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미특수훈련반(미 OSS)의 훈련을 마치고 공작임무를 수행하러 적 후방을 향하여 떠나던날 대장 이범석장군을 모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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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사회상 사진아카이브

1920년대 사회상 - 회유의 정치

3.1 운동 이후 조선총독부는 '조선통치는 한국인의 마음을 얻는 것이 무엇보다 제일'이라고 인식하고, 한국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정치선전을 강화하였다. 그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사업이 총독의 지방 순시와 한국인 시찰단의 일본 파견이었다. 총독이 직접 조선 방방곡곡을 다니며 시정을 살피는 '선정(善政)'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고, 한국인 유력인사들에게 발달된 일본의 모습을 보여주려 한 것이다. 일제는 이를 통해 한국인들에게 일제 통치 하의 발전을 꿈꾸게 함으로써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고 협력을 이끌어내려 하였다.

총독의 지방순시

한국인 일본시찰단

총독의 지방 순시

1919년 3.1 운동의 책임을 지고 물러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를 대신해 신임 조선 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은 한국인들의 민심을 회유하기 위해 한국인과의 접촉을 늘렸다. 그중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이 지방 순시로, 1919~1927년 간의 재임기간 중의 순시만 총 42회, 222일에 달했다. 총독의 순시는 한국인의 반일 경향을 가까이에서 감시하는 한편, 식민통치의 정당성을 홍보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이토의 지방 순시에는 정치적 선전을 극대화하기 위한 행사들이 마련되었다. 가는 곳마다 관민들이 동원되어 총독을 맞이하였고, 총독은 그 지역의 지주, 유생, 촌로, 자본가, 외국인 선교사들을 만나 연회를 베풀었다. 또한 각급 학교, 공장 및 주요 산업시설을 시찰하며 각계의 이야기를 듣고, 병원의 환자들을 위로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 총독은 지방 순시를 통해 스스로를 권위의 상징이자 '자애로운' 통치자로 표상하면서, 한국인의 저항심을 누그러뜨리고 식민지배 하에 통합시키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자신이 부임해오던 길에 강우규의 폭탄 세례를 받았을 정도로 당시 한국인들의 저항은 격렬했다. 따라서 사이토 총독이 만날 수 있는 한국인은 친일적 성향이 있는 사람들로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전라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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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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