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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에는 우리 문화와 예술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들이 언급되고 있으나 대부분 시대별로 간략히 서술되어 그 개념과 변천 과정, 성격 등을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영상 문화·예술이야기>는 한국사 속 문화·예술 분야의 주요 주제별로 그 흐름과 변천 과정, 특징과 성격 등을 전문가의 해설을 기반으로 동영상 자료로 제작하여 서비스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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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나리오

조선 최초의 신도시를 꿈꿨던 정조.
이곳을 다녀온 뒤 굳은 결심을 하였는데요. 과연 이 도시는 어디일까요?

정답은 바로 수원입니다!
1794년 정조는 수원에 화성 축성을 지시하는데요. 10년을 예상했던 공사가 2년 9개월 만에 끝날 정도로 당대의 모든 기술이 집약된 성곽이었습니다. 하지만! 1950년 일어난 6·25 전쟁으로 제 모습을 잃고 마는데요.

“수원화성은 전쟁의 참화를 겪습니다. 대부분의 목조 건축물이 사라지는데 그중에서도 장안문과 창룡문이 사라지게 되죠. 그리고 성벽의 상당수 역시 파괴됐습니다.” 조성우 / 수원화성박물관 학예사

어떻게 옛 모습대로 복원할 수 있었을까요? 그 비밀이 바로 이 책에 있다는데요. 조선 왕조 기록 문화의 결정체, 의궤를 소개합니다.

조선은 왜 의궤를 남겼을까?

이 책을 간행하여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성의 공사에 관한 본말을 분명히 알도록 해야 할 것이다. - 『정조실록』 정조 20년(1796) 11월 9일

훗날의 일을 짐작이라도 했던 것일까요. 의궤에는 공사의 착공부터 완공에 이르는 모든 과정이 자세히 기록돼있습니다. 건축물의 도면, 축성 방식, 순서는 물론, 당시 처음 고안된 건축 기계에 관한 상세 설명과 사용한 물품들의 수량, 단가까지 치밀하게 적혀있는데요.

“유네스코는 복원된 유적지에 관해서 엄격한 기준을 적용하는데 수원화성은 화성성역의궤가 있었기 때문에 복원의 근거가 명확해지는 거죠.” 조성우 / 수원화성박물관 학예사

역사 속으로 사라질 뻔한 문화재를 다시 살린 일등 공신, 화성성역의궤에서 알 수 있듯, 의궤는 다른 기록물과는 다르게 실용적인 목적도 컸습니다.

국가에 중요한 행사가 있으면 의궤를 작성하여 뒷날의 증빙에 대비하는 것인데 - 『명종실록』 명종 18년(1563) 9월 22일

왜냐하면, 예절을 중시하는 유교 국가 조선에서 왕실 행사 예법의 계승을 위해 의궤를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전통을 물려주기 위한 것이니 잘 따라 할 수 있도록 실용적이어야 하겠죠.

그래서 조선 시대 일반 국정 기록물과는 다른 의궤만의 특징이 있습니다. 글로만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세밀한 그림 자료를 함께 첨부했다는 것인데요.

덕분에 다양한 분야에서 역사의 한 장면을 재현할 수 있습니다. 1828년 효명세자가 어머니 순원왕후의 40세 생신 축하 잔치에서 최초로 선보인 창작 무용. 조선 궁중 무용에서 빼놓을 수 없는 예술가, 효명세자가 직접 창작한 무용의 멋을 오늘날에도 느낄 수 있죠.

이렇듯 의궤 속 자세한 기록들 덕분에 당시 조선 문화의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체계적이고 완벽하게, 당시의 행사 모습을 재현한 이런 자료들은 그야말로 의궤가 가진 가장 독특한 점이라고 설명할 수 있습니다.”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전통 계승의식 덕분에 탄생한 독특한 기록물, 의궤는 200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됩니다.

조선 시대 기록물 ‘의궤’의 현대적 가치는?

