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새로운 학풍의 성립
왜란과 호란 이후 풍부한 지리적 정보가 수집되었으나 기존의 방법과 이론만으로는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 어려웠다. 그런데 17·8세기에는 서양의 과학사상과 청조의 考證學이 외교루트를 타고 조선으로 유입되었다. 보수적 유학자들의 거부반응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학풍은 일부 선각자들에 의해 꾸준히 수용되었다. 그들은 중국 이외의 세계와 자유롭게 교류할 것과 과학기술에 바탕을 두고 능률과 현실을 중시하는 학문, 이른바 실사구시의 학문을 육성할 것을 주장하였는데, 당시 이들이 강조하는 내용을 가장 충실하게 제공할 수 있는 학문은 물론 지리학이었다.
명말부터 중국에는 천주교의 포교를 목적으로 체류중인 다수의 서양신부들이 있었는데 그들 중에는 훌륭한 학자가 적지 않았다. 그들이 만든 漢譯西學書, 지도, 각종 과학기구들은 북경을 다녀오는 사신들을 통하여 조선으로 유입되었던 바, 조선조정은 유교적 윤리관과 사회체제에 해를 끼칠 종교서적의 유입은 꺼리면서도 과학서적이나 기재의 수입에는 관대하였다. 그러므로 서양과학은 용이하게 전래되어 조선 후기의 지리학발달을 자극하게 되었다.
서양의 과학으로서 가장 일찍이 전래된 것은 T. Brahe의 천문이론507)과 M. Ricci의≪坤輿萬國全圖≫508)이다. 브라헤의 이론은 조선학자들의 우주관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리치의 지도 역시 기존의 天下思想을 뒤흔들어 놓았다. 리치의 지도에는 權近이 그린 세계지도(태종 2년:1402)에 없는 신대륙의 모습이 뚜렷이 나타나며 어떤 지점이나 쉽게 위치를 파악할 수 있는 경위도가 그려져 있다.509) 18세기 말까지 리치의≪坤輿圖說≫, J. Alleni의≪職方外紀≫ 등의 지리서, F. Verbiest의≪坤輿圖說≫과≪坤輿全圖≫, 地球儀 등이 계속 입수되어 우리 지식인들도 지구는 둥글고 광대하여 중국만이 우주의 중심이라는 기존의 우주관은 잘못된 것이란 확신을 갖게 되었다.
서양과학과 함께 지리학의 이론적 기초의 확립에 영향을 준 학풍은 北學이다. 이 학풍은 유학자들이 명의 멸망 후 중국문명의 정통성을 조선이 계승해야 한다는 허황된 주장을 펴는데 반대하고 실질적인 중국의 지배자가 된 청조의 문물을 배울 것을 촉구하였다.510) 그런데 이들이 강조한 것은 만주족의 문물이 아니고 서양의 기술을 수용하여 이룩한 청조의 과학기술문명을 배우자는 것이었다.511)
서양과학의 도입은 辛酉邪獄(순조 원년:1801) 후 천주교 확산을 꺼린 조정이 서학서의 수입을 금지시킴으로써 거의 중단되었다.512) 그러나 그것은 이미 星湖 李瀷에 의해 뿌리를 내리고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崔漢綺와 金正浩 등의 대가들을 배출하기에 이르렀다.513)
507) | 李龍範,<金錫文의 地轉論과 그 思想的 背景>(≪震檀學報≫41, 1976), 8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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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8) | 李睟光,≪芝峰類說≫권 2, 地理門 外國 3에 의하면 선조 36년(1603) 回還使로 북경을 다녀온 李光庭이 漢譯 세계지도를 입수하였으며, 李睟光은 이것을 열람하고 서양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고 한다. |
509) | Wallis, H., The Influence of Father Ricci on Far Eastern Cartography, Imago Mundi 19, 1965, p. 49. |
510) | 朴趾源,≪燕巖集≫별집 권 7, 鍾比小選, 序 北學議序. |
511) | 李元淳,≪朝鮮西學史硏究≫(一志社, 1986), 363쪽. |
512) | 朴星來,<韓國近世의 西歐科學 受容>(≪東方學志≫20, 연세대 국학연구원, 1978). 264쪽. |
513) | 朴星來,<洪大容의 科學思想>(≪韓國學報≫23, 一志社, 1981), 15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