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통신사업
가) 전신가설
1884년 2월 부산에 우리 나라 최초로 전신이 가설되었다. 이 전신은 일본의 長崎와 부산 사이의 해저전선이 개통됨에 따라 일본이 부산에 전신국을 세울 수 있도록 조선정부에 요구했기 때문에 조약을 체결하여 가설된 것이다.456) 이 조약은 이미 앞에서 살펴본 대로 조선정부가 전신가설에 대한 이점을 개괄적으로나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이견 없이 진행될 수 있었다.
당시 한반도의 전신망 鋪設은 경제적·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1850년 이래 진행된 세계적 전신망 가설사업으로 한반도는 블라디보스톡과 연결되는 동아시아의 교두보로 부상되었다. 즉 한반도의 전신을 장악하는 것은 북반구의 전신망을 장악하는 일이 된다고 여겨진 것이다. 정치적으로는 한반도를 둘러싼 일본과 청나라의 한반도에서의 정치·군사적 경쟁과 밀접한 연관을 가지고 있었다. 즉 청나라와 일본으로서는 우리 나라에서 일어나는 각종 정변이나 정치적·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본국에서 그 정보를 신속하게 입수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일본이 부산에 전신국을 가설한 데에 이어 청나라도 한반도에 전신가설을 추진했다. 청나라에서 추진한 전신가설은 인천을 기점으로 한성·평양을 경유하여 의주에 이르는 것으로 西路전선이라고 불렸다. 이 전신가설을 위해 청나라는 약 150여 명의 기술자와 통신사 및 견습공을 파견했으며 그들 가운데에는 덴마크인 기술자 彌倫斯(H. J. Mühlensteth)와 외국인 기술자 2명도 포함되어 있었다.457) 의주까지의 전신가설에는 이들 외국인 기술자 이외에도 상운을 비롯해 이응상·강태희·박희진과 같은 우리 나라 전신위원들도 참여했다.458) 인천-한성 사이의 전신이 먼저 가설, 개통되었고 같은 해 10월에는 의주까지 가설되어 한반도의 서북부지방에 전신이 개통되었다. 이 전신가설로 우리 나라는 중국은 물론 세계 각국과 통신의 길이 열리게 되었다.
이듬해인 1886년 5월,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차관조약을 맺고 한성-부산 사이를 잇는 南路전선을 가설하기 시작하여 1888년 6월 완공했다. 원래 이 남로전선은 우리 나라에 설치된 청나라 전신국인 華電局이 代設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조선정부가 전신가설을 계획하여 1887년 초 전신기기와 소요물품과 기술자를 확보하기 시작했다. 전신기기와 소요물품에 대해서는 인천 소재의 독일계 상사인 世昌洋行과 교섭하여 전선가설에 관한 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세창양행의 물품수입이 늦어지다가 1888년 1월과 3월에야 도착함에 따라 남로전선의 완공이 계획보다 늦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로전선은 비록 계획은 청나라와의 조약에 의해 시작했으나 결국 우리 손으로 완공된 첫 전신선이라 할 수 있다.
1888년 한반도를 관통하는 전신망이 완성된 지 3년 후에는 北路전선이 개통되었다. 이 북로전선은 한성에서 춘천을 경유하여 원산에 이르는 전선으로 서로전선이나 남로전선이 중국이나 일본과 같은 외국세력의 군사적·경제적 필요에 의해 개설되었다면 북로전선은 이 세력을 조금이나마 배제하기 위해 계획되었다고 할 수 있다.459) 이 북로전선의 가설계획은 1888년 외부고문이었던 미국인 데니(O. N. Denny)에 의해 제기되었다.460) 남로전선의 완공이 얼마 남지 않았던 1888년 2월, 그는 이 전선을 연장하여 한성으로부터 함경도에 이르는 전선을 가설하여 러시아의 전선에 접속시키려 했다. 