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잡기의 창우와 경시서의 여기
팔관회·연등회·나례·위장의식과 관련된 고려의 기악과 잡기는 왕립음악기관의 악공과 여기보다도 민간예능인으로 알려진 창우들에 의해서 공연되었다. 궁중에서의 음악과 춤은 왕립음악기관의 악공이나 여기들에 의해서 공연되었을 것이겠지만, 줄타기·땅재주·불꽃놀이 등과 같은 곡예나 놀이의 공연은 전문적인 예능인들의 몫이었다. 기악과 잡기의 연예인 창우는 倡妓(또는 娼妓)·優人·禾尺才人 등 여러 명칭으로 불렸다.0832)
고려사회에서 창우는 천인 출신의 낮은 계층에 속했다.≪鷄林類事≫에 의하면, 창이란 水作 즉 무자리인 水尺을 의미했는데, 수척은 楊水尺을 가리켰고, 양수척은 백제 때부터 떠돌이생활의 柳器匠과 창우를 업으로 삼은 사람들이었다.0833) 고려시대 가무백희의 주인공 창우들은 주로 왕족 중심의 귀족사회를 상대로 공연활동을 전개했지만, 백성을 상대로 공연활동의 범위를 차츰 넓혀가기 시작하였다.
시장의 상거래를 관장했던 京市署에 많은 女妓들이 소속되어 있었는데, 이 여기들의 임무는 주로 해상무역의 종사자들을 상대로 벌린 가무활동이었다. 고려의 대외무역활동은 예성강의 하류에 있는 碧瀾渡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지만, 외래상인들은 주로 개경에 머물렀기 때문에, 그들을 상대로 벌린 연예활동도 개경에서 이루어졌다. 경시서의 여기들이 그런 연예활동의 주인공들이었는데, 인종 원년 당시 경시서 소속의 여기는 모두 300명이었다.0834) 그러므로 그들은 궁중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대악서의 여기 260명이나 관현방 소속의 여기 170명과는 공연활동의 성격상으로 서로 구분되었다.
창우의 기악과 잡희 그리고 여기들의 가무활동은 고려 말기에 이르면서 그 물줄기의 폭을 넓혀 나갔다. 원나라의 절대적 영향력 아래서 그들의 춤과 노래인 胡舞와 胡笳를 포함한 胡樂이 개경에서 성행하였고, 또 원나라의 공연예술인 胡漢雜戱도 창우의 가무백희에 제외될 수 없었다.0835) 호악과 호한잡희와 같은 외래공연예술은 고려 후기의 창우나 여기들에 의해서 수용되었고, 그것은 고려 후기에 이르러 가무백희의 발전에 이바지하게 되었다
<宋芳松>