의궤는 어떤 내용을 담고 있을까요?
태조 때부터 편찬됐다고 알려진 의궤는 크게는 조선 왕조의 역사와 함께했고, 작게는 왕실의 일생을 담고 있는데요. 왕족이 태어나 태를 보관하는 과정부터 왕세자 책봉, 즉위식, 혼례식, 장례식까지 왕실의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고 왕실에서 일어난 다양한 활동도 자세히 남겼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의궤는 행사와 관련된 각종 정보가 담긴 ‘문서’와 행사의 중요한 장면을 마치 사진처럼 그려 넣은 시각 자료 ‘반차도’, 행사에 사용한 물품이나 건물 등의 단면이나 설계도 등을 상세히 그린 ‘도설’로 구성됐는데요. 그래서 의궤를 보면, 당시의 패션, 기술 등 생활상을 통해 조선의 전반적인 경제, 사회, 문화 특징을 알 수 있습니다.

의궤를 통해 조선 500년 역사의 진면목을 확인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조선 초기 의궤들은 임진왜란 당시 불타버렸는데요. 임진왜란 이후 제작된 의궤들은 잘 보관됐습니다. 어떻게 보관했기에 잘 남아있을까요?

바로 산간지역에 사고를 설치하여 잘 보관했기 때문입니다. 일반 분상용 의궤는 관청과 지방의 사고에 나눠서 보관하고, 왕을 위해 만든 어람용 의궤는 강화도 외규장각에 보관하였는데요.

하지만, 1866년 프랑스가 강화도를 침략하면서 외규장각에서 보관하던 자료 340여 권을 약탈하고 남은 자료 5천여 권에는 불을 지릅니다. 이때 분상용 의궤와 다르게 비단 표지에 선명한 그림으로 채워진 어람용 의궤도 약탈당하는데요. 세월이 흘러 파리국립도서관에서 일하던 박병선 박사의 노력으로 창고 속 의궤들이 세상에 알려집니다.

1993년 프랑스 미테랑 대통령이 방한할 때 『휘경원원소도감의궤』 1권을 돌려받고, 2011년, 5년마다 대여한다는 조건으로 297권의 의궤가 145년 만에 한국으로 돌아왔는데요. 2011년은 일제강점기에 뺏겼던 의궤 158책도 돌려받은 역사적인 해였지요.

“최근에는 (의궤를) 문화 콘텐츠로 활용하는 사례가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것이 가능한 건 그 당시 행사 모습을 정확히 기록하고 그림까지 첨부했기 때문에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널리 알리는 그런 원천 자료로서 의궤는 매우 중요합니다.” 신병주 / 건국대학교 사학과 교수

의궤에 반영된 조선의 기록 정신은 현대에도 이어졌습니다. 생생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 이 기록물들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는데요. 수백 년을 이어온 기록 정신 덕분에 오늘날 우리는 역사에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

[에필로그]
우리가 꼭 알아야할 한국사 속 문화예술 상식

1. 의궤는 유교 문화 전통 계승을 위해 만들어졌다.
2. 다른 조선 국정 기록물에서 볼 수 없는 의궤의 특징은 다양한 그림이다.
3. 1866년 병인양요 당시 약탈 된 의궤를 2011년 프랑스에서 145년 만에 돌려받았다.

해설

1. 의궤의 제작

의궤(儀軌)는 의식(儀式)의 궤범(軌範)을 뜻하는 말로 조선시대 왕실 의식의 주요한 내용을 기록과 그림으로 정리한 책이다. 전 왕대의 의식을 전범으로 삼아 후대에도 그대로 계승하겠다는 의지가 담긴 책으로서, 의궤를 보면 조선의 왕실문화의 진면목이 거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의궤는 조선시대 유교문화와 기록문화의 전통이 가장 잘 구현된 기록물로서도 그 의미하는 바가 크다.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전기부터 이미 의궤가 있었음이 나타난다. 성종 15년 영중추부사 이극배가 1395년 경복궁을 건설한 과정을 정리한 『경복궁조성의궤』에 대해 언급을 한 사례 등에서 이미 조선초기에 의궤의 편찬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최소한 태조 때 시작된 의궤의 전통은 태종 때에도 이어져 태조에 대한 장례식 보고서인 『태조강헌대왕상장의궤』가 편찬되었고, 세종 때에는 정종과 원경왕후의 국장 과정을 담은 의궤, 왕세자빈의 책봉과 관련된 의궤 등이 편찬되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조선전기에 제작된 의궤 중 현존하는 의궤는 없다. 현존 의궤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임진왜란 이후인 1600년(선조 33)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의 장례식을 치루고 이에 관한 의궤를 편찬한 것이다.