그는 북로전선이 가설되면 일본이나 상해 등지에서 구미 방면으로 발송하는 전신이 해저선보다 싼 이 선로를 이용할 것이므로 조선의 전신망이 동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러시아의 접근을 경계하던 일본과 청나라의 압력에 의해 쉽게 실현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나라는 북로전선과 서로전선의 가설 경험을 토대로 이미 독자적으로 전선가설을 담당할 수 있을 정도로 그 능력이 성장했으며 또 전신기기와 물자 역시 청나라나 일본을 통하지 않고도 구입할 수 있는 商路를 확보하고 있었기 때문에 1891년 독자적으로 북로전선을 개통할 수 있었다. 청일의 간섭으로 개통이 계획보다 늦어져 북로전선의 본래 목적은 달성되지 못했지만 이 전선은 순전히 우리 힘으로 우리가 가설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나) 전신업무
우리 나라 전신업무는 1885년 인천-서울 사이의 전신 개통으로 청나라가 한성에 설치한 華電局(漢城電報總局)이 담당하다가, 이어서 남로전선이 완성된 후 조선정부가 電務司를 설치하자 이후로는 이 두 전보사가 관장하게 되었다. 그러나 주도권은 화전국이 가졌고, 전무사는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무사는 우리 관원을 지방분국에 파견하여 관리와 운영에 참여했고 더욱이 학생을 두어 전신기술을 익히게 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전무사는 어느 정도 독립된 체계를 갖추고 독자적인 운영능력을 키워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888년에는 조선전보총국을 개국, 전신업무를 전담하게 했다. 개국 한 달 전인 5월에<電報章程>을 마련하는 한편 국문전신부호(모스부호)를 채용하기로 결정했다. 이 국문전신부호는 金鶴羽가 이미 1885년에 고안한 것으로 이를 채택함으로써 우리 나라에서는 한문부호 외에도 간편한 국문의 전보를 시작할 수 있었다.461) 이 부호체계는 오늘날까지 사용되고 있다.
우리 나라에 가설된 전신기는 전류의 이어짐과 끊어짐을 이용하는 모스인자방식과 송수신기에 모두 알파벳과 숫자를 기입한 지침식 指字방식을 사용하였다.462) 특히 지침식 전신기는 많은 문자를 부호화하는 데 유리하였다.
다) 전문 전신요원 양성
조선정부는 개항 초부터 전신요원 양성을 위해 노력해 왔음은 앞에서도 이미 언급했다. 전신업무 시행 초부터 지방분국마다 전신인력을 배치하고 양성하는 조치를 취하여 전신분야는 다른 근대기술분야보다 더 많은 인력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896년 전신요원은 매우 부족한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것은 일본이 1894년 청일전쟁으로 한반도에서 전신업무를 장악했으나, 삼국간섭과 같은 외교적 압력으로 그 영향력이 약화되어 1896년 전신과 관련된 전 시설을 조선정부에 반환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상황변화로 말미암아 조선정부는 전신을 관장할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정부기구와 전신요원이 필요하게 되었다.463)
전신관련 업무의 총체적 관리를 위해 조선정부는 농상공부 관할의 전보총국을 개설했는데, 조선전보총국을 개설하기 한 달 전인 1896년 7월에는 電報司관제를 실시하기도 했다. 이 관제에 따라 전국의 각 지역을 1등전보사와 2등전보사로 나누었으며 서울을 비롯한 인천·부산·원산·개성·평양·의주 등 8개 지역은 1등전보사, 그 밖의 지역은 2등전보사로 구분했다. 1897년 서울의 전보사는 전보총사로 승격되었고, 1903년에는 한성전보총사 관할 아래 4개 지사를 증설하였으며, 1904년 11월에는 전국 36개 지역으로 확장되었다.
