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관료제도 개혁론
실학자들이 제기한 왕권강화론적 권력구조 개편론은 관료제도 개혁론과 표리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이익은 환국이 거듭되던 상황에서 왕도정치의 실현을 추구하며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고, ‘破朋黨’의 방안으로 군주 중심의 蕩平論과 이를 실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政制復舊論을 제시하였다. 그가 제시한 방안은 備邊司를 혁파하여 신권 우위의 정국 구도를 타파하고, 의정부의 복원을 통해서 군주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로 개편하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그는 중앙의 정치체제를 재상이 중심이 되어 당론에 좌우되지 않는 일사불란한 정책의 결정과 집행이 가능한 체제로 개편하고자 하였다. 또한 그는 특정 당파가 諫職을 독점하여 왕권과 재상권에 제한을 가함으로써 중앙권력의 집행을 방해했던 상황을 막기 위해서 간관제의 확대를 주장하였다.445)
홍대용의 관료제 개편론은 이러한 왕권강화의 주장과 연결되었다. 그는 국왕을 정점으로 한 피라미드적인 통치구조를 설정하면서, 국왕의 정령이 효율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중앙과 지방의 관제를 개혁하고자 하였다.
한편 19세기에 이르면, 정치운영의 형태가 소수의 벌열이 권력을 독점하는 勢道政治로 바뀌면서 국가기강의 문란과 관료체제의 부패, 극심한 사회경제적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를 바로잡기 위해 정약용은 관료기구의 개혁안 마련에 주력했다. 그는 우선 6조에 소속된 아문들을 재배치하고, 승정원 및 왕실관련 아문들을 모두 이조에 예속시켰다. 군영아문의 경우도 병조에 소속토록 명령전달 체계를 일원화시켰다. 또한 정약용은 권력이 집중된 관료기구의 효율적 운영을 위하여 의정부의 기능을 강화시키고자 했다. 그는 비변사를 혁파하고 중추부를 실직화시켜 변경의 임무만을 담당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동시에 그는 이전까지 비변사가 장악하던 군국기무에 대한 처리기능을 의정부에 회복시키고 고위관직에 대한 인사권을 부여함으로써, 의정부가 명실공히 관료기구의 중심이 되는 행정체계를 구상했다. 그리고 정약용은 왕과 관료집단 사이에 사적인 연결을 방지하고, 관료기구를 효율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 奎章閣의 抄啓文臣을 비롯한 淸要職폐지를 주장했다.
즉 정약용은 왕을 정점으로 하고 의정부를 통해 권력이 일원적으로 행사되도록 하여 행정의 본체인 6조를 중심으로 하는 관료체제를 강화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왕과 관료 사이에도 일정한 거리가 유지되도록 하여 사회개혁을 위한 정책이 일관성 있게 추진될 수 있는 독자적인 관료체제의 구조를 만들어 나가고자 하였던 것이다.4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