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 활동
임시 정부가 중경에 도착한 1940년은 1937년 이래 계속되던 중일 전쟁에 이어 유럽에서는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때였다. 이에 독립운동 진영은 일제의 패망을 확신하고 ‘임시 정부’가 ‘정식 정부’를 준비해야 한다는 판단 아래 강력한 지도 체제를 구축하였다. 따라서 국무 위원회의 주석이자 최고 통수권을 가진 주석제로 개헌하였고, 1944년에는 주석·부주석제로 개헌하며 좌우 합작 정부를 구성하였다.
- 윤봉길 의거 때 폭탄을 만들어 준 중국인 왕백수와(1940). 앞줄 왼쪽: 왕백수 부인·김구·왕백수/ 뒷줄 왼쪽: 엄항섭·박찬익
- 미상. 앞줄 왼쪽: 조소앙·김구·엄항섭·○·안원생/ 뒷줄 왼쪽: ○·○·양우조·○·○·○·이복원
- 김구가 미주 한인 사회에 보낸 태극기(1941. 3. 16). 안창호의 부인 이혜련이 보관하고 있다가 후손들이 독립 기념관에 기증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대일 선전 성명서(1941. 12. 10). 임시 정부는 1941년 12월 7일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도발한 일제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제34회 의정원 의원 일동(1942. 10. 25). 제34회 임시 의정원은 한국 독립당, 조선 민주 혁명당 등 각 정당 단체 및 무소속 인사들을 총망라하여 명실공히 전 민족적인 의정원을 구성하게 되었다.
- 3·1절 24주년 기념식 방명록(1943. 3. 1)
- 자유 한인 대회(1943. 5. 10). 1943년 초 영국 수상 이든이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를 만나 한국의 국제 공동 관리를 논의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임시 정부는 중경에 있는 모든 독립운동 세력과 함께 자유 한인 대회를 개최하여 반대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 자유 한인 대회(1943. 5. 10). 한국은 독립 국가이며 한민족은 자유인임을 선포하였다.
- 중경에서 개최된 자유 한인 대회에서 연설하는 홍진(1943. 5. 10).
- 자유 한인 대회(1943. 5. 10). 중앙부터 오른쪽으로 김규식, 윤기섭, 조성환, 차리석, 최동오 등의 모습이 보인다.
- ≪독립신문≫ 중경판 창간호(1943. 6. 1). 중경에 정착한 임시 정부는 한중 연대와 대중국 선전 활동을 효과적으로 전개하기 위하여 중문으로 ≪독립신문≫을 복간하였다.
- 대한민국 임시 정부 재무부 이재 과장 박영준 임명장(1943. 6. 29)
- 국내 공작을 위해 중경에서 파견된 김병호(고종민, 1945). 국내로 들어가던 중, 남경에 유학 중이던 조선인 학생들을 포섭하려다 일제에 체포돼 수감되었다가 1945년 출옥하였다. 왼쪽: 김병호·김구·박찬익
- 윤봉길 의거 시 폭탄 제조 교섭을 맡았던 김홍일과 제조 기술자 중국인 왕백수(1945). 왼쪽: 왕백수·김구·김홍일
- 신익희와 임시 정부 국내 선발대(1945). 앞줄 왼쪽: ○·신익희 신현창/ 뒷줄 왼쪽: ○· 박수덕·승영호
- 임시 정부 경위대(1945). 왼쪽: ○·윤경빈·서상열·정명·박수덕·이문화
- 임시 정부 경위대(1945)
- 왼쪽부터 김인·김구·김동수
- 국내 공작을 위해 파견된 문덕홍(1945. 5. 9). 왼쪽: 김구·문덕홍
- 중경에서 임시 정부 요인(1945. 9). 앞줄 왼쪽: 이시영·김구·유동열·황학수/ 뒷줄 왼쪽: 박찬익·조완구·김상덕·최동오·유림·엄항섭
- 중경 시절 마지막 청사 정문
- 주화 대표단 남경 이전 기념(1946. 4). 주화 대표단은 중국 정부와 임시 정부 환국 후의 잔무 처리, 중국 내 한인 교포의 생명과 재산 보호, 귀국 문제 등의 처리를 협의하기 위하여 조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