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석기문화의 특성과 전개
무문토기문화의 석기가 지닌 특성은 전 단계 문화인 빗살문토기문화의 석기와 비교할 때 다음 몇 가지 점에서 분명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마연법이 제작에 보편적으로 적용되었다는 점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마연이 신석기문화의 석기 제작에도 채용되었으며 무문토기문화의 석기 중에도 타제에 의한 석기 제작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이 단계 들어서 보편적으로 마연이 각종 석기 제작에 이용되었다. 마연법의 보편적인 이용은 단순히 제작 기법에서의 발전이나 변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마연에 의한 석기 제작은 석기의 형태가 비교적 정제되고 특정한 형태를 이루는 석기의 제작이 타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보다 용이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정비된 형태의 석기가 등장하였으며, 기능에 따른 석기의 정형화를 파악하는 것이 보다 용이해졌다. 무문토기 단계의 석기는 사용면만이 아니라 석기 전체를 마연한 것이 대부분이며 이같이 전면을 마연한 것은 기능적 고려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외적인 균제를 이루려는 의도를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둘째, 마연법의 채용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는 것으로 석기의 종류가 다양해진 점을 들 수 있다. 석기의 제작이 기능에 따라 분화되고 개개 기능에 걸맞는 형태를 지닌 석기로의 정형화가 진행됨으로써 석기의 종류가 다양해진 것으로 파악된다. 정형화에 따른 석기 종류의 다양성과는 달리 석기의 종류가 다양해진 원인으로는 생활 내용의 확대를 상정할 수 있다. 생활 내용의 확대에 따른 석기의 다양성이라는 점은 무문토기 단계에 들어 보편적인 양상을 보이는 농경의 도입과 그에 따른 도구의 출현에서 쉽게 이해될 수가 있다. 또 사회의 발전과 더불어 등장하는 의기로서의 석기, 예컨대 별도끼·달도끼의 예나 목공구의 발전에서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석기 종류의 다양성에서 추론되는 생활내용의 확대는 빗살문토기문화 단계에서 성행한 골각기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는 무문토기문화 단계에서는 확인되지 않고 있어 생활 내용의 확대 폭을 이해하는 데에는 어려움이 있다. 즉 생업경제나 생활기반의 차이에 따라 석기와 골각기의 채용이 각기 다를 수가 있으므로 단순히 석기의 종류가 다양해진 것만으로 생활 폭의 확대를 결론지을 수는 없다. 물론 이미 말한 바와 같이 생활 영역이 확대된 것은 사실이지만 전반적인 양상은 두 문화에 있어 도구 체계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밝혀진 다음 파악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석기 재질의 존재를 꼽을 수 있다. 석기 제작을 위하여 특정한 석질의 선택은 빗살문토기 단계에서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문토기 단계에서는 그같은 재료의 확보라는 점에서 한 단계 발전하여 석기를 제작하기 위하여 미리 손질된 半製品으로서의 재료를 확보하고 있다. 이 석기재료는 집자리에서 다량으로 출토되기도 하며 각형토기 유적에서는 지석묘에 부장되기도 한다. 한편 집자리에서 출토되는 석기 재료 중에는 擦切法에 의하여 떼어낸 흔적이 있는 것이 있으며 이는 이 재료를 이용하여 석기 제작이 집자리 내에서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이 점은 집자리 내에서 종종 출토되는 미완성 석기의 존재나 다양한 종류의 지석이 출토되는 것에서도 확인되는 것이다.
