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치개혁론
가. 권력구조 개편론
조선 후기 실학에서는 성리학적 왕도정치론에 의해 조선왕조를 유지하려 했던 성리학적 지도이념에 대항하여 삼대의 왕도정치론적 경세론이 상대적으로 더 중요함을 주장했다. 그들은 원초유학적 왕도정치론을 부연하는 차원에서 부국강병론적 정치개혁론을 전개해 나갔다. 그리고 왕권을 사회의 중심축으로 삼아 개혁의 주도권을 왕실 혹은 중앙정부에서 장악해야 함을 주장하던 쪽이었다. 그들은 지방의 사족이나 벌열이 아니라 왕권에서 사회개혁의 추진력을 구하고자 했다. 그러므로 실학사상은 근본적으로 왕실중심론 내지 왕권강화론의 성격을 나타내고 있었다.439)
그들의 정치개혁론은 중세사회 해체기 왕권의 약화를 꾀하는 시도가 집요하게 전개되던 상황에서 제시된 것이었다.440) 그러므로 실학자들이 제기한 왕권의 주도적 역할을 전제로 한 개혁론이나 왕권강화에 관한 직접적 주장은 당시의 정치현실에 대한 비판을 함축하고 있었다. 그러나 실학자들은 새로운 사회세력의 발흥을 예견하거나 파악하지 못했고, 이 왕조의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서 기존 체제의 일부인 왕권에서 그 추진력을 구하려 했다. 이것은 실학자들의 발상이 지닌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로 인해서 실학사상이 근대적 정치사상으로 작용하는 데에는 문제점을 갖게 되었다.441)
실학자들이 왕정을 실현할 추진력으로 군주의 위치를 강조한 예는 유형원에게서 확인된다.
仁主가 뜻을 세우지 않으면 만사는 본래 말할 것이 없다. 과연 人主가 학문이 밝고 뜻을 정했다면…스스로 실효를 거두게 될 것이다(柳馨遠,≪磻溪隨錄≫권 10, 敎選之制 하 貢擧事目).
그는 군주의 일심을 강조했다. 이익의 경우에도 군주의 일심을 중요시하여 “나라의 治亂은 군주의 一心에 달려 있다”고 하면서 정치의 주체를 군주에 설정했다.442) 이와 같은 발상에서 홍대용은 국왕이란 단순히 군림하거나 상징적인 존재가 아니라 실제로 통치하고 최고의 권력을 행사하는 강력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443) 정약용은 “仁主의 一心이 바로 잡히면 백관과 만민이 함께 運化하게 된다”고 말했다.444) 정약용의 경우에도 개혁의 가장 기본적 원동력을 왕권에서 구하고자 했다.
이처럼 실학자들은 권력구조에 있어서 왕권의 중요성을 강조해 왔다. 실학자들이 주장했던 왕도정치론은 왕권을 국가통치의 핵심으로 설정하려던 국왕의 입장에서도 적극적으로 수용할 여지가 있었다. 그런데 영조·정조년간에는 국왕이 모든 신민은 자신의 赤子임을 강조하던 ‘均是赤子論’이 제시되었고, 서민 위에 국왕과 사족을 배치하려는 사족측의 주장에 대항하여 국왕 자신을 우위에 놓고 귀족과 서민을 동렬에 두려던 왕권강화론이 제기되고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분위기에서 군주의 일심에 기대를 거는 실학자들의 정치사상이 강화될 수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왕도정치론과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권력구조 및 관료제 개혁론이 제기되고 있는 사실을 주목하게 된다. 이러한 예를 우리는 이익이나 홍대용 그리고 정약용의 경우를 통해서 확인하게 된다. 이들이 제시하고 있는 권력구조 개혁론의 내용을 간략히 검토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익은 주자의 왕도론과 달리 새로운 왕도정치론의 전개를 시도하며, 刑政과 같은 외재적 규율을 주요 통치수단으로 하는 覇道까지도 인정하여 이른바 王覇竝用論을 수용하였다. 이것은 계속되는 換局의 결과 정국운영을 독주하였던 노론의 전횡에 따른 폐단을 제거하고 새로운 정치체제를 구축할 의도에서 제기된 것이었다.
권력구조 개편론은 18세기 홍대용에 의해 다시 제기되었다. 홍대용은 왕조체제의 정당성이나 왕의 존재에 대해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고, 왕권의 강화에 찬성하고 있었다. 그는 국왕이 법제적으로 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관리에 대한 임면권을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그는 종래 왕권을 견제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었던 諫官制度의 혁파를 강조하였고, 왕권강화를 위해 왕위는 長子相續의 원칙에 따라 계승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국왕에 대한 백성의 충성을 특히 강조했다.
19세기의 대표적 실학자 정약용의 경우에도 그의 一表二書를 통해 군주권의 절대성과 우월성을 내용으로 하는 왕권강화론을 제시했다. 그는 벌열이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전횡하던 상황에서 국가의 공권력 회복을 위해서 왕권의 절대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주장하는 왕권은 공권력을 대표하는 권위의 상징일 뿐으로 절대왕정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영·정조대 탕평정책에서 추진되었던 왕권강화책과도 일정한 거리가 있었다. 정약용은 국왕이나 관료가 공적 관료기구를 통한 권력행사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파악했다.
439) | 정약용의 초기 저작인<蕩論>·<原牧>을 검토해 보면 民의 정치적 권력을 인정한 측면도 있었다(趙 珖,<丁若鏞의 民權意識硏究>,≪亞細亞硏究≫56, 1976;林熒澤,<茶山의 ‘民’主體 政治思想의 이론적·현실적 근저>,≪茶山의 政治經濟 思想≫, 창작과 비평사, 1990). 정약용에게서 나타난 民에 대한 인식은 그를 전후한 실학자들과 구별되는 면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은 초기의 저작들에게서 나타난 것이었고, 후기에 이르러 자신이 대표적 개혁서로 내세우는 一表二書의 단계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개혁론을 제시하면서 왕권을 개혁의 주체로 삼고자 하는 노력을 집중적으로 전개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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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0) | 국가사회에서 사족의 위치를 상대적으로 강화하려던 구체적 사례는 禮訟의 과정에서도 확인된다. 禮訟에서는 王室喪事를 公家之禮나 私家之禮 중 어느 것으로 해석할 것인가가 주된 문제였다. 이는 국왕과 사족의 禮가 同禮인지 異禮인지에 관한 문제이기도 했다. 왕실의 권위를 지지하는 입장에서는 이를 公家之禮와 異禮로 보고자 했다. |
441) | 金泰永, 앞의 글, 315쪽. |
442) | 李 瀷,≪藿憂錄≫1, 經筵. |
443) | 趙 珖,<洪大容의 政治思想 硏究>(≪民族文化硏究≫14, 1979), 68∼79쪽., |
444) | 丁若鏞,≪與猶堂全書≫1-16권, 詩文集, 自撰墓地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