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6권 신문화운동 ⅡⅢ. 근대 과학기술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1) 교통·통신·전기(2) 사회간접자본의 전개과정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1. 근대 신문의 효시
          • 2)≪한성순보≫의 창간
          • 3)≪한성주보≫의 발간
          • 4) 박문국의 운영
        • 2. 근대 언론의 발달
          • 2) 최초의 민간지≪독립신문≫
          • 3) 외국인의 신문 발행과 잡지
          • 4) 일간지 ≪일신문≫
          • 5) 새로운 신문들
        • 3. 언론의 구국투쟁
          • 1) 한말 언론과 계몽운동
            • (1) 국내신문
            • (2) 국외신문
          • 2) 한말 언론의 국권회복운동
          • 3) 일제의 언론규제
      • Ⅱ. 근대 종교운동
        • 1. 유교
          • 2) 한말과 일제강점기 한국의 유교개혁사상
            • (1) 도학파의 유교개혁사상
            • (2) 애국계몽사상가의 유교개혁사상
        • 2. 불교
        • 3. 천주교
          • 6) 근대 천주교회의 사회적 기여
        • 4. 기독교
          • 1) 기독교의 수용과 정착
          • 2) 교회의 발전
          • 3) 기독교와 민족의식
          • 4) 기독교와 한국의 근대화
        • 5. 천도교
          • 3) 천도교의 민족운동
        • 6. 대종교
          • 2) 대종교의 교단조직과 포교활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1. 서양과학에 대한 인식
        • 2. 근대 과학기술의 도입
          • 1) 교통·통신·전기
            • (2) 사회간접자본의 전개과정
          • 2) 근대 의료기술
          • 3) 근대건축
            • (1) 19세기 말 양식건축의 이입
            • (2) 20세기 건축
          • 4) 근대 산업기술
            • (2) 개항 이후 기계기술의 도입정책
            • (3) 대한제국시기 방직기술의 이식
            • (4) 1905년 이후 정미기술의 이식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다. 전기사업

가) 전기사업의 전개

468)우리 나라에 최초로 전등이 가설된 곳은 경복궁이었다. 1887년에 점등되었지만 경복궁 전등설치는 이미 1884년에 추진되다가 갑신정변에 의해 중단된 바 있었다. 이후 정치상황이 안정되자 전등가설사업은 곧 재기되어 완성을 보았다. 이 작업이 완료된 이후 발전 비용이 많이 들고 발전기가 설치된 향원정의 물고기들이 떼죽음을 당한 일들로 많은 비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고종은 오히려 1894년 발전용량을 늘려 창덕궁에까지 전등을 설치하도록 했다.

이 같이 궁궐에서의 전기 도입은 매우 빨리 진행되었다. 그러나 산업과 민간을 대상으로 하는 사회간접자본으로서의 전기 도입은 10년이 지난 1898년에 이르러 전개되었다. 1898년 1월 18일 내장원경을 지낸 李根培와 상인인 金斗承이 한성에 전차와 전등 및 전화 설비의 시설과 운영권을 농상공부에 신청했으며 26일 농상공부가 이를 허가함으로써 한성전기회사가 설립된 것이다. 이와 같이 민간인이나 전직 관료가 신청서를 제출한 이유는 조선의 최대 이권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전기사업에 러시아와 일본의 간섭을 배제하고 조선정부가 자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였다. 한성전기회사의 자본금은 고종이 전액 출자했으며 주미서리공사를 지낸 바 있는 李采淵 한성판윤이 초대 사장이 되었다.

한성전기회사는 설립되자마자 전차사업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서대문-종로-홍릉 사이의 노선공사가 가장 먼저 시작되었고 1899년에 완공되었다. 이 노선은 궁궐과 종로의 상권을 연결하면서 청량리를 지나 민비의 묘가 있는 홍릉까지 이어졌다. 또 같은 해에 종로에서 남대문과 용산을 잇는 연장선로가 완성되었다. 이 용산선은 조선 초기부터 수상교통의 중심지인 용산 나루에 닿아 있었다. 용산나루는 1884년 청·일본을 포함한 열강의 요구에 의해 개항된 이래 서울의 관문이 동시에 새로운 교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므로 용산선 설계의 주목적은 화물수송이라고 할 수 있다. 또 1900년 7월에는 남대문에서 봉래동과 의주로를 거쳐 서대문 밖에 이르는 선로가 개통되었는데 이 노선은 개성선과 경인선의 종착지인 서대문을 연계하여 승객과 화물을 운송하려는 의도로 가설되었다. 그러나 개성선 공사가 지연되고 서대문과의 연결이 경인선부설권을 가졌던 일본측의 비협조로 쓸모가 없어져 버려 폐쇄되었다. 이 노선은 1922년에 이르러 재개통되어 서울의 중요한 노선으로 자리잡았다.

