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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우리는 일상 속에서 늘 무언가를 기록합니다. 수업 내용을 필기하고, 요리법을 기억하기 위해 메모해두기도 하죠.
그런데, 종이를 구하기 힘든 시절, 우리 조상들은 어디에 글을 썼을까요?
종이가 희귀했던 시대, 당대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이 담긴 특별한 유물, ‘목간’을 소개합니다.

종이가 희귀했던 시대, ‘목간’이 있었다

산 정상에 펼쳐진 넓은 풀밭.
풀밭 위로 돌로 쌓은 성벽의 흔적이 드러나 있는데요. 이 성벽이 바로 함안 성산산성입니다.

이곳의 동쪽 성벽 아래에서 300여 개의 나뭇조각이 출토됐습니다. 이 나뭇조각들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요. 발굴된 나뭇조각들은 먼저 조심스럽게 보존처리 과정을 거칩니다.

이제 잘 처리된 나뭇조각을 적외선으로 비춰보면 놀랍게도 붓으로 쓴 듯한 글자가 확연하게 드러나는데요. ‘급벌성’이라는 지명과 ‘문시이’라는 사람의 이름, 그리고 곡식 ‘피’와 단위를 뜻하는 ‘석’ 이라는 한자가 보입니다.

이 글자들을 연결해보면, 급벌성, 바로 지금의 경북 영주에 사는 ‘문시이’라는 사람이 피를 보낸다고 해석할 수 있는데요.

문자를 기록하기 위해 일정한 모양으로 깎아 만든 나뭇조각

이처럼 나뭇조각에 정보를 담은 문자를 기록한 것을 ‘목간’이라 부릅니다.
그런데 왜 이 목간이 함안 성산산성에서 출토된 것일까요?

“6세기 중반 이후에 함안 성산산성이 축조되고 유지되면서 많은 물자가 이동해 올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사람들에게 공급되었던 물품에 붙어 있었던 꼬리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담겨있는 정보들은 신라의 행정조직과 세금 수취체계를 파악할 수 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는 거죠.”

이재환 교수 /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그런데 6세기 신라 시대의 목간이 어떻게 천오백년의 시간을 견디고 글자들을 선명하게 간직할 수 있었던 걸까요?

“이 층 안에 목간이 들어가 있었기 때문이거든요. 이 부엽층 안은 물이 많이 들어올 수 있고 따라서 산소가 차단되는 환경이 조성되는 공간이거든요. 여기에 목간이 들어갔기 때문에 천 년 이상 썩지 않고 오늘날 그대로 모습을 보전할 수 있었던 거로 생각합니다.”

양숙자 학예연구실장 /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종이가 귀한 시대, 사람들의 필기 재료로 사용된 목간.
하지만, 종이가 널리 사용되기 시작한 고려시대 이후에도 목간이 쓰인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태안 마도 앞바다에서 발굴한 고려시대 배 안에서도 다량의 목간이 발견됐습니다.

이 목간들은 함안 성산산성 목간과 마찬가지로 끝에 좌우로 홈이 파인 것을 볼 수 있는데요. 이 홈에 끈을 묶어 화물에 부착하는 꼬리표의 기능을 했던 거죠. 이처럼 택배 송장과 비슷한 역할을 한 목간들을 ‘짐꼬리표 목간’이라 부릅니다. 목간의 다양한 형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죠.

“고려시대나 조선시대 같은 경우는 종이를 제작하는 비용이 상당히 비쌌기 때문에 대중들까지 종이를 쉽게 구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재는 말 그대로 칼로 한번 긁어내면 재사용이 가능하기 때문에 목간을 대중들이 애용하게 된 이유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김택준 학예연구사 /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고대 사람들의 생생한 일상 기록 ‘목간’

백제 사비성터로 여겨지는 부여 쌍북리

이곳에서 발견된 목간에는 특별한 숫자가 기록돼 있습니다.
자, 이 숫자들이 의미하는 게 무엇인지 보이나요? 바로 우리가 지금도 사용하는 구구단입니다.

“9단부터 2단까지 연속적으로 표기를 하되 단별로 구분해서 구분선을 넣은 다음에 표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단의 중복된 숫자 즉, 9X9=81, 9·9, 8·8 뒷글자(숫자)는 중복 부호를 사용해서 생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각 단의 시작하는 글자는 가장 오른쪽에 배치해서 9단부터 2단까지 내려갈수록 좁아지는 직각삼각형의 형태를 띠게 기재하고 있습니다.”

정훈진 팀장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재조사연구단

직각 삼각형의 특이한 형태를 띠게 된 이유는 구구단의 독특한 배치 모양 때문이기도 하지만, 손에 잡기 쉽기 때문이기도 한데요.

모서리를 자세히 보면 손에 잡기 쉽게 다듬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백제의 하급 관리들이 정확하게 숫자를 계산하기 위해 구구단 목간을 손에 들고 다니며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인천 계양산성에서도 목간이 출토됐는데요. 이 목간은 5개의 면에 모두 글자가 기록되어 있는데 바로 공자의 ‘논어’입니다.

