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향악활동
향악은 본래 신라의 백성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와 춤이었는데, 그런 가무전통이 궁중에 소개되어 노래와 춤 그리고 악기연주에 의해서 새로운 형태의 樂歌舞로 발전하였고, 후에 지배계층에 의해서 궁중의 음악문화로 정착하였다. 그런데도 신라향악의 전통을 전승한 고려의 향악을 궁중 중심의 음악문화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는 모두 문헌사료의 한계성 때문이다. 다행히≪고려명현집≫은 궁중 밖의 사회에서 연주된 향악을 보여주는 문헌사료이므로, 고려사회의 향악활동이 비교적 자세하게 드러나 있다.
고려 후기 대표적 문호의 한 사람인 李奎報(1168∼1241)는 무신정권 아래서 출세의 가도를 달린 문신이었지만, 특히 가야금을 즐긴 풍류객이었다.≪東國李相國集≫에 전하는 몇 가지 사료를 통해 그가 가야금을 상당히 즐겼음을 알 수 있다.0770) 특히 그가 즐긴 풍류는 가야금으로 반주한 노래이거나 가야금독주곡이었다. 가야금 이외에 거문고가 고려문사들에 의해서 애용되었다는 사실은 李齊賢(1287∼1367)의≪櫟翁稗說≫에서 확인되며, 崔滋(1188∼1260)의≪補閑集≫이나 鄭夢周(1337∼1392)의≪圃隱集≫에 보이는 琴도 거문고로 해석된 바 있다.0771) 이규보가 官妓가 타는 비파소리를 듣고서 지은 시 가운데 기녀들이 연주한 비파는 향비파일 것이고, 향비파는 노래의 반주 또는 기악독주곡의 연주에 사용되었으리라고 짐작된 바 있다.0772)
고려문사들이 애용했던 가야금이나 거문고, 그리고 기녀들의 향비파는 모두 신라의 대표적인 세 현악기였던 사실에서 신라 삼현의 전통이 고려사회에 그대로 전승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사회의 삼현은 주로 노래의 반주악기로 사용됐으며, 가끔 기악독주곡을 연주하기도 했다.
중금이나 대금이 고려사회의 승려들에게 널리 불려져 묘련사의 무외국사는 젓대를 잘 불었다고 한다. 대금은 고려문사들의 풍류생활과 관련된 향악기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즉 고려사회의 승려나 문신들에 의해서 연주되었던 삼죽의 음악은 주로 노래의 반주형태 또는 기악독주형태였다.07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