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실학개념의 모색
이상과 같이 실학에 관한 연구가 전개되던 과정에서 실학의 개념을 밝히기 위한 노력이 전개되었다. 그리고 실학의 개념은 연구자에 따라 매우 다양한 형태를 띠고 제시되었다. 이 시기 실학의 개념으로는 현실에 긴요한 시무책을 주창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487) 그러나 시무책은 성리학적 단계를 비롯한 유학의 정치사상과 정치현장에서는 반드시 등장하는 것이며, 모든 시무책은 현실문제의 타개를 목적으로 한 절실성을 가지게 마련이었다. 따라서 실학에 관한 이 개념규정은 광범위한 동의를 얻기에 이르지는 못했다.
한편 실학의 개념은 대체적으로 그 사상이 존재하던 조선 후기라는 과도기적 특성을 감안하여 전근대성과 근대성이라는 두 가지의 이질적인 시대성과「실학사상」자체가 상호 어떠한 관계를 맺고 있는지를 구명하려는 시각에서 검토되어 나갔다. 그리하여 1930년대의 일부 연구자들은 실학의 역사적 특성을 주목하여 실학이 근대적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그 개념을 규정했다. 이러한 시각의 일부를 이어받아 1960년대의 연구자 가운데 일부에서는 실학을 조선 후기「자본주의 맹아의 발생」을 반영하는 사상이거나 혹은 그러한 발전을 이끌어 준 사상으로 규정하기도 했다. 이 경우 실학은 ‘虛學’인 성리학에 대항하는 학문이라고 적극적인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 다른 연구자들은 실학을 왕조체제의 유지를 위한 봉건사상의 일종으로 규정짓기도 했다. 즉 실학이 비록 부분적으로는 당시의 문란한 제도의 개편 등을 논하기는 했다 하더라도, 이는 제도의 개편을 통해 새로운 사회를 지향했다기보다는 봉건적 이데올로기의 상징인 왕조체제를 유지 존속시키고자 하는 데에 궁극적 목적이 있는 것으로 주장되었고 이러한 측면에서 그 개념이 규정되었다
이와 같은 연구의 경향은 이미 1930년대에 백남운 등에 의해 암시되기도 했지만 1970년대를 전후하여 본격적으로 제시되었다. 한편 이 때에 이르러서는 실학이란 개념이 어느 사회에서나 등장할 수 있는 통시대적 개념인가 아니면 조선 후기의 독특한 사상경향만을 지칭하는 특수한 개념인가를 밝히려는 노력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당시의 학계에서는 대체적으로 실학이란 조선 후기의 사회개혁적 사상을 뜻하는 역사용어로 고정시켜 나갔다.
그리고 또 다른 연구자들은 실학사상에서 드러나는 과도기적 특성을 주목하여 이를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한「근대지향적」과도기의 사상으로 보고자 했다. 이 견해는 실학을 근대성으로 이해했던 1930년대 안재홍의 주장을 발전적으로 극복하여 실학사상을 새롭게 규정해서 ‘전근대의식에 대립하는 근대정신을, 沒民族意識에 대립하는 민족정신을 뜻한다’고 하여 실학사상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 ‘근대지향적·민족주의적 성격’임을 천명했다.488)
이러한 실학개념 제시는 많은 연구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개념규정이 제시된 이후 많은 연구자들은 조선 후기의 사상에서 이 기준에 의해 실학적 요소를 찾으려 했다. 그리하여 민족주의적 특성의 확인을 위해 중화문화와는 구별되는 자아인식의 존재 여부를 검출하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기도 했다. 그 과정에서 성리학적 華夷觀에 입각하여 청국을 이적시하며 조선중심사상을 전개했던 성리학자들까지도 실학자의 범주에 포함되기도 했다.
또한 모든 제도개혁론은 현상타파론이므로, 봉건적 현상을 타파하고 근대사회를 지향하는 것으로 확대 해석하여, 성리학적 입장에서의 개혁론이 존재하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몰각하고, 모든 개혁론을「실학적 개혁」=「근대적 개혁」으로 확대 해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실학의 범위는 거의 무한정하게 확대되어 나가기도 했다.