이 ‘논어 목간’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요. 독서삼품과 등 시험과목에 논어가 있었던 만큼 신라시대 관리들이 논어를 공부할 때 사용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화려한 신라 궁궐 유적인 동궁과 월지
연못 월지 안에서도 목간이 출토됐습니다. 월지 목간에서는 신라의 궁정 문화를 그대로 엿볼 수 있는데요. 그 중 한 목간을 살펴볼까요.

사슴으로 만든 젓갈을 뜻하는 ‘녹갑’과 항아리를 뜻하는 ‘옹’자가 보입니다. 사슴젓갈을 담은 항아리라는 뜻이죠. 앞에는 어느 달의 3일에 만들었다는 글자도 보이는데요. 신라시대에도 염장요리가 있었고 젓갈의 종류와 담근 시기를 목간에 기록해 잘 관리했다는 걸 알 수 있죠.

또 다른 목간에는 의약처방전이 기록돼 있었는데요. 대황, 감초 등 약재의 이름과 무게가 쓰여 있습니다.

이외에도 얼굴을 그리거나 글씨를 연습하던 연습용 목간 등이 발굴되었습니다. 이처럼 우리 조상들의 삶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목간, 최근 역사가들이 더욱 주목하고 있는데요.

“목간이라고 하는 것은 과거 사람들의 일상적이고 평범한 모습을 알려주는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통해서 역사책이 전하지 않는 과거 사람들의 문자 문화로서 최근에 중요한 자료로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이재환 교수 / 중앙대학교 역사학과

우리의 평범한 삶 곳곳에서 기록되는 문자들.
어쩌면 먼 미래 세대에게는 이 일상의 메모들이 마치 목간처럼 신비한 타임캡슐로 다가오지 않을까요?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목간은 정보 전달 등을 목적으로 나뭇조각문자를 기록한 것이다.
2. 목간은 종이가 희귀하던 시기에 중요한 필기재료로 사용되었다.
3. 목간은 당대의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기록되어 있다.

해설

1. 목간이란 무엇인가

목간(木簡)은 공사(公私)의 의지 혹은 정보 전달 등을 목적으로 나뭇조각[木片]에 문자를 기록한 것이다. 고대 동아시아지역에서 서사(書寫) 재료로서 나무를 이용하는 방법은 중국에서 기원하였다. 중국에서는 죽간(竹簡)·목간을 비롯한 붓과 먹 등의 문방구류가 전국시대의 유적에서 확인되고 있으며, 진한(秦漢)시대에 이르러 국가행정의 전반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다가 이후 종이의 개량과 보급에 따라 점차 서사 재료로서의 주도적 지위를 잃게 되었다.

2. 한국 목간의 기원

고대 한국에 중국의 간독 문화가 본격적으로 유입된 계기는 전한(前漢) 무제(武帝)가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한반도 서북부에 군현을 설치한 이후라고 생각된다. 이러한 양상은 평양의 채협총 출토 목간과 정백동 364호분 출토 낙랑군 호구부(戶口簿) 목독·『논어』 편철 죽간, 낙랑 유적에서 출토한 봉니(封泥)와 인장(印章), 문방구류 등의 출토에서 알 수 있다. 낙랑군의 간독과 문자 유물의 존재는 고대 한국에 중국의 간독 문화가 그대로 수용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한국의 목간과 중국의 간독은 형태나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3. 고대 한국의 목간 문화

고대 삼국 가운데 고구려는 중국 군현과의 관계 속에서 정치체로 성장하였기 때문에 언어와 문자를 통한 교류가 이른 시기부터 진행되었다. 고구려는 한 군현 세력과의 교류 속에서 한자를 사용하는 초보적인 문서 행정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초기의 문서 행정은 사람이나 물품의 이름과 그 수량 및 날짜 정도를 표기할 수만 있어도 가능하다. 『위서』 동이전 고구려조에 제가(諸加)들이 가신처럼 임명한 사자(使者) 등의 이름을 모두 왕에게 보고하였다는 것도 초기 문서 행정의 양상이었다고 생각되며, 이 과정에서 서사 재료는 목간이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

이와 같은 흐름은 중국 군현이나 고구려와의 관계 속에서 성장해가던 백제 및 신라에서도 비슷한 모습으로 전개되었다. 백제의 경우 한성(漢城) 시대인 근초고왕(近肖古王) 대에 서기(書記)의 제도를 갖추어 나가기 시작했으며, 개로왕(蓋鹵王) 대에 북위에 보낸 국서나 도미(都彌)와 같은 편호소민(編戶小民)의 존재에서 한성백제 후반기에는 이미 꽤 높은 수준의 문자 문화를 향유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 또한 마립간기를 경과하면서 문자에 의한 지배를 구축해 갔으며, 5~6세기 경주지역을 벗어나 새로운 지배영역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문자에 의한 지배가 더욱 공고화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일반적인 서사 재료는 ‘목간’이 사용되었다. 현재 알려진 백제와 신라의 목간 중 가장 이른 시기의 것은 6세기의 능산리목간(백제), 월성해자·성산산성목간(신라) 등인데, 죽간은 전혀 확인되지 않는다. 고대 삼국의 국가적 성장 추세나 단편적인 문자문화 관련 자료들을 염두에 둔다면 6세기 이전에도 서사 재료로 목간이 사용되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초기 국가의 정치 사회적인 성숙도 측면에서 중국의 간독 문화는 그대로 수용되기 어려운 환경이었다. 더구나 중국 군현이 진출했던 한반도 서북부 지역은 죽간의 재료인 대나무의 생장이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이 지역의 고구려와 같은 초기 정치체들은 목간을 이용한 초보적인 문자 생활을 시작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처음 중국의 간독 문화가 유입된 한반도 서북부의 자연 환경적 요인과 고대사회가 정치 사회적으로 미성숙했던 환경은 죽간이 배제된 ‘목간’의 문화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한국 고대 목간 문화의 기원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중국의 간독 문화에서 죽간 문화가 배제된 목간 문화의 수용은 이후 고대 한국 목간 문화의 흐름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으며, 나아가 일본 목간 문화의 기원과 전개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4. 백제·신라의 목간과 일본의 목간

