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특수훈련반(미 OSS)의 훈련을 마치고 공작임무를 수행하러 적 후방을 향하여 떠나던날 대장 이범석장군을 모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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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사회상 사진아카이브

1920년대 사회상 - 회유의 정치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통치는 한국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제일'이라고 인식하고, 한국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치선전을 강화하였다. 그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 총독의 지방 순시와 한국인 시찰단의 일본 파견이었다. 총독이 직접 조선 방방곡곡을 다니며 시정을 살피는 '선정(善政)'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한국인 유력인사들에게 발달된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일제는 이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일제 통치 하의 발전을 꿈꾸게 함으로써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협력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총독의 지방순시

한국인 일본시찰단

한국인 일본시찰단

1920년대는 조선총독부가 한국인 일본시찰단의 조직과 파견에 가장 열을 올린 시기였다. 총독부가 시찰단의 조직과 파견에 직접 관여하고 경비의 전부 또는 일부를 보조하면서, 1920~22년간에만 300개 이상의 단체가 파견되었고 참여층도 교원, 유생, 중추원 참의, 군수, 면장, 의생, 청년 등으로 다양해졌다. 
                조선총독부가 시찰단 파견에 힘을 쏟은 것은 일본의 발달된 모습을 보임으로써 한국인의 독립의지를 꺾고 이들을 식민통치의 새로운 협력자로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시찰 코스도 근대의 문물과 고대의 문화유적을 두루 볼 수 있도록 안배하여, 일본이 과거부터 지금까지 조선과 친밀하면서도 동등하거나 우수한 나라였음을 보이고자 하였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사업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 일본 시찰의 경험을 일반민에게도 공유하게 했다. 이 때문에 지방 사회에서 민과 직접적으로 접촉할 확률이 높은 사람들을 시찰단원으로 선발하였고, 귀국 후에는 강연회나 간담회, 일본시찰 활동사진 전시 등을 개최하여 견문을 선전하게 하였다. 일본시찰단이 주로 지방단체에 의해 조직되고 보조금이 지방 사회사업비에서 지원된 것도, 1920년대 조선총독부의 한국인 일본시찰단 파견이 조선 민중에 대한 '교화', 즉 회유를 위한 것이었음을 말해준다.

여자훈도학사사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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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사찰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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