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고려사전문≫
참월한 용어에 대한≪수교고려사≫의 직서주의가 변계량 등에 의해 좌절된 후, 세종은≪고려사≫가 완성되지 않은 책이라고 인식하였다.211) 따라서 세종 13년(1431) 경연석상에서≪고려사≫가「宗」을「王」으로 고쳐 써서 그 진실하지 못한 점이 많으니≪태종실록≫의 수찬작업이 끝나는 대로≪고려사≫를 개수하고 싶다212)는 뜻을 밝혔다. 그러나 개수를 위한 간헐적인 정지작업을 거친 후213) 본격적인 개수작업은 세종 20년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 3월 許詡가 고려사를 기전체로 쓸 것을 건의하자 권제가 반대하여 체재에 대한 논란이 있었고,214) 이어 7월에는 우왕과 창왕의 칭호서술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다.215) 그리고 세종 21년에는 王氏가「龍孫」이라는 것을 그대로 사책에 편찬해 넣도록 하였다.216) 그리하여 세종 24년 8월에 신개와 권제 등에 의해 상진되었다.217) 개찬작업에는 신개와 권제 이외에도 安止·南秀文·李先齊·鄭昌孫·辛碩祖·魚孝瞻 등 젊은 사관들이 참여하였다.218) 편찬에 이용된 자료는 세종 6년에 편찬된≪수교고려사≫를 기초로 하여≪고려실록≫과 문집 등이 이용되었으므로 직서주의의 편찬원칙과 편년체의 서술체재에 따라 이루어졌다. 이를 일명≪權草≫·≪紅衣草≫라고도 하며 혹은≪高麗史全文≫이라고도 하였는데,219) 현전하지 않는다.
이 책에서 보완 개수된 것은 크게 두 가지고 첫째≪고려사전문≫이라는 명칭에서 보여지듯이≪고려실록≫을 통하여 소략한 기사를 많이 보충하여 그 내용을 풍부히 하였다는 점, 둘째 고려왕조에서 사용된 용어를 원래의 기록대로 직서하였다는 점이다. 이에 따라 이전의 고려사 기술에는 왕을 칭하지 않고 禑·昌이라고 썼는데,≪고려사전문≫에서는 표제를 廢王禑·昌이라고 기록하고 재위 때의 기사에서는 당시 신하들이 칭한「王」또는「上」을 그대로 쓰게 하였다.220)
그런데 그 체재에 대하여 기전체로 편찬되었을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고려사전문≫은 편년체로 편찬되었다. 세종 20년 3월의 기사를 보면 승지 허후가 이제현의≪사략≫이후 고려사의 편찬이 편년체로 이루어졌는데, 중국이 역대 사서가 모두 기전체로 편찬되었다는 사실을 들어 기전체로 할 것을 건의하자, 세종은 권제를 불러 견해를 물었다. 그는 고려사의 본래 사료가 소략하기 때문에 기·전·표·지로 나누어 기술한다면 역사서의 체재를 갖추기 어렵다고 반대하였다.221)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고려사전문≫은 편년체로 편찬된 것이 분명하다.
이와 같은 경위로 찬진된≪고려사전문≫은 세종 30년에 일단 인출되었으나, 교정과정에서 인물평가가 공정하지 못하다는 점이 제기되어 반포가 중단되었다.222) 그리하여 세종 31년 정월 김종서·정인지·이선제·정창손 등에게 개찬을 명하였다.223) 뿐만 아니라 이러한 역사편찬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문제는 편찬에 참여한 권제·안지·남수문 등을 처벌하는 옥사로까지 확대되었다.224) 요컨대≪고려사전문≫은 舊史의 오류를 시정하고 그 내용을 상세히 보충하였으나, 수사에 공정하지 못한 점이 많아 결국 반포가 중지된 것이다.
이 책의 문제점은 권제가 개인적 情理에 따라 사실을 증감한 점, 남의 청탁을 받고 고쳐 쓴 점, 자기 조상에 대한 기술이 사실과 다르게 기록된 점 등이었다. 결국≪고려사전문≫은 편년체의 역사서로 내용이 크게 보완·시정되었으나 역사서술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여 반포되지 못하였다.
211) | ≪世宗實錄≫권 50, 세종 12년 11월 경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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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 | ≪世宗實錄≫권 51, 세종 13년 정월 경인. |
213) | 그것은 세종이 춘추관에 전지하여 고려사의 편찬에서 편년체의 장점을 주장한 점을 들 수 있다(≪世宗實錄≫권 57, 세종 14년 8월 병신). |
214) | ≪世宗實錄≫권 81, 세종 20년 3월 을사. |
215) | ≪世宗實錄≫권 82, 세종 20년 7월 경인. |
216) | ≪世宗實錄≫권 84, 세종 21년 정월 신묘. |
217) | ≪世宗實錄≫권 97, 세종 24년 8월 기해. |
218) | ≪世宗實錄≫권 123, 세종 31년 2월 계유에≪高麗史全文≫의 찬자들을 처벌하는 내용의 기사를 통하여 알 수 있다. |
219) | ≪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 한편 이 때 梁誠之가≪高麗史全文≫의 간행을 건의한 점으로 보아 그 뒤에 같은 편년체로 편찬된≪高麗史節要≫의 반포에도 불구하고 이를 보완할 수 있는 내용이 상당히 수록되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
220) | ≪世宗實錄≫권 82, 세종 20년 7월 경인. |
221) | ≪世宗實錄≫권 81, 세종 20년 3월 을사. |
222) | ≪成宗實錄≫권 138, 성종 13년 2월 임자. |
223) | ≪世宗實錄≫권 123, 세종 31년 정월 기유. |
224) | ≪世宗實錄≫권 123, 세종 31년 2월 계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