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진휼
진휼은 식량을 주로 하고 염·장·의·포 등의 현물이나 혹은 돈을 지급하며 기민의 급박한 기아상태를 해제하는 것이다. 세종 원년에는 흉황과 기 근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수령이 전심으로 진휼해야 하므로, 각 도의 관찰사와 수령관이 분담해 검찰한 결과를 매월 말 조정에 보고케 하여 그것으로 상벌의 기준을 삼도록 했으며, 또 조정의 관리를 파견·조사하여 단 한 사람 의 기사자가 발견되어도 무거운 죄로 다스리게 하였다. 그런데 이 같은 국왕의 유시는 세종시대에만도 수시로 내려졌다.
세종 원년 5월에는 중부지방 4개 도의 기민 수, 진휼곡 수, 진휼장 수가 보고되고 있는데 충청·경기·황해·강원도의 기민 수는 186,000여 명에 진휼곡은 약 15,000석, 진휼장 수는 1,616석이었다.
기민의 진휼 기한은 새 곡물이 익어 기아상태가 완전히 해소될 때까지로 정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리고 기민 1인에게 1일간 지급되는 진휼곡의 수량은 일정하지 않았다. 세종 6년 정월에 시행된 강원도 각 관 기민의 진제규식에는, 15세 이상은 1일에 米 4홉·豆 3홉·■ 3홉, 11세∼15세는 미 2홉·두 2홉·장 0.5홉, 2세∼10세는 미 2홉·장 0.5홉씩을 지급키로 하였으며, 다른 도에서도 이것을 따르도록 하고 있다.
그리고 점차 심각한 사회문제로 등장한 진휼사업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각 도에 賑濟敬差官을 분견하였는데, 세종 4년에는 전국에 12명의 朝官을, 5년에는 4명, 16년에는 5명, 17년에는 4명, 27년에는 1명의 경차관을 내보내어 진휼사업을 독려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세종 27년 2월 경기도 경차관에게 내린 賑恤事目의 내용은 다 음과 같다. ① 기민 중 나이가 많거나 병이 들어 관아에 나와 환자[還上]를 직접 받아갈 수 없는 사람은 가져다 줄 것, ② 수령이 앞서 환자를 虛錄한 것 을 보충하기 위하여 진제할 때 그 수량을 줄이는가를 상세히 살필 것, ③ 봄철이니 모자라는 진제미를 보충하기 위해서 산채 등을 많이 캐어 섞어 먹도록 할 것, ④ 여러 날 굶주린 사람에게 漿水를 마시게 하면 즉사하므로, 먼저 粥水를 식혀서 천천히 먹여 허기를 면하게 한 뒤에 밥을 줄 것, ⑤ 飢流民은 그들이 머물고 있는 곳에 진제장을 설치 구휼하고, 농사철이 되면 각기 원적지로 돌려보낼 것, ⑥ 행정구역상 본관과 거리가 먼 곳의 기민은 가까운 고을에 나가 진제미를 받아가게 할 것, ⑦ 깊은 산골과 외떨어진 곳의 기민을 먼저 고찰할 것, ⑧ 진휼사업에 진력하지 않는 監考·色掌은 즉시 論決하고, 수령은 보고한 뒤에 죄를 줄 것 등이었다.
한편 흉황과는 다른 인위적 재해가 발생했을 경우에도 진휼대책을 세웠다. 세종 11년 3월 도성의 가옥 40여 호가 화재를 입었을 때, 또 17년 정월 강 원도 강릉부의 민가가 화재를 당했을 때에도 각각 진휼곡을 지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