조선후기 의궤 편찬은 정치적으로 안정되고 문화 중흥이 전개되던 영조, 정조 시대에 들어와 보다 다양하고 활발해졌다. 특히 영조 시대에는 『대사례의궤』, 『친경의궤』, 『친잠의궤』 등이 새로 제작되었으며, 『가례도감의궤』의 경우에도 전대의 의궤 보다 분량이 많아지고 반차도의 면수도 훨씬 많아지는 등 보다 정형화된 의궤 편찬이 이루어졌다. 의궤는 대부분 손으로 직접 쓰고 그림을 그린 필사본이다. 그런데 정조 시대에 편찬된 『원행을묘정리의궤』나 『화성성역의궤』, 조선후기 왕실 잔치 관련 의궤인 『진찬의궤』와 『진연의궤』 등은 활자본으로 제작되었다. 활자본 의궤를 만든 것은 더 많은 사람들에게 이를 보급하여 축제적 성격을 갖는 왕실 행사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였다.

의궤 편찬은 19세기에도 이어졌다. 순조, 헌종, 철종의 재위 기간은 흔히들 세도정치기라 하지만 의궤 편찬에 관한 한 전대와 큰 차이가 없었다. 의궤 편찬에 큰 변화가 온 것은 고종 시대이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황제가 되었고, 의궤 제작에 있어서도 어람용 의궤를 2부 이상 만들어 한 부는 황제에게, 한 부는 황태자에게 올리도록 했다. 황제에게 올리는 의궤의 표지는 천자만이 쓸 수 있는 황색으로 제작한 것이 주목된다. 조선왕조 시기 가장 마지막에 나온 의궤는 1929년 순종황제와 순명황후의 삼년상을 치른 후 신주를 종묘에 모시는 과정을 기록한 『순종효황제순명효황후부묘주감의궤(純宗孝皇帝純明孝皇后祔廟主監儀軌)』로서, 의궤는 조선이 건국된 이후부터 순종황제가 사망할 때까지 꾸준히 만들어졌다고 할 수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파리국립도서관 등에 소장된 의궤에는 왕실의 출생에 관한 의례를 보여주는 태실(胎室)의 조성에서부터 시작하여, 책례, 관례, 혼례와 같은 통과의례, 왕의 즉위식, 이어 왕의 사망과 추숭 등 일생에 관한 내용들이 망라되어 있다. 왕실의 활동을 담은 의궤로는 왕실의 잔치 의궤, 종묘와 사직 조성에 관한 의궤, 활쏘기 과정을 정리한 대사례 의궤, 어진(御眞)이나 화기(火器), 보인(寶印)의 제작에 관한 의궤 및 영조 시대의 대사례 실시, 정조 시대의 화성 행차 등 왕대별로 수행한 주요 행사들이 의궤로 남아 있는 것이 주목이 된다.

2. 어람용 의궤와 분상용 의궤

의궤 중에서도 왕이 친히 열람하도록 하기 위해 제작한 의궤를 어람용(御覽用) 의궤라고 하는데, 어람용 의궤는 사고(史庫)나 관련 부서에 보관하는 분상용(分上用) 의궤에 비해 많은 정성을 기울여서 제작하였다. 바로 이 어람용 의궤가 강화도 외규장각을 거쳐 프랑스로 약탈된 것이다.

