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기악과 잡기의 전통
고려사회에서 공연된 기악과 잡기의 전통은 고취악의 경우처럼 삼국시대의 공연예술에 뿌리를 두었다. 백제사람 味摩之가 일본에 전해준 伎樂이 탈춤놀이의 한 형태였으며,0824) 국선의 가무백희와 관련된 팔관회가 신라의 전통에서 유래되었다. 백제의 탈춤이나 신라의 팔관회가 통일신라 때도 수용되어 새로운 가무전통의 한 갈래로 발전하였다가, 그 전통이 다시 고려의 가무백희로 이어졌다. 인종 원년(1123) 당시 고려의 백희연주자가 수백명으로 모두가 민첩했다고0825) 한다.
고려조정의 궁중의식과 관련 아래 기악과 잡기가 공연된 경우는 세 갈래로 구분될 수 있다. 첫째는 嘉禮인 팔관회와 연등회였고, 둘째는 凶禮인 儺禮의식이었으며, 셋째는 기타의 궁중의식이었다. 국선이 가무백희로 용신을 즐겁게 하여 복을 비는 팔관회가 신라의 전통에서 유래되었으므로, 고려의 가무백희는 팔관회의 국선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다. 성종연간 당시에 사선악부가 잡기로 천시되었기 때문에0826) 팔관회의 가무백희는 국선에 의해서 공연될 수 없었고, 세속인에 의해서 공연되었다. 따라서 고려의 기악과 잡기는 11세기경부터 민간연예인들에 의해서 세속화의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 공연예술이었다.
2월에 등불을 밝히고 임금과 백성이 가무로 나라의 태평과 안녕을 기원하던 불교행사의 하나가 연등회였는데, 연등회에서 가무백희의 역할은 매우 중요했다. 연등회의 가무백희는 왕립음악기관에 소속된 敎坊舞隊의 춤과 함께 공연되었다.0827) 불교행사와 관련된 가무백희는 연등회와 같은 국가적 규모의 행사 이외에 절의 낙성식 때에도 공연되었다.0828)
섣달 그믐에 가면을 쓰고 나쁜 귀신을 쫓아내는 궁중의식이 나례인데, 나례의식 끝에 삽입되는 놀이판에서 가무백희가 공연되었다. 예종 때 冬季大儺儀에서 잡기가 倡優에 의해서 공연되었는데,0829) 창우의 숫자로 보아 아주 큰 규모의 나례의식이었다. 고려의 잡기는 팔관회·연등회·나례의식 이외에 다음과 같은 경우에도 공연되었다.
고려의 잡기는 위장의식에서도 필수적이었다. 법가위장의 경우를 실례로 들면, 중앙아시아의 복카라(Bokhara)지방의 기악인 安國伎, 몽고지방의 기악 곧 高昌伎, 인도의 天竺伎와 같은 외국의 기악이 공연되었다.0830) 연등위장에서도 안국기와 잡기가 공연되었다.08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