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시식
기류민에게는 먹을 것과 잠잘 곳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들에게는 특별 구급책인 施食을 베풀어야 하는 것이다.
세종대에는 기류민의 발생을 막기 위하여 關津의 요로에 파수인을 세우기 도 하고, 각 고을에 방호소를 설치해 이를 막기도 했으나 근본적인 대책이 없는 한 근절될 수는 없었다.
세종 4년(1422) 12월 失農州郡에는 모두 진제장을 설치케 하였다. 그런데 이 해에는 북부 4개도에 기근이 심해서 풍년이 든 전라·경상도에 流移하는 자가 많았지만 조정에서 이를 묵인했기 때문에 기사자는 적었다. 동 19년 정월에는 중·남부 5개도에 기류민이 발생하여 각 도마다 두 세 곳에 진제장을 설치해서 관찰사의 책임 아래 구제케 하였다.
그리고 국왕은 특히 충청도의 심한 기근을 우려해서 都巡問賑恤使와 종사관을 임명 파송하면서 다음과 같은 진흘사목을 지시하였다. ① 기근이 심한 지방에 진제장을 따로 설치해서 米粥·黃角·菜藿등의 물자를 지급하고, 식견이 있는 자나 승도를 뽑아 그 업무를 담당케 한다. ② 기류민의 동사를 막기 위해 土宇를 설치하고 衣單者·老幼者·病者 등을 입거시켜 구료한다. ③유이민의 집을 부수거나 그들의 밀·보리를 뽑지 못하도록 이웃 마을에 看守 금지케 한다. ④ 凍餒者·餓死者를 즉시 보고치 않는 감고·색장은 죄를 주고, 제대로 구료치 않아 죽게 한 수령은 죄를 물어 降職還任하되 구황에 공이 있는 자는 加資한다. ⑤ 구황이 절박한데 조건이 미진하면 우선 편의대로 시행하고 보고한다는 등이었다.
세종 24년 정월에는 황해도에, 이듬해 정월에는 강원도 嶺西 각 관에 진 제장을 설치 운영케 하였다. 또 같은 해 12월에는 북부 4개도 관찰사에게 유시하여 진제장에 토우를 지어 溫暖에 힘써서 동뇌를 막게 하였다.615)
한편 세종 5년 3월에는 城底 10리의 비농민과 각 도 移來飢民 270명을 진제했으며, 동 17년 4월에는 경중 5부와 성저 10리의 식량이 떨어진 사람과 기류민을 동서확인원으로 보내어 구휼케 하였다. 이듬해 가을에는 각 지방 기류민 1,000여 명을 수용키 위해 普濟院·利泰院에 진제장을 설치했으며, 한성부 낭청 3인을 뽑아 업무를 분장시켰다.
세종 5년 10월, 전국적인 흉황으로 풍년이 든 전라도에는 각 도에서 많 은 기민이 모여 들었는데, 다른 도의 기류민 수를 집계해 보면 충청도가 가 장 많은 2,394명이고 다음 경상도 1,455명, 강원도 1,000여 명의 순서로 전체 약 5,800여 명이다.
다음으로는 기류민의 棄兒가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4년 11월에는 수령과 驛丞에게 명해서 기아를 직접 감독하여 기르게 했으며, 동 17년 9월에는 기아의 부모를 推鞠하는 한편 사실을 보고치 않은 관리도 처벌하겠다고 하였다. 또 동 18년·19년·26년에도 기류민이 버린 각 지방 의 기아를 里正의 책임으로 부양자를 정해 주게 하고, 관청에서는 그들에게 식량과 의복을 지급케 하였다.
그런데 각 진제장의 급식 때, 허기진 기민이 뜨거운 죽을 급하게 퍼먹고 몇 발자국을 걷지 못하고 땅에 쓰러져 죽는 일이 많았다. 이에 조정에서는 중국의「何長者救飢法」을 채택하여 기민의 사망을 막고자 했다.「하장자구 기법」이란 원나라 사람 何敬德이 大德 11년(1307) 杭州의 기민들을 구제하 였던 방법인데, 그는 이웃의 기민들이 관청에서 끓여 주는 뜨거운 죽을 급히 먹고 100명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 남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전날 밤에 미리 죽을 쑤어 큰 독에 담아 두었다가 이튿날 아침에 그 식은 죽을 기민에 게 먹였더니 죽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는616) 데서 유래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