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외국공관
한국 전통목조건축으로 일관하던 이 땅에 처음으로 지어진 서양식 건축은 아마도 1678년(숙종 4) 일본인이 세운 草梁倭館 즉 館守家를 헐고 그 자리에 1879년에 세운 새 관리관청으로 짐작되나 확실한 내용은 알 길이 없다.510) 다만 건립 다음해 일본영사관으로 쓰다가 1884년 헐고, 다시 그 자리에 새 건물을 지어 영사관 건물로 삼은 것으로 보아 큰 규모는 아니었다고 하겠다.
이처럼 1880년대 이 땅에 지어지기 시작한 양식건축은 사실상 일본인들의 영사관 건물로 시작되었다. 즉 1880년 원산에 일본인 건설업체 ‘大倉組’가 洋風 2층의 영사관을 지었는데, 후일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은 이들 각지의 영사관 건물을 그 지역의 府廳舍로 사용하였다.
인천영사관(1883), 서울영사관(1884), 부산영사관(1884) 등은 일반적으로 2층 목조로서 르네상스양식에 가까운 건물이었음이 주목된다.
19세기 말은 이처럼 양풍건축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는데, 일본인들 것이 양식과 일본목조를 절충한 儀洋風의 것이었다면, 영국·러시아·프랑스 등의 영사관 건물들은 유럽의 전통적인 건축양식으로서, 이들로서 서양식 건축이 이 땅에 이식되기 시작한 것이라 하겠다
즉 1890년 정동의 영국공사관, 1890년경의 러시아공사관, 1896년 착공된 프랑스공사관 등으로 이들은 한국 전통목조와는 달리 벽돌조적조로서 대개 2층 르네상스양식이었다.
러시아공사관(사적 253호)511)은 현재 탑 부분만이 남아 있다. 이 공사관 건물은 러시아기사 사바틴(Afanasij Ivanobich Seredin Sabatin)의 설계로 붉은 벽돌과 전통적인 전돌(塼)을 섞어 지은 2층의 제정러시아 르네상스풍의 건물이었다. 특히 정문은 개선문 모양이었으며, 현재 남아 있는 전망탑은 당시의 서울 시내를 감시하던 망루였다고 하는데 정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1층에는 탑에 출입하는 반원아치의 출입구가 있고, 속에는 망루에 오르는 철제 사닥다리가 설치되었다. 망루는 사방에 반원아치의 창문을 쌍으로 설치하고, 상부에는 삼각형 페디먼트를 두고 그 속에 원형의 메달을 두어 장식하였다.