전차의 운행은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막대한 자금이 소요되는 이 전기철도 부설사업이 추진된 데에는 여러 가지 원인이 있다. 첫째로 들 수 있는 점은 1896년도부터 시행되던 한성부 도시개량사업과 이 사업이 맞물려 있다는 것이다. 도시개량사업은 대한제국 반포 이래 제국에 걸맞는 황도를 구축하겠다는 고종의 의지가 투영되어 지속적으로 전개된 사업이었으며 이 사업에는 보건·위생사업뿐만 아니라 도로정비와 전기철도 부설사업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민비가 안장된 홍릉까지 근대적 교통수단을 이용함으로써 행차를 간소화하여 비용을 줄이는 한편, 재정고문의 교체로 생긴 100,000불의 여유 자금을 안전한 곳에 투자하겠다는 점도 주요한 배경으로 들 수 있다. 또 대한제국을 반포하면서 식산흥업을 강력하게 내세웠는데 이 전기철도 부설사업은 정부가 식산흥업을 위해 근대적 기술도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음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사업이기도 했다.

이런 요인들을 배경으로 한성전기회사는 전기철도 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01년 이후부터는 전등사업도 시작했다. 전등이 민간에 켜진 것은 그 이전인 1900년 4월의 일이었다. 종로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에 가로등 세 개를 점등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 가로등은 밤 10시까지 운행시간을 연장한 전차의 이용객을 위해 설치된 공공용도의 것이었다. 따라서 이윤 획득을 위한 전등사업의 시작은 1901년으로 보아야 한다. 이 사업은 전차운행을 위해 확장한 발전설비가 밤에 생산해 내는 전력을 이용하여 한성전기회사의 매출을 증대시키기 위해 시도되었다.

그러나 전등설치비와 사용료가 매우 비쌌기 때문에 한성의 일반민은 거의 사용할 수 없었다. 전등사업의 주요 대상은 궁궐, 진고개에 밀집해 있던 일본인 상가와 貞洞에 많이 몰려 있던 외국공사관 등이었다. 한정된 지역만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었으므로 전등사업의 영업실적은 예상외로 저조했다. 한성전기회사는 영업 부진을 만회하기 위해 일정 정도 이상의 전등을 사용하는 대수요자에게는 전등요금을 50% 정도를 할인해 주는 전략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 같은 영업 전략에 힘입어 전체 사용촉광수는 증가했으나 이것이 곧 매출 성장과 이익의 증가로는 연결되지 못하는 기현상이 초래되는 원인이 되었다.

나) 한성전기회사의 소유권 이전

한성전기회사는 고종이 전액 출자하여 세워진 근대 첨단기술을 도입한 회사였다. 그러나 ‘전기가 매우 편리하다’는 초보적인 정보밖에 가지고 있지 못했던 당시로서는 기술과 인력을 전적으로 선진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한계를 지니고 있었다. 한성전기회사의 초대 사장이 당시 친미파의 우두머리라고 알려진 이채연으로 정해졌다는 사실은 전기사업의 대부분을 미국에 의존하게 되리라는 사실을 암시했다. 실제 이 회사의 전기철도 부설사업은 미국계 상사인 콜브란·보스트위크상사에 청부되었다. 특히 콜브란(Henry Collbran)은 경인철도 부설을 위해 입국해 있었던 영국계 미국인으로, 모스가 경인선부설권을 어떤 경로로 조선정부로부터 획득하고 일본에 어떻게 매각했는지에 대해 잘 알고 있었으며 그 자신이 경인선 매각과정에서 많은 이득을 얻기도 했던 사람이다.469)

한성전기회사와 전기철도 부설공사의 청부계약을 맺은 콜브란은 공사계약금을 매우 높게 책정했다. 그리고 조선정부가 공사대금 가운데 반을 선지급했음에도 불구하고 콜브란은 이 청부권을 담보로 일본의 第一銀行으로부터 돈을 대출받았다. 그는 제일은행 대출금과 이자를 한성전기회사가 감당하게 함으로써 한성전기회사의 채무를 증가시켰다. 그럼에도 1899년 4월 조선정부는 콜브란·보스트위크상사와 한성전기회사의 관리와 운영에 관한 청부계약을 맺었다. 이 계약으로 콜브란은 회사의 경영, 전차의 운영과 노선관리, 운임의 결정 등에 관한 전권을 위임받았을 뿐만 아니라 용역비로 전체 수입·지출 전 비용의 12%에 해당하는 금액을 약속받았으며 그 밖에 운영상의 여러 특혜를 보장받았다. 그러나 콜브란이 이행해야 할 의무조항은 거의 없었다. 그나마 제시된 것이 전기기술인력을 양성하고 경영을 할 수 있도록 훈련시킨다는 강제성 없는 조항 정도였다.

