 동맹의 활동을 강화하고 써클활동을 전개하며 그곳에 뿌리를 박고≪우리동무≫독자회를 만들 것, 그리고 다섯째로≪우리동무≫편집국을 확립하고 여기에 일본인 편집위원을 가입시킬 것, 여섯째 통신원 획득에 힘쓰고 대중적 편집에 노력할 것, 일곱째로 각 동맹은 조선인 노동자에 대한 계몽적 선전선동적 출판물을 가질 것, 또한 대중적 계몽출판물에 적극적으로 조선인 노동자문제를 취급한 기사를 게재시킬 것, 마지막으로≪우리동무≫편집국이 주동이 되어 코프 문고에 조선문제에 관한 적당한 팜플렛을 발행하는 계획을 세울 것 등이었다. 여기에서 거론한≪우리동무≫는 김용제·김두용·이홍종 등에 의해 편집된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기관지였다.
조선협의회는 반파시즘의 문화투쟁을 통해 재일조선인 노동자를 조직하고 일본인 노동자에게 조선문제를 소개하여 관심을 고양시키며 조·일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제휴를 강화하는 방침을 세우고 구체적인 투쟁을 전개했다.
877) | 정혜경, 앞의 책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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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8) | 內務省 警保局,<社會運動の狀況>(朴慶植 編,≪在日朝鮮人關係資料集成≫2), 460쪽. |
879) |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조. 岩村登志夫,≪在日朝鮮人と日本勞動者階級≫(校倉書房, 1972). 梁永厚,≪戰後大阪の朝鮮人運動≫(未來社, 1994). |
880) |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자료를 참조. <社會運動の狀況>(金正明 編,≪朝鮮獨立運動≫4, 東京:原書房, 1967). <思想硏究資料>特輯71號(≪朝鮮人の共産主義運動≫, 東京:東洋文庫, 1973). |
881) | 자세한 내용은 다음의 책을 참조. <思想硏究資料>特輯71號(≪朝鮮人の共産主義運動≫, 東京:東洋文庫, 1973). 고준석 지음, 김영철 옮김,≪조선공산당과 코민테른≫(공동체, 1989). 田 駿,≪朝總聯硏究≫(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197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