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는 침략으로 얻은 해외 영토에 국가 신도를 파급시키기 위하여 그 지역을 대표하는 관폐 대사를 만들고 '총진수(總鎭守)'로서 다른 신사들의 정점에 서게 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관폐 대사가 조선 신궁(1925)이었는데, 그 조영 과정은 조선의 국가 의례를 국가 신도로 대체하고 조선의 신사 정책을 정비하는 것과 궤를 같이했다.
조선 총독부는 강점 초기부터 조선에 일본 문화를 이식하고 그 사람들에게 일본의 국민 의식을 심기 위해서는 조선 신궁을 건립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제신과 위치 선정 등에 시일이 걸리면서1925년에야 서울 남산에 조선 신궁을 조영하기에 이른다. 대한 제국 '병합'을 단행했던 메이지(明治) 천황과 천황가의 시조로 일컬어지는 최고의 신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를 모심으로써 신사의 격을 높이고, 일제의 조선 지배가 문명화를 위한 것이라고 선전하려 했던 것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조선 신궁에는 총독부 관료와 황족 등 일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참배가 아닌 구경을 위하여 조선 신궁을 찾는다고 할 정도로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그 결과 조선인의 참배는 학교 학생들의 강제적인 단체 참배가 주였고 개인적 방문은 드물었다. 일제는 국가 신도를 조선에 침투시키기 위하여 국가 의례로서의 성격과 문명화를 강조했지만, 조선인들에게 신사는 어디까지나 일본인들의 종교일 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