1782년(정조 6) 2월 정조는 강화도에 외규장각 건립을 완료했다. 이를 계기로 외규장각에는 왕실의 자료들을 비롯하여 주요한 서적들이 보다 체계적으로 보관되었으며, 이후 100여년간 외규장각은 조선후기 왕실문화의 보고(寶庫)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1784년에 편찬된 『규장각지(奎章閣志)』에 따르면, 외규장각은 6칸 크기의 규모로 행궁(行宮)의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외규장각은 인조 이래 강화도에 행궁과 전각이 세워지고 왕실관계 자료들이 별고(別庫)에 보관된 것을 계기로, 국방상 안전하고 보다 체계적으로 이들 자료들을 관리할 목적으로 세워졌다. 이로써 외규장각은 창덕궁에 위치하면서 조선후기 문화운동을 선도했던 규장각의 분소와 같은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곳을 ‘규장외각’ 또는 ‘외규장각’이라 부른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외규장각이 완성되자 정조는 규장각에 보관하고 있던 어람용 의궤(儀軌)들을 특별히 외규장각으로 옮겼고, 이러한 전통은 후대 왕들에 의해서도 계승되었다. 어람용 의궤는 표지와 장정이 분상용 의궤 보다 화려하였고, 종이의 재료도 초주지를 사용하여 분상용 의궤에 비해 질이 좋았다. 표지는 초록 비단을 사용하여, 붉은 삼베를 표지인 분상용 의궤와 차이가 있었다. 또한 장정(裝幀)을 함에 있어서도 어람용 의궤는 국화 모양의 장식 5개를 만들어서, 박을정(朴乙丁) 3개를 써서 장정을 한 분상용 의궤 보다 튼튼하게 책을 만들었다. 어람용 의궤에 수록된 글씨와 그림 또한 우수했다. 같은 의식을 기록한 의궤를 비교해보면 어람용 의궤의 반차도 그림이 훨씬 정밀하여 인물의 수염이나 눈매까지 선명하게 표시되어 있다.

의궤에 나타난 조선의 왕실문화

조선시대에는 국가나 왕실에서 거행한 주요 행사가 있을 때에는 행사의 전 과정을 낱낱이 기록한 의궤를 만들어 후대에 참고가 되게 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거행한 궁중 행사의 종류만큼이나 다양한 종류의 의궤가 만들어졌고, 이를 통하여 조선시대 왕실 문화의 모습을 생생하게 파악할 수가 있다.

의궤의 내용과 특징을 쉽게 파악할 수 있는 방안은 ‘왕실의 일생’과 ‘왕실의 활동’이라는 범주로 나누고 이에 해당하는 의궤를 검토해 보는 것이다. 왕실의 출생에 관한 의례를 보여주는 胎室 조성에서부터 시작하여, 冊禮, 冠禮, 婚禮와 같은 통과의례, 왕의 즉위식, 이어 왕의 사망과 관련한 의궤, 추숭과 관련한 의궤 등으로 분류하면 현재 소장중인 의궤 대부분을 망라할 수 있다. 왕실의 일생과 별도로 즉위 이후 의궤에 기록된 주요한 왕실 행사는 ‘왕실의 활동’으로 분류하여 주요한 행사를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왕실의 일생과 왕실의 활동이라는 범주로 의궤를 분류하면 의궤에 기록된 조선시대 왕실 행사의 주요한 내용들을 쉽게 파악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즉 책봉례, 혼례, 장례, 산릉의 조성, 사후 추숭 작업에 이르기까지 왕실의 일생에 관한 의식을 거의 통상적으로 제작하는 의궤와, 大射禮, 火器의 제작, 寶印의 제작, 奴婢推刷都監의 구성 등 각 왕대에 특별히 시행한 행사 기록을 정리한 의궤를 구분하여 정리할 수 있다.

의궤는 조선 왕실의 주요한 활동과 의례를 담은 기록으로서, 조선 왕실의 문화를 가장 압축한 자료로 볼 수 있다. 특히 의궤에는 반차도와 도설과 같은 시각 자료들이 풍부하게 정리되어 있어서 전통 시대의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 보는데 있어서 매우 유용한 자료이다. 의궤에 나타난 기록과 시각 자료는 문화원형으로 활용할 수 있으며, 전통시대 기록문화의 우수성과 그 의미를 잘 보여줄 수 있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자료

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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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정원일기』
  • 『국조오례의』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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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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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혜민, 2013, 「조선 전기 繼妃 선정의 변천과 그 의미」, 『조선시대사학보』 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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