이와 같은 상황의 당연한 결과로 ‘근대지향적·민족주의적’이라는 실학개념의 모호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실학의 개념을 새롭게 규정하고자 하는 시도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실학의 개념을 ‘脫性理學’으로 규정하고 실학을 성리학과 구별되는 독자적 사상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자 시도하게 되었다. 이 새로운 시도에서도 대체로 실학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규정되었던 근대성 내지는 민족주의적 특성이 여전히 존중되고 있었다.
실학의 개념과 관련하여 ‘탈성리학’을 제시하는 입장에서는 실학사상의 기본적 틀로 실제성의 중시, 인식론의 경험적·실증적 특성의 강조, 자연과 인간의 분리와 인간의 자율의지 확보, 도덕윤리의 가변성에 관한 인식 및 만민평등사상으로 규정했다. 이것은 한마디로 ‘경험론적 사고에 기초한 근대철학과 유사한 것’으로 이해되기도 했다.489) 그러나 실학의 개념을 규정하는 데에 ‘탈성리학’이라는 용어가 가지고 있는 한계를 지적하면서 이를 수정 보완하고자 하는 노력이 전개되었다.
한편 198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실학개념에 관한 이와 같은 연구의 진전을 기반으로 하여「근대지향적 성격」·「탈성리학적 성격」등에 대한 비판적 검토의 시도가 새롭게 나타났다. 이 시도와 함께 실학에서 논의되는 개혁성이나 합리성 또는 민족주의적 성격이 조선의 정통성리학에서 논하는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름이 논의되었고, 실학의 범위를「北學思想」으로 제한하고자 하는 노력이 일어났다.490) 실학을 북학사상으로 제한하고자 하는 이 시도에서는 성리학의 본질에 해당하는 ‘性卽理’의 원칙을 부정하는 학풍이야말로 성리학과는 구별되는 실학으로 규정했다. 그리고 유형원·이익·안정복 등은 성즉리를 인정하므로 성리학자로 보아야 함을 말했다. 그리고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및 정약용 등에 의해서 주도되던 북학사상은 ‘성즉리’라는 성리학의 기본원칙을 거부했으므로 이 북학사상만을 실학이라고 하기를 제안했다.
그리고 북학사상은 ‘주리·주기설’ 자체를 부정하는 탈성리학적 성격이 실학의 철학적 성격임을 주장했다. 여기에서 북학사상은 反淸的 華夷論의 극복을 주장하는 사상이며, 조선 정통주자학의 자기극복 과정에서 제기된 개혁사상으로 규정짓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들은 종래 인간 심성 위주의 사고에서 벗어나 物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시도하고 그 이용을 제기했다고 보았다. 또한 그들은 주자주의적 심성론과 예론을 비판하고 利用厚生을 지향하는 실용 위주의 학문연구를 내세우면서 선진적인 것으로 평가된 청조의 문물과 학술의 수용을 강력히 제기하게 되었던 사상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북학사상만을 실학사상으로 보려는 견해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제시되었다. 이 견해는 북학자들이 성리학의 ‘성즉리’를 거부했다는 주장의 문제점을 제시했다. 이 반론은 홍대용이 성즉리를 확신하면서 이기론으로는 주기론을 주장했다는 사실과, 최한기까지도 ‘성즉리’의 견해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입장을 전제로 하여 제시되었다. 그리고 실학의 개념은 주자 유일기준을 거부하고 삼대의 왕정과 같은 이상적 국가공동체를 조선 후기 사회에 실현하려던 우리 나라 전근대 국가론의 마지막 원형으로 이해하고자 했다.491)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실학의 개념은 연구자나 연구시기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오늘의 학계에서 성취한 연구의 실학개념은 다음과 같이 규정될 수 있을 것이다. 즉 실학사상은 18세기 전후 조선 후기 봉건사회의 해체기에 등장한 사회개혁사상으로서, 주자 유일기준을 거부하고 원초유학의 입장에서 전개되고 있던 왕도정치론의 조선적 변용으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