또 이 관제에 의하면 전국의 전보사의 업무를 관장하기 위해 사장과 주사를 파견하게 되어 있었다. 물론 전보사관제 실시 이전에 이미 소정의 과정을 이수하고 자격을 갖춘 전보학습원들은 대부분 주사로 임명됐다. 그러나 인원이 매우 부족했으므로 이를 보충하기 위해 1896년 일본 慶應義塾에 유학중인 학도들 가운데 80명을 전신과 체신업무를 속성으로 익혀 귀국시키려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때 단행된 무엇보다도 중요한 조치는 바로 電務學堂을 신설한 것이었다. 이 전무학당에는 이미 언급했던 덴마크인 전신기술자 彌倫斯가 전신교사로 초빙되었다.464)
비록 전무학당이 신속히 설립되었다고 해도 그 운영이 체계화된 것은 1900년<電務學徒規則>을 만든 이후에야 비로소 가능해졌다. 즉 이<전무학도규칙>으로 전무학당은 명실공히 법제상의 근거를 갖춘 학교조직으로 발전할 수 있었고 체계를 갖출 수 있었던 것이다. 이 학교는 정규 실업학교로 관비로 운영되었으며 해마다 25명의 학생을 선발했다. 이 학생들은 전보송수신술·번역·電理學·전보규칙과 외국어·산술 등의 12과목 내외에 대해 매일 6시간씩 강의를 받았다. 학생들은 월말 시험과 연말 시험 및 특별고사를 치렀고 이 시험들에 통과한 학생들만이 졸업과 동시에 전신업무에 종사할 수 있었다.465)
이와 같은 전문인력의 양성에 힘을 기울였지만 지방 전보사의 운영이 원활하게 진행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예를 들면 전보 글자 수를 잘못 세는 일부터 전보를 보내지 않거나 전보국에 외부 사람을 함부로 들여 전보 내용을 누설시키는 일들이 발생했기 때문이다. 또 전보국의 주사가 전보비를 착복하는 일들이 일어났으며466) 지방분국으로 발령을 받은 사람이 곧 지방으로 내려가지 않거나, 새로 발령받은 주사가 일이 서툴러 항의를 받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467)
이 같은 지방 전보사의 미비점들에도 불구하고 1905년 일본이 강제적으로 통신원으로 전보사의 업무를 이관하기 전까지 전신국 사업은 자주적으로 운영되며 지속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이런 점에서 전신사업은 조선정부의 집권층이 그 중요성을 일찍이 인식한 만큼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정착시킨 분야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456) | 조선정부는 일본 전신선이 설치될 부산의 땅을 일본에 25년 임대하기로 했으며 이 기간 동안 면세특권을 약속했다(國史編纂委員會,≪高宗時代史≫2, 고종 19년 1월 24일), 해저전선에 대해서는 柳炳魯,<大韓帝國時代 電氣通信의 導入에 관한 연구>(충남대 석사학위논문, 1992) 24쪽을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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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57) | 덴마크인 기술자 彌倫斯는 덴마크 대북부전신회사의 기술자로 중국전선을 가설하기 위해 청나라에 왔다가 서로전선 가설을 위해 기술감독관 자격으로 우리 나라에 왔다. 공사가 완성됨에 따라 청나라로 돌아갔다가 1885년 대동강·청천강·대정강 및 석교강 공사를 마무리하기 위해 다시 우리 나라에 왔다. 그 후 화전국의 기술자로 계속 우리 나라에 머물면서 남로전선의 가설에 참여하는 등 계속 우리 나라에 머물렀다. 그는 1896년 電務學堂의 교사로 고빙되기도 했다(유병로, 위의 글, 37∼38쪽). |
458) | ≪漢城周報≫, 1886년 1월 25일. |
459) | 유병로, 앞의 글, 30쪽. |
460) | 데니는 청나라로부터 한국에 파견된 미국인 외교고문으로 한국 이름은 덕니(德尼)이다. 1886년(고종 23) 청나라 李鴻章이 조선의 내정을 간섭하기 위하여 조선주재 총리로 보내면서, 이전에 파견했던 외교고문 묄렌도르프를 파면했다. 우리 나라에 부임한 이후 그는 청나라의 조선 내정간섭에 반대하고, 당시 한국주재 총리 袁世凱의 횡포를 비난하였으며, 조선정부로 하여금 자주독립 정신을 갖도록 권고하였다. |
461) | 金鶴羽는 1884년, 일본에 파견되어 電信을 연구하였고 귀국 후에는 전신가설을 고종에게 건의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신기술학교를 세우는 한편 서울∼인천 사이의 전신가설을 계획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갑신정변으로 중단되었다(유병로, 앞의 글, 31·34쪽). |
462) | 모스인자방식과 지침식 전신기에 대해서는 위의 글, 39쪽을 참조할 것. |
463) | ≪독립신문≫, 1899년 9월 30일. |
464) | ≪독립신문≫, 1896년 6월 11일. 彌倫斯와의 계약 갱신에 대해서는≪황성신문≫, 1899년 7월 7일, 1902년 9월 8일,≪제국신문≫, 1900년 6월 15일 기사 참조. |
465) | 金義煥,≪우리 나라 近代技術敎育史硏究≫(박영사, 1971), 118∼122쪽. |
466) | ≪독립신문≫, 1897년 11월 4일·23일, 6월 5일, 9월 7일, 1899년 7월 5일. ≪제국신문≫, 1899년 5월 3일·9일, 11월 18일. ≪황성신문≫, 1900년 3월 1일, 3월 23일, 1902년 4월 29일, 5월 7일. |
467) | ≪제국신문≫, 1900년 5월 3일. ≪황성신문≫, 1899년 6월 9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