백제와 신라 목간의 형태와 내용을 비교했을 때 문서 목간과 꼬리표 목간에서 백제 목간의 정형화가 먼저 이루어지고 있었던 사실이 확인되는데, 이는 백제의 문자문화가 신라보다 선진적인 양상으로 전개되었던 사실을 암시한다. 이 같은 현상은 백제와 신라의 목간 문화가 국가 간의 문자문화의 기원과 전개 과정에서의 차이와 특징이 반영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고대 한국이 목간 문화는 중국의 간독 문화의 영향에서 출발하였지만 정치 사회적·자연적 환경의 차이로 말미암아 고대 한국의 목간 문화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그 내부적으로도 여러 가지 요인으로 말미암아 지역적·국가적 차이를 보이면서 전개되었다.

이와 더불어 7세기 후반 이후의 자료들이 알려지고 있는 고대 일본의 목간들과 비교했을 때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일본 또한 한국과 마찬가지로 죽간은 확인되지 않는데, 이는 곧 고대 한국의 목간 문화가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던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다. 나아가 고대 일본의 대표적인 문서목간의 형태는 단책형이라고 불리는 얇은 장방판형 목간인데, 그 형태는 7세기 백제의 문서목간과 매우 유사하다. 꼬리표 목간 또한 백제의 그것과 유사한 점들을 확인할 수 있는 점에서 고대 일본의 목간 문화에 보다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던 것은 7세기 이후 백제의 목간 문화였을 것이다.

5. 목간 문화의 변화

고대 한국에서 7세기 중후반 이후 신라가 삼국의 통일을 완수하면서 목간의 시대는 종이의 시대로 점차 변모해 갔던 것으로 생각된다. 목간의 시대에서 종이의 시대로의 전환은 문서 행정의 변화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는데, 통일신라의 관제가 정비기를 거쳐 완성기에 도달하면서 문서 행정상에도 일대 혁신이 이루어졌다. 이 사실은 통일 이후 문무왕(文武王) 15년(675) 백사(百司)와 주군(州郡)에 동인(銅印)을 주조해 나누어 주었던 것에서 알 수 있다. 모든 관부와 지방의 주군에 이르기까지 인장을 나누어 주었다는 사실은 중앙과 지방의 주요 문서에 날인(捺印)하는 정책의 시행을 의미하며, 이는 종이 문서의 전국적인 사용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장면에서 서사 재료가 종이로 변화했던 것은 아니다. 안압지·황남동 출토의 꼬리표와 기록 목간, 김해 출토 논어 목간, 전인용사지와 창녕 화왕산성 출토 주술(呪術) 목간의 존재는 통일 이후에도 목간이 광범위하게 사용되었음을 알려주기 때문이다. 나아가 신라 하대(下代)인 진성여왕(眞聖女王) 때의 거타지(居陀知) 설화에서도 목간은 등장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문서 행정의 주요 영역에서는 서사 재료가 목간에서 종이로 변모하였지만, 문자가 요구되는 다양한 장면에서는 각각의 용도에 걸맞은 서사 재료의 특질이 고려되어 선택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의미한다. 최종적인 종이 문서나 장부를 만들기 위한 중간 집계나 기록들, 물품의 이동·보관 등에서는 문자기록의 내구성이 요구되는 목간이 이용되었고, 주술이나 의례의 이미지를 형상화할 때에도 목간이 주로 활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목간은 고대 국가 내부적으로 문자의 사용이 시작되면서 주도적인 서사 재료로 사용되다가, 7세기 이후 본격적인 종이의 문서 행정이 전개되면서 서사 재료의 주도적인 지위가 목간에서 종이로 공식화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목간은 나무라고 하는 재질상의 특징을 활용하는 용도로 점차 한정되어 갔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목간은 고대국가 전 시기에 걸쳐 문자문화의 중요한 서사 재료로 활용되었으며, 종이의 시대에 이르러서도 그 재질상의 특징에 걸맞게 고대국가 내부적으로 다양한 장면에서 사용되면서 고대의 역사와 문화를 담아내는 역할을 했던 것이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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