넷째, 석기의 제작에 기술의 집적이 있었고 그같은 기술을 지닌 집단의 존재를 상정할 수 있다. 즉 석기의 제작이 집자리 내부에서 이루어진다고 하더라도 집자리들 모두에서 석기가 제작된 것이 아니고 특정한 집자리를 중심으로 석기 제작이 이루어진 것으로 파악된다. 흔암리유적의 경우 12호 집자리 내부에서는 다양한 석기와 더불어 다양한 지석이 출토되었고 지석이 집중된 지점의 주변에서는 다량의 격지가 흩어진 것이 확인되었다.0278) 그러나 이같은 양상이 유적내 다른 집자리들에서 모두 확인되지는 않으며 따라서 12호를 중심으로 석기 제작이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또 다소 논란의 여지가 없지는 않으나 석기 중에는 파손품을 재가공하여 사용된 것이 있다. 재가공하여 사용된 것은 파손품의 재활용이라는 점에서 파악할 수도 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어느 정도의 불편을 감수하더라도 재가공품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을 가능성을 상정할 수도 있다. 후자의 경우라면 이는 석기의 제작이 용이하거나 보편적으로 석기가 제작된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제작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전문적으로 석기를 제작하는 장인이 존재하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전문 장인의 존재 가능성을 보여주는 유적으로 비록 시기가 늦기는 하지만 강릉 포남동유적이 있다. 이 유적에서는 11점의 반월형석도가 출토되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포개진 상태로 놓여 있었으며 사용하지 않은 것들이다. 이처럼 한집자리 내부에 사용하지 않은 석도가 다량으로 놓여 있는 것은 그 집의 주체가 사용하기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분배될 가능성이 큰 것으로 추정된다. 즉 전문적으로 석도를 제작하여 이를 주변에 분배하였을 가능성이 크며 그런 점에서는 교역을 상정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다섯째, 석기 제작에 있어 장인의 존재를 상정한 것과도 일부 관련되는 것으로 석기의 지역적 편중현상을 들 수 있다. 석도의 경우 살펴본 바와 같이 동북지방을 중심으로 장방형석도가 성행하고, 서북지방의 경우 어형에서 파생된 장주형석도가 성행하는 것처럼 같은 기능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생각되는 석기가 형식에 따라 지역적으로 분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또 동북지방의 경우 석검이 출토되지 않는 것이나 별도끼·달도끼류가 서북지방에 집중된 것처럼 특정한 종류의 석기가 지역적으로 편중된 양상을 보이기도 한다. 이같은 지역별 석기의 구성 내용이나 형식에서의 차이는 생활방식의 차이에 기인하는 부분이 적지 않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한반도가 생태환경에 따라 생활방식의 큰 차이가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점에서 석기제작 주체에 따른 분배 권역과 같은 지역권의 존재를 상정할 수도 있다. 분배 권역과 같은 지역권의 존재는 석검의 경우 경남 해안지역을 중심으로 한 지역에서 정형화된 형태의 석검이 출토되는 것에서 확인된다.
마지막으로 실용성을 가지지 않은 석기가 출현하는 점을 들 수 있다. 기능상 실용품과 구별되는 형태의 석검이 출현하며 그 석검들이 무덤에 부장되고 있으며 이 점은 석촉의 경우에도 확인된다. 이와는 달리 별도끼나 달도끼와 같이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기도 있으며 이는 의기로서의 기능을 가진다고 생각된다. 의기로서의 도구들은 실생활에서 나름의 기능을 가지는 것으로 볼 수도 있으나 무덤에 부장하기 위한 것의 경우는 실생활에서의 이용과는 거리가 있다. 이처럼 의기로서의 석기나 부장용 석기의 존재는 무문토기문화가 빗살무늬토기문화보다 발전되고 확대된 생활에 기반을 두고 있음을 말해준다.
석기는 용도를 중심으로 무기류, 생활용구, 의기류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럴 경우 그 기능에서 얼마간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대체로 석촉 중 일부 형식과 석창 등은 무기류로 파악할 수 있으며, 별도끼·달도끼류는 의기로 분류할 수 있다. 이와는 달리 무문토기문화 단계의 석기는 한반도 내에서의 출현시기를 중심으로 크게 3분할 수 있다. 첫째로 석부들 중 일부 형식의 석부와 연석·지석 등과 같이 빗살문토기 단계에서부터 계속된 것이 있다. 두번째로는 석검·석도·환상석부와 같이 무문토기 단계에 출현한 것이 있다. 세번째로는 유구석부·석제검파두식 등처럼 무문토기문화 후기에 출현하는 것이 있다.