한성전기회사의 전권을 위임받은 상황에서 콜브란은 콜브란·보스트위크상사에 대한 한성전기회사의 채무를 가중시키는 한편 1902년 10월 이 채무의 상환을 요구했다. 2년이 넘게 콜브란과 대한제국정부 사이에 채무상환을 둘러싼 공방이 치열하게 지속되었다. 콜브란이 제시한 채무액 가운데에는 불필요한 노선의 기획에 소요된 비용이나 시행하지도 않은 공사대금 등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 그는 한성전기회사의 지출과 수입 및 채무를 原帳을 제시하지도 않은 채 채무상환을 요구했다. 더 나아가 그는 대한제국정부와 채무 분규가 진행되는 동안 일본에 한성전기회사를 매각할 것을 검토하고 일본과 비밀리에 접촉하기도 했다. 일본이 거중조정을 제안하며 한성전기회사의 매도 가능성을 타진할 때 대한제국정부는 각국 공사에 거중조정을 거절한다는 공문을 보냄으로써 일본의 개입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러나 1904년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일본간의 전쟁의 기운이 감돌자 미국의 원조를 기대한 고종은 콜브란의 채무상환 조건을 받아들여 한성전기회사의 모든 유형·무형의 재산과 현금 75만圓을 콜브란에게 양도하였다.470) 그에 따라 고종은 주식 50%의 지분을 가지는 주주로 전락했다.

콜브란은 한성전기회사를 인수하자마자 이 회사를 미국 법률에 의해 조직해 한미전기회사로 전환했다. 즉 한국의 정치상황과는 관계없이 미국 법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미국회사가 된 것이다. 한미전기회사로 바뀐 다음 한미전기회사는 마포선을 부설하기도 했지만 신규투자를 거의 하지 않았다. 또 전차요금을 100% 인상을 감행하면서도 운행시간 조절이나 낡은 객차의 개선 등과 같은 설비 및 서비스 개선은 시도조차 하지 않아 한성부민의 항의를 받기도 했다.

한편 1909년 한반도의 정치상황이 더 불안해지자 콜브란은 한미전기회사를 120만 원이라는 헐값에 일본의 日韓瓦斯會社에 매각했다. 이는 고종이 그에게 회사소유권을 양도할 때 맺은 계약, 즉 15년 이내에 매각처분하지 않는다는 조항을 어긴 것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고종의 지분에 대해서는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아 고종이 이에 항의했을 때 그는 단지 자신이 오해한 것이라는 해명만을 들었을 뿐이었다.

다) 한성전기회사가 남긴 것

한성전기회사는 당시로서도 최첨단 기술인 ‘전기’를 도입하여 민간을 대상으로 사업을 전개했다. 전기사업은 전기 생산설비를 위해 거액의 고정자산이 필요한 사업이다. 즉 전기의 생산뿐만 아니라 수송·배급·판매에도 전용 설비가 요구되어 90% 이상이 고정자본으로 투하되어야 하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최종산물을 저장할 수 없다는 것도 이 사업의 큰 특징 가운데 하나이다.

이런 특징을 지니고 있는 사업을 조선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했으나 결국 실패로 끝난 데에는 몇 가지 문제점들이 원인으로 지적될 수 있다. 첫 번째 문제로 제시될 수 있는 것은 이 전기철도 부설작업이나 발전소 건설을 위한 제반 산업시설이 전무한 가운데 추진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전신주를 제외하고는 전부 외국에서 수입해야 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이 같이 대규모 자금이 소요되는 전기사업을 감독할 만한 기구나 인력이 조선정부내에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두 번째로 들 수 있는 문제점도 기술인력면에서 당시 전기기술자가 전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전차사업을 시작할 때 차장을 제외하고는 발전기술자뿐만 아니라 운전기사까지 외국에서 고용해야 했다. 1899년부터 전차운전이나 발전시설 및 관리를 위한 소수의 저급한 기술자들이 한성전기회사내의 훈련소를 통해 양성되기는 했으나 핵심적인 중요 기술은 여전히 외국 기술인력이 장악하고 있었고 이는 경영상의 중요한 부담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이와 같은 열악한 상황에서 전개된 전기사업은 기술도입과 관리와 경영을 모두 콜브란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전기사업을 비롯한 한성전기회사가 소유하고 있던 유형·무형의 자산이 모두 그에게 장악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金延姬>

468)전기사업에 대한 내용은 김연희의 앞의 글을 정리한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앞의 글을 참조할 것.
469)이 청부공사 거래를 알선했을 뿐만 아니라 금광을 비롯한 많은 이권을 미국인에게 제공하도록 조선정부에 영향력을 행사했던 당시 주한미국공사 알렌(H. N. Allen)조차도 콜브란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릴 정도로 콜브란은 탐욕적으로 조선의 이권에 참여했다(Fred H. Harrington, God Mammon and the Japanes, The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1944;李光麟 譯,≪開化期의 韓美關係≫, 一潮閣, 1983, 197∼198쪽).
470)한성전기회사의 무형의 재산 가운데에는 능원로 건설권, 상수도 공사권, 한강 수로 이용권 및 광산과 금융업에 대한 특허권이 포함되어 있다.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