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사원에서의 조면과 양주업
우리 나라는 풍토상 밀의 소출이 적었으므로 고래로부터 쌀과 보리·조로 만든 음식이 상용되고, 밀가루로 만든 국수·유밀과·霜花 등은 특별음식의 하나였다. 이런 실정에서 고려시대에 밀가루로 만드는 유밀과·상화 등이 성행하고 釀酒를 위한 누룩제조에 밀이 소요되어 부족한 밀을 중국으로부터 수입하였다. 또 밀을 제분하는 데는 인력이 많이 소요되지만 고려의 사원은 불교신앙의 본거지로서 승려·노비·佃客 등 인력이 많았고, 왕실·귀족 등의 賜與田·施納田 등 물적 자원이 풍부하였다. 이러한 인력과 재력으로 수공업품과 기호식품을 생산하고 판매하였으며, 그 중 양주의 규모가 방대하여 通度寺에서 제조한 누룩이 영남 일대의 민간수요를 충당하였다고 한다. 이토록 사원의 양주업이 성행하면서 사원 본연의 자세를 혼란케 하는 예가 많았으므로 현종 원년(1010)과 12년에는 僧尼의 술빚기와 사원의 술장사, 채소장사 등을 법령으로 금한 바가 있다.1190) 그러나 현종 18년 6월에 양주의 庄義·三川·靑淵寺 등에서 나라의 금령을 어기면서 양주에 소비한 쌀이 360여 석에 이를 정도로1191) 사원의 양주업과 판매행위에는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다른 측면에서 보면 양주업이 크게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나라의 술은 곡물로 빚은 탁주·약주류가 전통이며,≪三國志≫ 위서 동이전에서는 고구려사람이 藏釀을 잘한다고1192) 하였고 당나라 때의 시문에도 “한잔의 신라술이 능히 녹일까 두렵다”고 읊을 정도로 술빚기 솜씨가 옛부터 좋았던 것 같다. 고려의 술에 관해≪고려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고려에는 찹쌀이 귀하여 멥쌀로 누룩을 섞어 술을 빚는데 빛깔이 짙고 맛이 독해 쉽게 취하고 속히 깬다. 왕이 마시는 것을 良醞이라 하는데 左庫의 맑은 법주이다. 거기에도 두 종류가 있으며 술항아리는 질그릇으로 담고 누런 명주로 봉해 둔다(徐兢,≪高麗圖經≫ 권 32, 器皿 3, 瓦尊).
또한≪동국이상국집≫에서는 새로 술을 빚어 맑은 술을 거르면 3∼4병을 얻기가 어렵다고 하였으며≪목은집≫은 단오일이면 浮蟻酒에 창포꽃을 띄우고, 중구일에는 국화주에 달그림이 비친다고 알려주고 있다. 이외에 고려가요≪翰林別曲≫ 등에서는 황금주·백자주·송주·예주·죽엽주·이화주·오가피주 등이 있었음을 알려주고 있으며 포도주도 있었다.
한편 사원에서 국수를 뽑아 시장에 내다 팔았다. 이렇게 되는 과정에서 그 동안 국수반죽을 손으로 밀어 만들던 것이 기계화되어 국수틀로 눌러 뽑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