첫번째 부류의 석기는 대체로 실생활과 밀접한 것들로 이들 석기는 무문토기문화에서도 빗살문토기문화에서와 마찬가지로 계속 사용되고 있으며 형태상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석촉은 일부 계승되는 것도 있으나 빗살문토기문화와 형식상 다른 것이 무문토기문화에서 출현하고 있다. 또 석부의 경우에도 보다 정제되고 다양한 형태의 석부가 등장하며 형식에 따라 출토되는 빈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같은 차이는 비록 빗살문토기문화와 연속되는 석기들 중 지석처럼 동일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이 있는 반면, 사회와 생활경제의 확대나 변화에 따라 석기 형태에서의 변화가 발생한 결과로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석촉의 경우 즐문토기문화에서 무경식석촉이 대종을 이루었음에 비하여 무문토기문화에서는 유경식석촉이 주류를 이루는 것은 무문토기문화 집단이 토착문화의 석촉을 개량, 발전시킨 것이 아니고 무문토기문화 나름의 석촉을 보유하고 있음을 뜻한다.
무문토기문화는 요령지방문화와 관계가 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것은 석도, 유경식석촉, 그리고 환상석부, 다두석부에서도 방증된다. 즉 이들 석기는 얼마간 시간차가 있을지 모르나 무문토기와 더불어 한반도에 유입되었으며 석도에서 분명히 파악되는 것처럼 요서지방과 요동지방의 문화와 연결된다.
무문토기문화의 석기는 분포상 몇 개의 지역군으로 나눌 수 있으나 크게 동북계열과 대동강유역을 중심으로 한 서북계열로 나뉜다. 이것은 토기상에서도 동북계열이 홍도·공렬토기임에 비하여 서북계열에서는 각형토기가 분포되어 있는 것에서도 분명하다. 석기에 있어서 우선 서북계열의 석검은 유경식이 주종을 보인다. 또 유단석부가 집중되며, 환상석부류가 밀집되어 있다. 그렇기는 하나 석도·석촉 등에서는 두 계열간의 차이를 볼 수 없다. 한편 중부이남에서는 두 계열의 석기가 모두 보이나 토기에서의 경우처럼 동북계가 보다 강하게 영향을 미친 것 같다. 다만 근래 많은 조사가 이루어진 전남지방의 경우 서북지방의 석기양상을 보이는 석기가 출토되고 있는 점은 앞으로의 연구과제가 아닐 수 없다.
무문토기문화의 석기는 시간의 흐름에 따라 처음 출현 때와는 다른 양상을 보인다. 그것은 첫째 유구석부, 석제검파두식과 같은 새로운 종류의 석기가 사용되는 한편, 환상석부·별도끼·달도끼·연석·피홈이 있는 유경식석검처럼 사용이 감소되거나 소멸되는 것이 있다. 또 이와 더불어 석검과 석촉에서 볼 수 있듯이 부장용 석기가 제작되며 반월형석도에서 삼각형석도가 발생한다. 이같은 양상이 동시에 전개되지는 않았을지도 모르나 상호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같은 추정이 가능하다면 이것은 검파두식의 예에서처럼 청동검의 한반도 유입과 관계가 있다. 즉 새로운 석기의 출현은 청동검을 동반한 문화유입에 의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새로운 문화의 유입에 의하여 보다 효율적인 도구로 기능이 대체됨으로써 석기의 사용이 감소 또는 소멸된다. 그리고 토착문화의 석기 중 일부는 실용이 아닌 부장용으로의 기능 분화를 보이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이같은 점은 첫째 유경식석검은 서북지방에서 세형동검의 성립 이전에 소멸하고 있다는 점에서 방증된다. 둘째로 유구석부가 출토되는 초기유적인 송국리에서 삼각형석도가 공반되며, 요령식동검과 공반된 석검·석촉에서 그 비실용성을 엿볼 수 있는 데에서도 방증된다.
석기문화에서 볼 수 있는 이같은 변화는 토기와 묘제에서도 알 수 있다. 즉 토기에서는 점토대토기·흑도가 출현하며 묘제에는 석곽묘·옹관묘가 출현하고 있다. 이것은 무문토기문화의 대폭적인 변화를 의미하며, 이같은 문화내용의 변화가 석기에도 반영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0278) | 崔夢龍, 앞의 글(19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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